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는 휴가도 분주하게 보내고 녹초가 되어 돌아와야 직성이 풀렸다. 다행히 최근에는 조용하고 느긋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제법 생겼다. 그런 휴가에 소설만 한 동반자도 드물다. 호젓한 곳에서 소설이 이끄는 몽상에 빠져 보는 것만큼 멋진 일도 드물다.

이런 용도에 아주 제격인 소설이 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1980)이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자 역사소설이자 종교소설이다. 작가는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이자 소설가다. 소설도 작가도 팔색조(八色鳥)다. 심지어 ‘장미’의 뜻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는 “소설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한다”며 논란에 되레 기름을 붓는다. 이래저래 이 소설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1327년 11월 말 어느 월요일 아침,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인 윌리엄은 이탈리아 북부의 유명한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찾는다. 그동안 청빈론으로 인해 교황과 프란체스코회는 날카롭게 대치 중이었다. 청빈론이란 예수나 사도들이 개인적으로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교황이나 교회도 재물을 소유하지 말고 속권(俗權)에서 손을 떼야 한다.

하지만 세속적 탐욕에 빠진 교황과 주류 교회가 이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이를 둘러싸고 갖가지 이단논쟁이 벌어지고 끔찍한 살육이 자행된다. 프란체스코회는 이단재판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으나, 여전히 건재하다. 교황은 프란체스코회의 수장을 교황청으로 부른다. 프란체스코회가 무조건 그 소환에 응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그래서 교황 측과 프란체스코회는 중립지대 격인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만나, 그간의 갈등을 사전에 조율하기로 한다. 윌리엄은 이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수도원을 찾은 것이다. 특히 거기에는 프란체스코회 출신의 유명한 노수도사가 은신해 있다. 소설은 윌리엄이 수도원을 방문한 월요일부터 7일간 수도원에서 벌어진 엽기적 사건들을 다룬다.

수도원 원장은 고명한 학승(學僧)인 윌리엄을 만나자, 우선 그에게 어떤 변사 사건의 규명을 부탁한다. 얼마 전에 장서관 소속의 채식장(彩飾匠) 수도사인 아델모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원장은 교황 측 대표단이 도착하기 전에 사건을 마무리짓고 싶었다. 원장은 윌리엄에게 어디든 조사할 수 있지만, “본관 맨 위층의 장서관은 안 된다”고 단서를 단다.

이 수도원은 유서 깊은 장서관으로 유명하다. 사서 수도사가 장차 원장이 되는 자리일 정도로 장서관은 수도원의 핵(核)이다. 원장은 장서관이 ‘거짓을 기록한 서책까지 고루 실은 방주’라고 자랑한다. 따라서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고 오로지 사서계(司書係) 수도사만 출입할 수 있다. 학승들이 서책을 신청하면, 열람의 가부는 사서가 결정한다.

윌리엄은 죽은 아델모가 일했던 사자실(寫字室)을 찾는다. 거기서 학승들은 연구도 하고 필사본도 만든다. 그곳은 장서관 바로 아래층에 위치해 있다. 사서 수도사 말라키아는 윌리엄에게 학승들을 소개한다. 그중에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번역하는 베난티오도 있었다. 그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신봉자다. 하지만 그 역시 마음대로 고전을 열람할 수 없다.

어떤 화제로 좌중에 웃음이 일자, 갑자기 맹인인 노수도사가 나타나 호통을 친다. 호르헤다.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마라!” 그는 웃음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신앙을 훼손한다고 강변한다. 사서였던 호르헤는 젊어서 시력을 잃었다. 이로 인해 원장은 되지 못했으나, 장서관의 막후 인물로 여전히 수도원 전체에 커다란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베난티오가 시체로 발견된다. 그는 평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후속편, 즉 제2권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현존하는 ‘시학’이 비극을 다뤘으니, 어딘가에 존재할 제2권은 희극과 웃음을 다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윌리엄은 잇단 죽음들이 장서관과 관계가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장서관에 잠입해 단서를 찾아본다.

그러는 사이에 보조사서 베링가리오, 약초 담당 세베리노, 사서 말라키아가 연달아 의문사한다. 타살당한 세베리노 이외의 망자들은 모두 혀와 손가락이 까맣게 변색된 채 죽었다. 이 와중에 교황 측과 프란체스코회 대표단이 도착하여 어수선한 교리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교황 측은 어떤 단순 사건을 이단으로 몰아, 당사자들을 끌고 떠남으로써 회담은 결렬된다.

윌리엄의 끈질긴 추적으로 연쇄사건의 전모는 드러난다. 아델모는 베링가리오와 남색을 벌이다가 죄책감으로 자결했다. 그리고 나머지 죽음들은 모두 ‘시학’ 제2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 책이 실제로 장서관 밀실에 감춰져 있었는데, 호르헤가 거기에 독극물을 발라놓았던 것이다. 그것을 몰래 훔쳐서 읽던 베난티오가 중독사한다.

베링가리오도 그 책을 한적한 약초 공방으로 가지고 가서 읽다가 죽는다. 호르헤는 말라키아에게 그것을 ‘읽지는 말고’ 회수해 오라고 지시한다. 말라키아는 약초 공방에서 ‘십자가가 달린 천구의’로 세베리노를 타살하고 책을 회수하지만, 그 역시 혀와 손끝이 까맣게 변색된 채 죽는다. 아델모와 베링가리오의 남색에도 서책열람 편의가 개재되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결국 모든 죽음은 진리에 대한 억압과 갈망이 부딪쳐 빚어낸 참극인 셈이다.

윌리엄은 천신만고 끝에 장서관 밀실 잠입에 성공한다. 호르헤는 ‘시학’ 제2권을 놓고 윌리엄을 기다린다. 그는 윌리엄에게 그 책을 내민다. 이미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윌리엄은 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긴다. 자신의 계획이 무산된 것을 안 호르헤는 갑자기 책을 빼앗아 책장을 뜯어 입에 우겨넣는다. 그는 죽음으로써 진실을 어둠 속에 묻고자 했다. 이를 말리려다 호롱불이 넘어져 불이 난다. 불은 순식간에 대화재가 되어 수도원을 폐허로 만든다.

호르헤에게 지식이란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보존’의 대상이다. 그는 모든 진리를 봉인한 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권력의 원천이었다. 윌리엄은 적(敵)그리스도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탄식한다. 호르헤처럼 과도하게 신실한 자, 즉 광신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장미’라는 말은 900쪽 내내 언급조차 없다가,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뜬금없는(?) 독백에 슬쩍 등장한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는 어떤 특정 대상을 가리키기보다 무엇을 대입해도 무방한 보편적 상징이라고 보여진다. 실제로 소설 속의 모든 것들도 형애만 남긴 채 모조리 불길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나.

이 소설은 스릴 넘치는 추리소설이다. 동시에 시대상을 묘사한 역사소설이자, 종교의 속살을 헤집은 종교소설이다. 재밌고 지적이고 교훈적이다. 이런 다채로움으로 인해 일단 손에 들면 쉽사리 내려놓지를 못한다. 호젓한 휴가지에서 사나흘은 후딱 지난다.

과거는 미래를 위해 과감하게 불살라야 할 땔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과거를 절대화하고 독점하려고 한다. 이런 악습은 사라져야 하는데, 요즘 되레 극성을 부린다. 우리는 스스로는 신실하다고 믿지만 ‘눈먼’ 호르헤가 적(敵)그리스도인 이유를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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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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