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남양주시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영지(靈地)란 어떤 곳인가. 근심과 분노 그리고 허무감을 달래주고 치유해 주는 특별한 땅이다. 근심, 분노, 허무감을 달래주기가 그리 쉽던가. 쉽지 않다. 이런 감정은 말처럼 쉽게 해결되는 감정이 아니다. 상당한 노력을 해야만 하고 어떤 때는 죽기 살기로 노력을 해야 한다.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고 일상에서 평화로운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가능하다. 영지에서는 강력한 땅의 기운이 올라온다. 이 땅의 에너지로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는 수가 있다. 지모신(地母神)의 은총을 입는 경우이다. 아니면 그 터에 보이지 않게 잠재하고 있는 신령계(神靈界)의 도움을 받아 터널을 빠져나오는 수가 있다. 사업이 부도나서 죽으려고 하다가 ‘죽기 전에 며칠이라도 신령한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나 하고 나서 죽자’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러 들어갔다가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는 사례를 여럿 보았다. 신령계의 도움은 그 사람의 꿈에 반드시 나타난다. 이런 신령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하다. 땅의 기운도 아니고 신령계의 도움에도 해당이 안 되는 상황도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풍광의 도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지는 훌륭한 풍광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해 주는 효과가 있다. 인법지(人法地), 즉 사람은 땅에서 배우고, 지법천(地法天), 즉 땅은 하늘로부터 배우고, 천법도(天法道), 즉 하늘은 도에서 배운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도는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도법자연이 핵심이다. 자연은 그만큼 위대한 존재이다. 말 없는 가르침을 항상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치유해주는 장엄한 자연 광경은 어떤 것이 있는가. 강물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수를 보는 것과도 다르다. 바다를 보는 것과도 다르다. 강물은 흘러간다. 물이 흘러가는 장면을 보는 것은 깊은 종교적 성찰을 제공한다. 시간이 이처럼 흘러가고, 근심 걱정도 이처럼 흘러가고, 모든 부귀영화도 이처럼 흘러가고, 피눈물 나는 고통도 이처럼 흘러가고, 우리 인생도 이처럼 흘러가고야 만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야 만다’는 철리(哲理)를 강물은 눈앞에서 풍경으로 실감 나게 보여준다. 흘러간다는 이치 앞에서 누가 감히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 철리 앞에서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 감히 여기다 대고 맞짱 뜨려고 덤비는 자에게는 처절한 보복과 고통이 있으리라. 그 만고의 진리 앞에서 겸허하게 엎드리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대자연 앞에 겸허하게 엎드린다는 것은 그 얼마나 지혜로운 태도란 말인가.

죽기 전에 꼭 다시 보고 싶은 풍광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점인 두물머리. 그야말로 두 줄기의 강물이 합쳐지는 장관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지점이니까 ‘머리’라고 해야 맞는다. 두 줄기의 강물이 각기 수많은 산모퉁이를 돌고, 바위 암벽을 지나서 수백 리를 흘러오다가 마침내 이 두물머리에서 조우한다. 그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수종사(水鐘寺)이다.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두 개의 강물이 이처럼 서로 만나서 섞이는 풍광을 보여주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 수종사가 자리 잡은 운길산은 610m. 절은 해발 450m쯤에 자리 잡고 있다. 전망이 나오려면 어느 정도 높이가 있어야 한다. 이 정도 높이에서 보는 게 두 강물의 해후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전체를 볼 수 있을 때 풍광이 주는 감동이 더해진다. 부분만 보는 것하고 전체를 다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흘러와서 합쳐지는 전체 모습을 볼 때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더 느끼게 되어 있다. 수종사 절 마당에서 두 강물을 보면 왠지 마음이 씻기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세상사에 얽매여 있었구나. 그리 중하지도 않은 것에 너무 집착하고 있으니까 이런 근심이 오는구나. 내가 근심 걱정으로 가슴에 돌덩어리를 얹어 놓은 것 같아도 천지자연은 이처럼 아무 일 없이 돌아가고 있구나. 내가 비록 한 달 살다가 죽을지라도 오늘 이 절 앞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광만큼은 즐기다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수종사 주지스님은 차실 보시를 하였다. 도시에서 먹고산다고 머리 빠개지는 삶을 살고 있는 도시 중생들이 이 절에 와서 한가하게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차실을 만들어놓았다. 두 강물이 잘 보이는 위치에 차실이 있다. 한쪽 벽면이 온전히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바깥 풍광이 그대로 보인다. 차는 공짜이다. 절에서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보시하는 것이다. 물론 공짜로 먹기가 미안하면 약간의 기부를 하면 된다. 마음 내키는 사람은 이 차실에 들어가면 이 절의 신도인 50대 초반의 여자 팽주가 녹차를 한 잔 내준다. 차실 한쪽 벽면에는 ‘自然放下(자연방하)’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구절이 절묘하다. 남한강과 북한강 강물을 바라다보노라면 저절로 걱정거리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연이 방하를 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방하(放下)는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주지스님 이야기로는 방하를 억지로 시킬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한다는 뜻으로 썼다고 한다. ‘자연(自然)’의 본래 의미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스스로 그렇다’ 또는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대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수종사의 ‘자연방하’ 다실은 우리나라 차계(茶界)의 성지이기도 하다. ‘남일지(南一枝) 북수종(北水鐘)’이다. 남쪽에는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一枝庵)이 차의 성지이다. 북쪽에는 수종사가 있다. 한국 차의 양대 성지 중 하나가 바로 수종사이다. 성지가 된 이유는 초의선사 때문이다. 초의선사는 조선 차계의 장문인(掌門人·문파의 우두머리)이다. 초의선사가 이곳 수종사에 머무르면서 다선시(茶禪詩) 10여수를 남긴 바 있다. 해남 대흥사에서 산길을 올라가면 일지암이 있다. 이 일지암에서 초의선사는 40년을 지냈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에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다. 조선조가 불교를 탄압하던 시대라서 승려의 신분이 낮았지만 다산과 추사와 같은 당대의 양반이자 일급 지성들과 속을 터놓고 인간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그러한 신분을 초월한 사귐의 매개체가 된 것이 바로 차였다.

