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자화상. 아래 부분은 지난 7월 8일 구글이 탄생 427주년을 기념해 로고에 올린 젠틸레스키 이미지.
이탈리아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자화상. 아래 부분은 지난 7월 8일 구글이 탄생 427주년을 기념해 로고에 올린 젠틸레스키 이미지.

서울특별시의 한 여성 공무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을 경찰에 고발한 지난 7월 8일, 구글은 로고에 미투(#Me too) 운동의 선구적 인물로 평가되는 이탈리아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의 자화상을 올렸다. 7월 8일은 그의 탄생 427주년 기념일이었다.

젠틸레스키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삶과 작품 세계가 재평가된 화가이다. 젠틸레스키는 400여년 전에 성폭력을 당하고도 법정에서 당당하게 피해 상황을 밝히며 구제를 요청하였다. 어린 여성이었던 그녀는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2차 가해도 당하였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식들을 키웠고, 작품 세계도 완성하는 등 굳건하게 삶을 이어나갔다. 이 때문에 젠틸레스키에 대한 평가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스승 타시에게 강간당한 후 재판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 로마에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지오와 어머니 프루덴치아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로마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는 화가였는데 작품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16세기 로마는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다. 로마가톨릭은 로마에 있는 많은 성당을 보수하는 작업을 펼쳤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는 예술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광장 건설과 귀족들의 저택 건설 및 장식 작업 등이 많이 이뤄졌다. 로마에는 화가와 건축가들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순례자들은 물론 거지, 창녀, 도둑들도 밀려들었다.

젠틸레스키가 12세 되던 1605년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젠틸레스키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살림을 챙기고 동생들을 키워야 했다. 이때부터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그림을 배웠을 것으로 사람들은 추정한다. 다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어 나중에 어른이 될 때까지 글을 익힐 수 없었다.

젠틸레스키는 바로크미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카라바조(1571~1610)의 영향을 받았다. 카라바조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을 극단적으로 대비하여 인물을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한다. 서양 미술을 카라바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젠틸레스키가 7살 때인 1600년에 카라바조는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 ‘성 마태오 3부작’을 그려 당시의 미술계와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젠틸레스키가 아버지의 친구인 카라바조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성당으로 가서 ‘성 마태오 3부작’을 관람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아버지의 그림 속에서 카라바조의 영향을 흡수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젠틸레스키는 17세 때인 1610년 첫 작품 ‘수산나와 장로들’을 완성하였다. 딸의 재능에 자부심을 갖게 된 아버지는 화가이자 동업자인 아고스티코 타시에게 지도를 맡긴다. 당시 화가는 남성 전유 작업이었다. 화가를 지망하는 청년들은 스승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젠틸레스키의 아버지는 집으로 그림 선생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타시는 인정받는 화가였지만 폭력적이고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젠틸레스키는 18세 때 타시에게 강간당했다. 타시는 이후 결혼을 약속하며 거듭 육체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타시가 강간 전과자인 데다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젠틸레스키의 아버지는 그를 강간혐의로 고소하게 된다. 7개월 동안 지속된 이 재판은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재판 기록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재판 내용을 보면 가해자 측이 피해자를 부도덕한 인물로 격하시키기 위해 온갖 거짓과 2차 피해를 가했는데 행태가 오늘날과 매우 흡사하다.

재판의 초점은 젠틸레스키가 강간을 당했을 당시 과연 숫처녀였는가에 모아졌다. 타시는 젠틸레스키가 처녀도 아니고 남자관계도 복잡한 부도덕한 여성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재판에는 산파들이 동원되어 젠틸레스키가 최근에 처녀성을 상실했는지, 아니면 그 이전에 상실했는지를 점검하기도 하였다. 이보다 더 지독한 일은 젠틸레스키 증언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양손 엄지손가락을 짓이기는 고문을 가한 일이었다. 자칫 화가로서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젠틸레스키는 온갖 고문과 수치를 극복하고 진실을 증언하였다. 젠틸레스키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다.

“내 침실 근처에 있는 그림을 봐주겠다는 구실로 타시가 침실로 접근한 다음 나를 침실로 밀쳐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침대 위에 자빠뜨리고,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다음 타시는 내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밀어넣어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게 하였고… 강간하였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칼을 집어던져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등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강간 후 타시는 내가 처녀라는 사실에 놀라서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타시는 이후 결혼을 빙자하여 젠틸레스키에게 성관계를 계속 요구하였다. 젠틸레스키의 증언은 이어진다. “내가 그 이후에도 그와 관계를 가진 이유는 그가 나를 더럽히고 나서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타시 이외의 어떤 남자와도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타시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서 그에게 직접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삼고 싶었지만, 이제 당신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타시는 범행을 부인하는 거짓말로 일관하였다.

