강세황. ‘송도기행첩’ 중 ‘태종대’. 종이에 색. 1757년경. 32.8×53.4㎝.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송도기행첩’ 중 ‘태종대’. 종이에 색. 1757년경. 32.8×53.4㎝. 국립중앙박물관

5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전남 여수법원에서 특강을 했다. 오래전에 예정되었던 강의가 코로나19로 전부 취소되는 상황에서 다행히 그날 강의는 무사히 끝났다.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고 한 자리 건너 앉아 강의를 듣는 사람들을 보니 새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실감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과 사람은 만나야 하고 지식과 정보는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앞으로의 사회는 어쩔 수 없이 비대면과 언택트 방식으로 바뀔 것이다. 기계를 통한 만남은 대면과 컨택트 사회에서의 온기와 인간다움이 제거된다. 그 결과 고립감과 단절감을 느끼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코로나 블루를 겪던 미국의 억만장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예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지만 또한 사람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여수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강의를 하러 지방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명승지나 유적지를 들렀다 왔다. 그러나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번에는 조신하게 집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대신 올라오는 길에 여수 옆 동네인 순천에서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 가 보니 친구뿐만 아니라 예정에 없던 사람이 세 명이나 더 있었다. 그들은 미리 양해를 구한 것도 아닌데 당연하다는 듯이 합석했다. 친구의 친구는 자신에게도 친구이고 먼 곳에서 친구가 왔는데 귀한 친구를 대접하는 것 또한 자신들의 의무라는 논리였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순천에 왔으니 순천법을 따르기로 했다. 친구의 친구는 식사하는 도중 화엄사 금정암 얘기를 했다. 그런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가슴속에 있는 답답함이 싹 사라지면서 “무쟈게 편안해진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화엄사에서 예정에도 없던 템플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정이라 친구의 친구 ‘백’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숙박이었다. 물론 산사에서 하룻밤 자는 것만으로 가슴속의 답답함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편안한 장소에서 쉬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뜻밖의 템플스테이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났기 때문에 발생한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비대면과 언택트 만남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수 선비 붓으로 송도를 훔치다

1757년 7월이었다. 45세의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개성 유수로 가 있던 친구 오수채(吳遂采)의 초청을 받고 송도로 향했다. 송도는 인천 송도가 아니라 개성의 옛 지명이다. 그는 친구와 함께 송도와 그 북쪽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다. 이 화첩에는 총 16점의 그림과 3점의 글이 담겨 있다. ‘태종대(太宗臺)’는 ‘송도기행첩’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태종대 또한 부산 영도에 있는 관광지와 이름만 같을 뿐 개성의 명승지다. 강세황이 태종대에 갔을 때가 음력 7월이니 양력으로는 8월쯤 될 것이다. 지금의 더위가 조선시대보다 조금 더 심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장마가 끝난 현재 날씨와 비슷했을 것이다.

‘태종대’를 보면 8월 무더위를 뚫고 계곡에 당도한 사람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인물은 모두 5명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갓을 쓰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 왼쪽에 있는 사람은 아예 웃통을 벗어젖히고 바지만 걸치고 있다. 갓도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들 옆에서는 시동 둘이 서서 양반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다. 계곡 반대편에서는 한 선비가 종이를 펼쳐 놓고 앉아 있다. 강세황 자신일 것이다. 옛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마치 남인양 객관화해 그림 속에 그려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강세황은 ‘태종대’에서 계곡 주변의 바위에 음영법(陰影法)으로 선염을 해 밝고 어두운 표면의 질감을 표현했다. 두 선비가 발을 담근 계곡물에는 엷은 흰색을 칠해놓았다. 그곳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은 얼마나 맑고 깨끗하던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다. 그러나 아무리 물이 맑다 해도 물에 잠긴 부분은 잠기지 않은 부분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물속에 잠긴 바위는 연한 색으로 그린 반면 물 밖의 바위들은 짙은 먹선으로 테두리를 그렸다. 산뜻한 색채와 대담한 구도로 마치 현대 수채화를 보는 듯 참신한 작품이다.