수종사의 ‘자연방하’ 차실. ⓒphoto 조용헌
수종사의 ‘자연방하’ 차실. ⓒphoto 조용헌

초의선사가 머문 차의 성지

차는 조선시대의 귀물로 취급받았다. 아무나 마실 수 없는 비싼 식품이었다. 한반도에서 대전 이북에서는 차가 생산되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당연히 차가 자라지 못한다. 남쪽 지방에서만 나온다. 그러나 전남 대흥사 일대에서는 이 차밭이 살아 있어서 여기에서 나오는 차가 다산과 추사의 입맛을 끌어당겼다. 차는 탈속의 맛이 있다. 이 탈속적 식품인 차가 주는 매력은 먹물들에게 특히 어필한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를 느끼는 인간들이 그 맛의 깊이를 이해했던 것이다. 아무튼 일지암에서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이 인연을 맺었고, 이 인연은 다산이 강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인 두물머리로 귀향했을 때에도 계속 이어진다. 다산은 초의선사의 스승이기도 했다. 스승이 두물머리로 돌아가니 초의도 스승을 따라 이곳 남양주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깎은 승려가 속가 마을에 머물 수는 없었고, 이곳 수종사에서 머물렀다. 수종사에서 다산이 살던 집까지는 20리(약 8㎞) 거리나 될까.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면 다산이 살았던 동네인 두물머리가 바라다보인다. 20리 정도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스승인 다산이 보고 싶으면 바로 가서 만날 수 있는 거리다. 아니면 다산도 가끔 제자인 초의선사가 달여주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 이 수종사에 올라왔을 터이다. 다산의 생몰연대가 1762~1836년이다. 유배가 풀려 두물머리에 돌아온 시기는 그의 인생 후반부이다. 74세에 죽었으니 다산은 50대 후반인 1818~1819년쯤 고향에 돌아왔다. 초의선사의 생몰연대는 1786~1866년이니 다산을 뒤쫓아왔던 초의선사의 수종사 시절 나이는 아마도 32~33세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승의 문자향 서권기가 그리웠던 것이다. 수종사 시절에 썼던 초의선사의 시가 있다.

‘한잠 자고 일어났는데 차 한잔 줄 사람 없을까, 게을리 경서 쥐고 눈곱 씻었네, 그대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이곳 수종사까지 오지 않았나. 내가 항상 외로운 사람, 문 걸어 닫고 낙엽 소리에 묻혀 사네. 작은 골짜기 원통암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라. 소나무 위에서 우는 까마귀 소리 들리는구나. 절 아래 맑은 강에는 안개 자욱하고 그림 같은 산봉우리는 하늘 높이 솟았네.’

수종사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초의선사가 너무 수종사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다산을 따라가서 환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 초의선사의 은사 스님이 이곳 수종사에 와서 초의를 해남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곳 수종사의 또 하나 명물이 바로 절 마당에서 나오는 약수이다. 이 약수가 차를 끓이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전해진다. 찻물은 자기 성질이 강하면 안 맞는다. 물이 밋밋해야 찻물로 좋다. 자기 성질이 없어야만 차의 맛과 향 그리고 기운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자기주장이 강하면 피곤하다. 수종사 물은 자기주장이 없는 물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차인들 사이에서 수종사 물은 특급수로 평가받는다. 지금은 약수가 나오는 입구를 불상을 조각한 화강암 석재로 잘 덮어 놓았다. 수종사는 조선 차계의 중흥조인 초의선사가 머무른 역사적인 터인 데다가 절에서 나오는 석간수가 찻물로는 일급이요, 자연방하 차실에서 바라보는 두물머리의 풍광은 조선 제일이다. 차와 풍광. 이만하면 차의 성지라고 꼽을 만하다.

남한강 물과 북한강 물은 합류하여서 팔당으로 흘러간다. 원래 팔당(八堂)은 8개의 당이 있었다는 뜻이다. 당이 무엇인가. 굿을 하는 당집을 가리킨다. 이 당집이 한두 개도 아니고 자그마치 8개나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강물이 영험하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강물은 그냥 강물이 아니다. 강물이 지닌 종교적 의미를 알고 강물을 대하면 여기에서 마음의 번뇌를 씻고 자기를 정화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수종사에 올라가서 두물머리 풍광을 보는 것도 공부요, 수행이요, 자기 치유이니 영지임이 틀림없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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