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미상. ‘성탕해망(成湯解網)’. 비단에 색. 106.7×43㎝.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성탕해망(成湯解網)’. 비단에 색. 106.7×43㎝. 국립중앙박물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출발할 때는 사회를 위해, 역사를 위해 헌신해 보려는 각오로 시작했을 것이다. 순수한 열정으로 열심히 뛰다 보니 이름이 알려졌고, 열혈팬들이 운집하고 사회적 지명도가 높아짐에 따라 벼슬이 주어졌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벼슬과 함께 권력이 생기다 보니 주변에는 온통 칭송하는 사람과 굽신거리는 예스맨들만이 포진했다. 그 지점에서 보통 사람들은 열에 아홉이 전도몽상에 빠지기 십상이다. 자신을 그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했던 사명감과 역사의식은 오만함과 권위의식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확신하게 된다.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

이쯤 되면 불법이나 위법도 서슴지 않게 된다. 아니, 불법을 저질렀다는 의식조차도 없다. 나랏일을 하다 보면 이 정도쯤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필요악이라고 자기최면에 빠진다. 그 순간까지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현재의 자신이야말로 순수했던 시절에 그가 타도하고자 했던 개혁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이 모든 과정이 닭벼슬만도 못한 벼슬에 취해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한 데서 발생한 일이다. 조국과 윤미향과 안희정과 박원순 사태를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런 일이 어찌 그들만의 문제겠는가.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조고각하(照顧脚下)가 필요하다. 내가 지금 딛고 서 있는 발밑을 잘 살펴봐야 한다. 중국과 조선의 역대 제왕들이 끊임없이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과거에서 교훈을 얻기 위한 역사 공부를 강조했던 이유도 그만큼 초심을 지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탕의 덕은 금수에게까지 미쳐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생겨나서 머무르고 붕괴되고 사라진다는 뜻이다. 왕조도 마찬가지다. 어느 왕조든 그 나라를 세운 태조가 있다면 나라를 말아먹은 마지막 황제도 있다. 우(禹)임금이 세운 하(夏)나라도 걸왕(桀王) 때 망했다. 걸왕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든 희대의 폭군이었다. 주지육림은 말 그대로 술로 만든 연못과 고기의 숲이다. 걸왕은 술로 연못을 파서 배를 띄우게 하고, 고기로 포를 떠서 나무에 걸어 놓게 했는데 그 양이 숲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술지게미를 쌓은 제방은 10리 밖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걸왕은 주지육림을 만들어놓고 신하 3000명을 데려와 북을 한 번 칠 때마다 소처럼 엎드려 술을 마시게 했다. 그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으니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황폐했을지는 상상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황음무도한 걸왕을 무너뜨리고 하나라를 멸망시킨 왕이 탕(湯)임금이다. 탕임금은 무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흔히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탕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商)나라를 세웠다. 상나라는 후에 도읍을 은(殷)으로 옮겼기 때문에 은나라라고도 부른다. 상이나 은이나 모두 도읍지의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썼다. 어느 시대든 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태조의 첫째가는 자격요건은 덕이다. 탕임금 역시 덕이 충만한 왕이었다. 그의 덕이 어느 정도로 넓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탕임금이 외출을 했을 때였다. 들에서 새그물을 친 백성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사면 모두 그물을 쳐 놓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하늘 아래 사방 모든 새는 내 그물로 들어오라!”

이 말을 들은 탕임금은 새들이 전부 사라질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그물의 삼면을 풀어주면서 이렇게 축원의 말을 했다.

“왼쪽으로 갈 자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갈 자는 오른쪽으로, 높이 날 자는 높이 날고, 낮게 날 자는 낮게 날아가거라. 내 명령을 듣지 않는 놈만 내 그물로 들어오너라!”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여러 제후국들은 탕임금의 덕이 금수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보고 그 덕과 어짊에 감탄했다. 당시는 탕임금이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많은 나라가 어느 줄에 설까 눈치를 보고 있던 참에 탕임금이 새그물을 풀어준 얘기를 듣게 되었다. 소문을 들은 36개 나라가 일시에 상나라에 귀의해 왔다. 몇 년을 고생해도 정복을 장담할 수 없는 제후국들을 그물 하나로 전부 포섭해버린 것이다. 용장(勇將)은 지장(智將)을 이길 수 없고 지장은 덕장(德將)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탕임금이야말로 최고의 덕장이었다.