태종대는 기록에 의하면 ‘그 넓이가 백여 명이 앉을 만하고 표면이 평평하여 자리와 같다’고 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너럭바위까지 있고 주변 경치까지 빼어나니 이곳은 여행객들에게 최고의 ‘뷰 포인트’로 입소문이 났다. 고려의 태종도 그 소문을 들었는지 이곳에 놀러 와 흐뭇한 마음으로 바윗돌에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무명씨의 바위에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강세황은 ‘예원(藝苑)의 총수’로 불리는 문인화가다. ‘예원’은 ‘예술의 꽃동산’이라는 뜻이니 예술계를 지칭한다. 예원은 예림(藝林)과 동의어다. 예원의 총수라는 말은 비록 그 성격은 다르지만 대기업 총수에 맞먹는 권위 있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거창한 호칭을 얻게 되었을까. 강세황은 그 자신이 스스로 그림을 잘 그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평에도 능한 미술평론가였다. 조선시대 선비 중에서 다른 사람의 작품에 가장 많은 작품평을 남긴 사람이 바로 강세황이었다. 정선, 심사정, 김홍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에는 언제나 강세황의 작품평이 들어가 있다. 대기업 총수는 자신의 그룹 내에서나 우두머리일 뿐이다. 반면 강세황의 미술평론은 그 시대 전체 예술가들을 총망라했으니 예원의 총수가 그룹의 총수보다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개성 유수였던 오수채가 강세황을 송도로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순히 가난한 친구를 유람시켜주기 위한 목적이 전부가 아니었다. 물론 그 당시에 강세황은 이렇다 할 벼슬자리 하나 없이 안산에서 백수로 살고 있었다. 원래 그가 태어난 곳은 한양이었지만 가세가 기울에 38세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했다. 그는 60세에 영조의 배려로 관직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30년 동안 안산에서 백수로 살았다. 그런데 60이 넘어 앞길이 활짝 열렸다. 남들은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은퇴해야 할 나이에 사회 초년생이 되어 관로에 올랐으니 그야말로 ‘의지의 조선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인생의 끝물에서 뜻밖의 기회로 정계에 입문한 뒤 고속승진을 거듭해 70세에는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에 올랐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 황제의 칠순 잔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오기도 했다.

오수채가 강세황을 송도로 부른 이유는 시서화삼절로 알려진 강세황의 안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건리(金建利)의 ‘표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연구’(‘미술사학연구’·237~238호·2003년)에 따르면, 개성 유수였던 오수채는 ‘송도속지(松都續誌)’라는 지리지를 제작할 예정이었고 그 편찬사업을 위해 강세황을 불렀다고 주장했다. ‘송도속지’가 송도 지역의 지리지인 만큼 그 안에 주변 명승지를 그린 그림이 들어가야 했고, 그 역할을 강세황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그 프로젝트를 위해 ‘송도속지’ 편찬자인 오수채가 강세황과 함께 송도의 명승지를 동행하게 되었고,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양의 관리들이 뛰어난 명승지가 있는 지방에 부임하게 되면 친구들을 불러 그 지역의 문화해설사를 자처했던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청자는 궁벽한 지방관리 생활의 적적함을 견딜 수 있었고, 초대받은 사람은 각종 편의시설을 무료로 이용하거나 실비로 제공받으면서 그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남길 수 있었다. 이것이 조선 후기에 기행사경도가 유행하게 된 배경이었다. 이런 산수유람풍조는 영정조 시대에 왕실 차원에서 각종 지리지를 편찬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유람자들은 각종 지리서에 담긴 ‘가볼 만한 곳’을 찾아 유람을 떠났고, 명승지마다 그림과 시로 인증샷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백수였던 강세황이 ‘송도기행첩’을 그릴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오수채와 강세황의 만남이 있었기에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사람의 온기는 사라지고 말하는 사람의 진의마저 곡해하기 쉬운 비대면과 언택트 대화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만남이 준 축복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즐거운 벗과의 만남

작자미상. ‘호계삼소도’.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호계삼소도’.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코로나19로 비대면과 언택트가 강조되다 보니 새삼스럽게 그 이전의 생활방식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 악수를 하고 얘기를 나누고 동행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가 하는 것을. 만남은 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만의 좁은 식견을 수정할 때도 있고,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는 벗들과의 대화가 너무 즐거운 나머지 스스로 정한 수행원칙마저 잊어버렸다는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에 등장한 인물은 중국 육조시대의 고승 혜원(慧遠·334~416 또는 335~417)과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 그리고 도사 육수정(陸修靜·406~477)이다. 혜원 스님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수행할 때였다. 스님은 어떤 손님이 오더라도 절 앞의 다리인 호계(虎溪)를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반가운 벗 도연명과 육수정이 찾아왔다. 혜원 스님은 벗들과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들을 배웅하는 도중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이때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는 우리나라의 산신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산신은 수행자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리 이름을 ‘호랑이 다리’라는 뜻의 ‘호계’로 부른 것도 그곳이 산신의 보호를 받는 수행처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튼 세 사람은 무의식중에 다리를 건넌 후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혜원선사의 수행원칙을 벗어난 것을 알고 껄껄 웃었다. ‘호계삼소도’에서 맨 왼쪽에 뒤를 돌아보며 웃는 사람이 도연명이다. 중앙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이 혜원 스님, 오른쪽이 육수정이다.