“나는 젠틸레스키와 육체관계를 가진 적도 없으며, 시도해본 적도 없습니다. 젠틸레스키의 집에서 그녀와 단둘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집을 갈 때마다 젠틸레스키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하여 집을 지켰습니다.”

젠틸레스키의 그림들. 왼쪽부터 ‘수산나와 장로들’, ‘유디트와 하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젠틸레스키의 그림들. 왼쪽부터 ‘수산나와 장로들’, ‘유디트와 하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강간범의 거짓말과 불리한 증언들

그런데 재판이 7개월이나 이어지면서 타시의 근거 없는 거짓말은 늘어났다. 타시는 젠틸레스키가 여러 남자에게 야한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젠틸레스키는 글을 배우지 못해 읽지도 쓰지도 못하였고 타시의 증언은 거짓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심지어 타시는 젠틸레스키가 다섯 남자와 돌아가며 잠자리를 하였으며, 아버지와 근친상간 관계이며, 그 아버지가 빵 한 조각만 받고도 젠틸레스키를 팔아넘겼다는 주장도 펼쳤다. 또 젠틸레스키뿐만 아니라 젠틸레스키의 사망한 어머니, 이모, 자매들까지도 모두 집으로 남자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인 창녀들이며, 자신이 젠틸레스키와 결혼하지 않은 것도 그녀가 창녀이고 집안이 매음굴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타시는 매수한 증인들을 동원하여 젠틸레스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만들었다. 요즘으로 치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사주한 셈이다. 매수된 증인들은 젠틸레스키가 남성 화가들 앞에서 누드 모델로 활동한 창녀였으며, 그 아버지도 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기기도 하였다고 주장했다. 타시와 타시 측 증인들이 이처럼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자 판사가 제재를 가하기도 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타시가 처제를 강간했던 사실이 드러났으며 부인의 죽음을 사주한 혐의도 받게 되었다. 결국 타시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8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반면에 18세의 젠틸레스키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온 세상에 알려지는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젠틸레스키는 판결 직후 무명 화가인 안토니오 스티아테시와 결혼하고 피렌체로 이주하였다. 당시 피렌체는 로마에 비하면 훨씬 개방적이었는데 예술애호가인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젠틸레스키는 피렌체에서 3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 미켈란젤로의 조카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작품을 인정받아 여성 최초로 예술원 회원에 등극하였다. 그 후에는 로마, 런던, 나폴리 등에서 생활하며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다.

젠틸레스키는 성폭력을 당하고 재판정에 선 직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그렸다. 유디트는 구약성경 외경에 나오는 유대인 여성이다.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인하여 목을 벤 전설의 여성 영웅이다. 많은 화가가 이를 모티브로 작품을 남겼지만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남다르다.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요청으로 제작한 것인데,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제작비도 받지 못하였다. 갈릴레이가 부탁하여 간신히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젠틸레스키가 작품 속에서 유디트에는 자신의 모습을, 목이 잘리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에는 강간범 타시의 얼굴을 담았다고 설명한다. 유디트의 표정에는 단호한 결의가 드러난다. 목이 떨어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섬뜩하다. 팔뚝은 돼지를 잡는 시골 아낙처럼 굵고 힘이 넘친다. 그러면서도 유디트의 드러난 가슴골과 화려한 의상은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유디트를 도와 적장을 제압하는 하녀의 존재이다. 젠틸레스키는 강간을 당할 때에도 믿었던 하녀 투지아에게 배신당했다. 재판을 받을 때에도 그에게 2차 가해를 가한 여성들이 많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박원순 시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 중 여성이 적지 않다. 젠틸레스키가 작품에서 하녀를 등장시킨 것은 여성들에게 연대의 필요성을 일깨우려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그림에 남긴 메시지들

젠틸레스키가 또 즐겨 그린 테마는 ‘수산나와 장로들’이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다. 미녀 수산나에게 음심을 품던 두 장로가 있었다. 이들은 수산나가 목욕하는 순간을 엿보다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 음탕한 여자라고 소문을 내겠다고 협박한다. 수산나가 누명을 쓰고 죽게 된 순간 다니엘이 나타나 두 장로의 거짓을 폭로한다. 결국 수산나는 살고 두 장로가 사형에 처해진다는 이야기이다. 역시 성폭력 피해자에 가해지는 2차 가해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젠틸레스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주로 여성들이지만 나약한 모습이 아니다. 단호하고 파워풀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젠틸레스키가 영국에 남긴 자화상을 보면 끊임없이 탐구하고 정진하는 자세를 드러낸다. 구글이 지난 7월 8일 젠틸레스키의 생일을 기념하면서 로고에 유디트가 아닌 이 자화상을 담은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우태영 자유기고가·‘이탈리아를 만나면 세상은 이야기가 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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