필자 미상의 ‘성탕해망(成湯解網)’은 탕임금이 그물을 풀어주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은 작은 언덕들이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있고 그 중앙에 탕임금이 보인다. 탕임금 위쪽 언덕에는 말뚝이 두 개 박혀 있고 그 사이로 새그물이 촘촘하게 걸려 있다. 탕임금과 대각선 아래쪽으로는 수레와 신하들이 서 있고, 우측 하단에서는 세 사람이 새그물을 걷어내고 있다. ‘성탕해망’은 중국의 고대 현군들을 그린 6폭의 ‘고석성왕치정도(古昔聖王治政圖)’에 들어 있다. 탕임금은 요순 두 임금 다음으로 덕을 실천한 위대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농사짓던 이윤이 탕을 도와 상나라를 세우다

탕임금이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상나라의 태조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현명한 신하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해 나라의 정사를 맡겼기 때문이다. 탕임금과 이윤의 만남은 워낙 유명해 그림의 소재로 자주 선정되었다. 이윤은 원래 유신씨(有莘氏)의 노비였는데 탕임금이 유신씨의 딸에게 장가들었을 때 몸종으로 혼수와 함께 갔다고 전한다. 그는 탕에게 음식 맛을 예로 들어 설득함으로써 왕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유신씨가 요리사였다는 설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 자세한 내용이 ‘맹자(孟子)’의 ‘만장(萬章)’ 상(上)에 나온다. 조금 길지만 이윤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므로 소개하겠다.

만장이 맹자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윤이 요리 솜씨로 탕임금에게 등용될 길을 찾았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말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윤은 유신의 들에서 농사지으면서 요순의 도를 즐기며 살았다. 그는 정의가 아니거나 정도가 아니면 천하를 녹(祿)으로 준다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고, 말 4000필을 매어 놓아도 쳐다보지 않았다. 정의가 아니거나 정도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도 남에게 주지 않았고 지푸라기 하나도 남한테 받지 않았다. 탕임금이 사람을 시켜 폐백을 보내어 그를 초빙하였으나, 그는 욕심 없는 모습으로 말하기를, ‘내가 탕임금의 초빙하는 폐백을 받을 이유가 뭐 있는가. 어찌 이대로 들녘에서 농사지으며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탕임금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초빙하자, 이윽고 마음을 고쳐먹으며 말하기를, ‘내가 들녘에서 농사지으며 이대로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이 어찌 이 임금을 요순과 같은 성군으로 만드는 것만 하겠으며, 어찌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만 하겠으며, 내 몸으로 요순의 도가 행해지는 것을 직접 보는 것만 하겠는가. 하늘이 이 백성을 낼 때에는 먼저 안 자에게 늦게 아는 자들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자에게 늦게 깨닫는 자들을 깨우쳐 주도록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 먼저 깨달은 자이니, 내 장차 이 도로 이 백성들을 깨우쳐 줄 것이다. 내가 깨우쳐 주지 않고 누가 깨우치겠는가’ 하였다.”

여기까지 단숨에 말한 맹자가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요순시대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가 이처럼 천하의 중책을 자임하고 나섰기 때문에 탕임금에게 나아가 설득하여 하나라를 정벌하고 백성들을 구제한 것이다. 나는 자기 자신을 굽혀서 남을 바로잡았다는 사람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하물며 자신을 욕되게 하면서까지 천하를 바로잡는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성인의 행실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어서, 멀리 피하여 은둔하는 사람도 있고 가까이 나와 벼슬하는 사람도 있으며, 떠나는 사람도 있고 머무는 사람도 있지만, 이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나는 이윤이 요순의 도로 탕임금에게 요구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요리 솜씨로 그렇게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윤을 위한 맹자의 변명이 길고도 길다. 성인들의 출처가 비록 다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는 얘기다. 양기성(梁箕星·?~1755)이 1720~1730년경에 그린 ‘이윤경신(伊尹耕莘)’은 맹자가 만장에게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이다. 농사를 짓고 있던 이윤이 유신의 들에서 탕임금의 초빙하는 폐백을 받고 있는 장면이다. 양기성은 영조시대 때의 화원(畫員)으로 어진 제작에 참여할 정도로 인물화에 뛰어난 작가였다. ‘이윤경신’은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이라는 화첩에 들어 있다. 원형이정(元亨利貞) 4권으로 된 ‘만고기관첩’은 현재 3권만이 현존하는데 오른쪽에는 그림을, 왼쪽에는 제시를 넣는 ‘우도좌문(右圖左文)’의 형식을 취했다. 그림은 양기성이 그렸고 제시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의 대가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썼다. 제시의 내용은 ‘맹자’의 ‘만장’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윤은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신념이 확고하여 닭벼슬 같은 부귀공명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탕임금은 그런 이윤을 재상으로 기용해 선정을 베풀었다. 탕임금은 이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탕임금이 죽은 뒤에 태자인 태정(太丁)은 즉위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왕들도 단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정의 아우 외병(外丙)은 즉위한 지 2년, 중임(仲壬)은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정의 아들인 태갑(太甲)이 즉위하였다. 태갑은 탕임금의 손자다. 이윤은 태갑을 상대로 탕임금을 보필하던 때의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갑은 늙은 신하의 훈계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재화에 여색에 빠지지 말라’ ‘나이 많고 덕 있는 사람을 멀리하지 말라’ ‘진실하고 정직한 자를 거스르지 말라’ 등등 들리느니 잔소리요 훈계였다. 훌륭한 왕이 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태갑은 이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뿐만 아니라 포악한 행동을 하며 탕임금이 제정한 법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태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단을 내렸다.