‘호계삼소’는 ‘호계의 다리 위에서 세 사람이 웃었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유교·불교·도교 삼교(三敎)의 회통과 화합을 상징하는 의미로 한·중·일 삼국에서 회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도연명은 유학자로서 지식인을 대표하고 혜원선사는 불교를, 육수정은 도교를 대표한다. 호계삼소도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성행한 회화 양식인데 조선 중기 이후로는 그 인기가 시들해졌다. 주자성리학이 조선의 중심철학으로 정립되면서 불교와 도교를 폄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삼교의 대표들이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는 호계삼소는 다분히 그 진정성이 의심받기도 한다. 혜원 스님이 세상을 떠난 416년에 육수정의 나이는 열 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각 종교를 대표할 만한 유명인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 메시지가 삼교의 화합이다. 그러나 필자는 저 재미있는 그림에서 단순히 종교적 화합만을 읽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의 즐거움까지 읽는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호계삼소도’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대화를 하는 도중 우연치 않게 발생한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풀어낸 인물화다. 우리는 이런 만남을 복원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는 수기자오(修己自娛)하며 독락(獨樂)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내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답사를 다니다 보면 ‘삼락당(三樂堂)’이니 ‘사락당(四樂堂)’이니 하는 현판을 자주 볼 수 있다. 또는 ‘사락헌(四樂軒)’이니 ‘사락정(四樂亭)’도 흔히 눈에 띈다. 인생에서 그만큼 ‘삼락’과 ‘사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삼락에 대해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근엄하신 공자님이시다. 공자는 “유익한 좋아함이 세 가지이고 손해되는 좋아함이 세 가지”라고 운을 뗀 다음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였다. 즉 “예악의 절도를 분별하기를 좋아하며, 사람의 선함을 말하기 좋아하며, 어진 벗이 많음을 좋아하면 유익하다”고 했고, “교만함을 즐거워하는 것을 좋아하며, 편안히 노는 것을 좋아하며, 잔치를 즐거워하는 것을 좋아하면 손해가 된다”고 했다. 역시 공자님이시다. 곱씹어볼수록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다만 공자의 삼락은 개인적 취향을 반영하기보다는 인생의 태도와 자세를 지적한 것 같아 매우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님의 도통을 이어받은 맹자도 삼락에 대해 한마디 했다. 그런데 맹자의 배포가 장난이 아니다.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모가 다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고 땅을 굽어봐서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않은 것, 천하의 영재들을 얻어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왕이 되어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공자와 맹자의 삼락은 유가(儒家)의 거두들답게 소인들의 좁은 소견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공자와 맹자가 삼락에 대해 정의한 이후 후대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에 맞춰 자신의 즐거움을 추가하거나 각색했다. 그것이 네 가지 즐거움, 사락이다.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는 별채 이름을 ‘사락당’이라고 지었는데 그의 사락은 서도송학(書圖松鶴)이었다. 책, 그림, 소나무, 백학이란 뜻이다.

유유자적을 사락으로 꼽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 전기의 도학자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 이천 농막에 살 때였다. 언덕 위를 걷다 박승경(朴承璟)이라는 사람이 지은 정자에서 ‘사락’이라는 편액을 발견하고 그 뜻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주인은 한가롭고 편안함을 누리고 있으니 한 가지 즐거움이요, 찾아오는 손님이 모두 훌륭한 현량(賢良)들이니 두 가지 즐거움이요, 들에는 곡식이 풍성하니 세 가지 즐거움이요, 시내에는 고기 새우가 푸짐하니 네 가지 즐거움입니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은 촌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락을 농상어초(農桑漁樵)라고 했다. 농사짓고 누에 치고 고기 잡고 나무하기라는 말이다. 인생의 즐거움은 꼭 유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세상에 드러나기를 꺼려 이름을 숨기고 사는 은일자(隱逸者)에게도 사락은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락은 어초경독(漁樵耕讀)이었다.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독서하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은 무엇일까. 버킷리스트가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라면 삼락은 그보다 훨씬 편안한 상태에서 추구해 볼 만한 인생 태도다. 당분간은 그 즐거움을 구상하고 누리면서 비인간적인 비대면 시대를 슬기롭게 보내야 할 것 같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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