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암의 대웅전 뒤로 투구 모양 바위가 둘러싸고 있다.
주사암의 대웅전 뒤로 투구 모양 바위가 둘러싸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사암(朱砂庵)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에 한 도인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곤 하였다.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임금은 궁녀가 가서 자는 곳에 붉은 암석에서 나온 물감인 주사(朱砂)로 표시하게 하고 군사를 풀어 그곳을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붉은 주사의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도인이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사스러운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군사 수천 명을 보내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 도인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 번 주문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나타나서 산과 골짜기에 늘어섰다. 군사들이 놀라 물러섰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후로 절 이름을 주사암이라고 하였다.”

이 전설을 읽으면서 주사암을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늘에서 신중이 내려왔다는 이적이 흥미를 유발하였다. 특히 신통력을 가능케 한 방법이 주술이라는 점, 도인이 궁녀를 좋아하였다는 부분이었다. 대개 도인이라면 색계(色戒)를 지키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다. 주술을 연마함으로써 신중을 불러들일 만한 터는 어떤 입지조건을 갖춘 터인가. 주술을 외운다고 해서 누구나 신통력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주술을 외워서 효험을 볼 수 있는 터는 정해져 있다. 입지조건이 맞지 않는 곳에서 아무리 주술을 외워 보아야 헛방이다. 노력에 비해서 얻는 효과가 미미하다. 문제는 입지조건, 터가 주는 파워에 달려 있다. 과연 주사암 터에는 천몇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신중이 머무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필자가 주사암에 가고 싶었던 주요한 관심사였다. 이런 터는 보통 사람과 가는 게 아니다. 술이나 먹고 고기 좋아하는 범부들하고 가면 자칫 잡담이나 하다가 초점이 흐려질 수가 있다. 천안(天眼)이 열린 도인하고 가야 한다. 눈에 안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는 세계 사이의 상호 착종하는 관계를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한다. 법계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해 보기 위해서는 천안통이 열린 도인과 함께해야 한다. 그러나 도인이 어디 그리 흔한가! 팔공산에서 도 닦고 있는 팔봉(八峰) 선생과 함께 주사암에 올라갔다. 팔봉 선생은 천안통이 열린 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인간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 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현실세계를 좌우할 수도 있다.

장수 배출하는 투구바위

주사암은 경북 경주 서쪽의 오봉산에 있었다. 오봉산은 해발 730m. 주사암은 거의 정상 부근 바위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다. 암자의 위치는 대략 700m쯤 될까. 암자로 올라가는 고갯길이 아주 가파르다. 특히 갈지(之) 자로 올라가는 고갯길이라서 세단은 불편하다. 올라갈 때 앞쪽 휘어지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위험하다. 지프가 편할 것 같다. 오봉산의 정상은 바위로 되어 있었다. 바위의 형상을 보니까 그 생김새가 투구바위이다. 바위 모습이 장수의 투구 형태로 되어 있다. 투구바위가 있으면 장수가 배출된다. 충청도의 김좌진 장군 생가터에서 앞산을 바라보면 오른쪽 멀리에 투구바위가 보인다. 이 투구바위의 정기를 받고 김좌진 장군이 배출되었다는 이야기가 풍수가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전북의 회문산(回文山)이 투구 형태로 되어 있는 산이다. 주사암의 정상은 투구로 되어 있다. 군인들이 쓰는 철모 위로 뾰족하게 바위가 솟아 있으면 투구 형태로 간주한다. 이 터에는 장수가 거처하거나 아니면 밀리터리 에너지가 꽉 차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군사 훈련터로도 적합하다.

암자는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었다. 투구가 암자를 둘러싸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암자터가 전체적으로 보면 ‘ㄷ’ 자 바위 동굴에 해당한다. ‘ㄷ’ 자로 바위가 둘러싸고 있으면 에너지가 빠져 나가지 못하고 압력밥솥처럼 농축된다. 거기에다 암자 입구부터 양쪽에 석문(石門)이 버티고 있다. 선계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석문을 통과해야 한다. 돌문이 있다는 것은 이 돌문의 에너지로 인해서 성(聖)과 속(俗)의 세계를 구분해주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도교의 오래된 사원이나 불교의 사찰, 또는 자연적인 수행터는 그 입구에 석문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입구에 들어갈 때 석문이 있으면 ‘아! 이 터는 보통 터가 아니구나!’ 하고 짐작해야 한다. 주사암이 바로 그런 터였다.

주사암 근처에 있는 마당바위.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이다.
주사암 근처에 있는 마당바위.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이다.