“이처럼 의롭지 못한 것은 습관이 본성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로다. 나는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와는 친할 수 없다.”

그러면서 태갑을 탕임금의 무덤 근처에 있는 곳으로 추방시켜 3년 동안 유폐시켰다. 세상과 떨어져 살면서 탕임금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칠 기회를 주고자 함이었다. 결국 태갑은 이윤의 예상대로 3년 동안 근신한 끝에 개과천선하여 진정한 제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사람이 바뀐 것을 안 이윤은 다시 면복(冕服)을 갖추고 태갑을 모셔와 천자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이윤은 태갑에 대한 못 미더운 감정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윤이 벼슬을 그만두고 떠날 때였다. 아무래도 태갑이 덕이 없어 잘못된 사람을 등용할까 걱정이 되었다. 과거의 전적이 있는 만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윤은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함유일덕(咸有一德)’을 지어서 태갑에게 올렸다. 그 내용이 ‘서경(書經)’의 ‘상서(商書)’에 나온다. ‘함유일덕’은 임금과 신하가 모두 순일한 덕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상당히 파격적이다. 이윤은 시작부터 이렇게 곧바로 돌직구를 던진다.

“하늘을 믿기 어려운 까닭은 천명(天命)이 일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덕을 일정하게 가지면 그 자리를 보존할 수 있지만, 그 덕을 일정하게 가지지 못하면 여러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상나라의 태조이신 탕임금이 하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천명, 하늘의 명이었다. 하나라가 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이 상나라 편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하늘은 누구 편도 아니다. 천명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상나라가 덕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내침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하늘이 상나라 편이라 믿고 까불지 말고 오직 덕을 실천하라. 이윤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조국과 안희정과 윤미향과 박원순 사태가 불거졌을 때 이윤이 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어디 그뿐인가. 문재인 정권 들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기는커녕 그 화살을 투기꾼들 탓이라고 변명하고 국민을 힘들게 한 김현미 장관을 볼 때도 역시 이윤의 말이 맴돌았다. 그들은 지금 하늘이 그들 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믿기 어려운 것이 하늘이다. 하늘은 누구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양기성. ‘이윤경신(伊尹耕莘)’. 1720~1730년경. 종이에 색. 37.9×29.4㎝. 일본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
양기성. ‘이윤경신(伊尹耕莘)’. 1720~1730년경. 종이에 색. 37.9×29.4㎝. 일본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

화와 복은 모두 자신에게서 생겨난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무엇일까.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수많은 과거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좋은 것은 본받고 잘못된 것은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이다. 중국과 조선의 역대 왕들이 ‘제감도설’이나 ‘역대군감’ 등 옛 군주의 본받을 만한 사적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해 경계로 삼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런 책에는 훌륭한 정치를 한 명군(明君)과 포악한 정치를 한 암군(暗君)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훌륭했으나 나중에는 폭군으로 변한 ‘선명후암군(先明後暗君)’의 사례도 많이 등장한다. 조국과 안희정과 윤미향과 박원순도 시작은 훌륭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권력에 취하면서부터 초심을 잃어버렸다. 역사의 교훈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만약 박원순 전 시장이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나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성추행 사건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았더라면 그의 말로는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 상(上)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화(禍)와 복(福)은 결국 모두 자기로 인해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다. ‘시경’에 ‘천명에 부합하길 언제나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불러들이셨네’라고 하였고, ‘서경’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앙에는 살길이 없다’고 하였다.” 새겨들으면 두고두고 복을 가져다 줄 만한 귀한 가르침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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