기운이 머리로 뻗어올라와

대웅전 옆으로 ‘朱砂菴(주사암)’이라 는 현판이 걸린 조그만 법당이 있었다. 법당의 뒤쪽 바위 맥을 보니까 투구바위의 에너지가 이 법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10여분 정도 마루에 앉아있어 보니 기운이 바닥에서 강하게 올라온다. 찡 하고 머리로 올라온다. 옆에 있던 팔봉 선생에게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특별한 진단이 내려진다. “이 법당 안에 신장(神將)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신장입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신도들이 기도를 하면 이 신장으로부터 받는 어떤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신장이 있었던 것이라고 보여지는지 묻자 “적어도 수천 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수만 년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체계화된 종교가 없던 원시시대부터 자리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만 년 전에 도를 닦은 정신세계의 고단자가 육체를 벗은 다음에 이 터에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죠. 이 터의 바위 형태가 투구바위로 되어 있으니까, 그 투구바위의 에너지에 맞는 정신세계의 존재가 거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팔봉 선생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 보니 신라시대에 하늘의 신중을 불러서 임금의 군사를 제압했다는 전설이 이해가 된다. 신중(神衆), 또는 신병(神兵)은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이 신중(신병)들이 거처하기에 적합한 터가 투구바위로 되어 있는 주사암이다. 일반 평지에서 신중(신병)을 불러모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앞뒤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신중(신병)을 부리는 파워이다. 전설에서는 주술로 되어 있다. 주술은 무엇이냐. 신을 설득하는 소리이다. 소리 자체는 파워가 있다. 같은 사운드를 계속해서 반복하면 그 파장이 공간을 타고 전체로 퍼진다. 신라시대에 존재했던 신인종(神印宗)이 바로 주술을 전문적으로 연마해서 신중(신병)을 부리는 주특기가 있었다. 신라의 명랑법사가 감포 앞바다에서 신라를 침략해 들어오는 당나라 수군을 물속에 수장시켰다는 주술이 바로 신인종의 주술 아니었던가.

고대 세계로 올라갈수록 주술의 힘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 가장 믿지 않는 분야가 바로 주술이다. 주술은 아프리카 부두교에나 남아 있는 하찮은 미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불교 사찰에는 주술만을 전문적으로 연마한 주금사(呪噤師)가 있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일은 그 시대마다 이 주금사를 동원하곤 하였다. 이 주술의 전통은 고대부터 신라로 이어져 현재까지 이어져 온다. 그 주술 전통의 유적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사암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 암자의 법당에는 아직도 정신세계의 신장이 머무르고 있으니 그 효험이 마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정성을 기울이면 감응이 있기 마련이다. 신라시대라고 해봐야 대략 1500년밖에 안 되었다. 수십만 년의 정신세계 역사에 비추어 보면 1500년은 그리 오래된 시간도 아니다.

신라 화랑들의 무예 연마터?

주사암에서 또 하나 볼 만한 공간은 마당바위이다. 법당 앞의 계단을 통해서 오른쪽으로 200m쯤 가니까 평평한 바위가 나타난다. 대략 해발 700m 높이에 있는 마당바위이다. 넓이는 100여평(330㎡) 규모나 될까.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해발이 높으니 주변 전망이 탁 트인다. 주사암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무렵이었는데, 서쪽의 석양 빛이 마당바위에 비치니 앉아서 좌선을 하기에 좋은 타이밍이었다. 같이 간 일행 여러 명이 마당바위에 앉아 보니까 올라오는 바위 기운이 보통 에너지가 아니다. 아주 짱짱한 기운이다. 지기가 곧바로 머리 쪽으로 올라온다. 이 마당바위는 거의 50~70m 높이의 바위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삼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마치 칼로 자른 듯 90도의 바위 절벽이다. 이런 마당바위에서는 바둑을 두거나 고스톱을 치더라도 에너지는 받게 되어 있다. 하루 1시간만 이런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 컨디션이 최상일 것 같다. 아마도 신라의 화랑들이 이 마당바위에서 무예를 연마하거나, 수도를 하는 좌선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 같다. 그 용도로 딱 맞는 구조이다.

오봉산은 신라 화랑들의 우정이 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 효소왕 때 화랑 득오가 죽지랑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산에는 신라 화랑 때부터 부산성(富山城)이 있었다. 군사요충지였다. 경주의 서쪽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경주의 동쪽을 방어해주는 산이 토함산이다. 동쪽에서는 왜구가 공격해왔다. 그래서 토함산에는 석굴암을 조성해서 왜구를 견제하고, 석굴암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동해의 감포 앞바다에는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대왕암이 포진하고 있다. 서쪽은 백제로부터의 공격 루트이다. 이 백제 공격 루트를 방어해주는 산이 주사암이 있는 오봉산이고 부산성이었다. 그 유명한 여근곡(女根谷)도 바로 이 오봉산 자락에 있다. 멀리 도로에서 자동차로 가다가 여근곡을 바라보면 그 모습이 흡사 여근처럼 생겼다. 백제 군사들이 이 여근곡에 숨어 있다가 격퇴된 바 있다. 하늘의 신병을 불러들일 만한 터, 주사암은 신화와 주술, 화랑의 역사가 어우러진 영지임에 분명하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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