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키아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바크라스(Bakras) 성. 알렉산더 대왕도 거쳐간 곳으로, 십자군전쟁 당시 안타키아 함락에 대비한 제2의 십자군 요충지였다.
안타키아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바크라스(Bakras) 성. 알렉산더 대왕도 거쳐간 곳으로, 십자군전쟁 당시 안타키아 함락에 대비한 제2의 십자군 요충지였다.

“나의 대제국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내가 가진 파워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72명의 왕을 거느린 왕 중의 왕으로, 세상의 모든 부(富)를 보유한 천국 아래 최고의 지도자다. 나는 견실한 기독교도다. 세상의 모든 기독교도들을 보호하자는 제국의 법에 따라 고통 속에 빠진 기독교도들을 무력으로 지켜나갈 것이다.”

12세기 중엽 비잔틴 대제국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Manuel Comnenus)를 수신인으로 한 편지다. 발신인은 ‘인도에서부터 태양이 뜨는 수평선 끝까지를 영토’로 다스리는 황제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다. 위의 글은 프레스터 존 황제 명의로 된, A4 용지 6장에 달하는 긴 편지의 내용 중 일부다. 프레스터 존은 예수 탄생 당시 베들레헴에 들른 동방박사 3명 중 한 명이 자신의 선조라고 밝힌다. 프레스터는 고위 성직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프레스비터(Presbyter)에서 따온 말이다. 보통 존은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으로 터키 에페수스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진 세례 요한을 지칭해 왔다. 이슬람권을 뛰어넘어 동방 어딘가를 지배한다고 알려진 기독교 대제국 황제 프레스터 존이 마침내 유럽에 공식 데뷔한 것이 마누엘 콤네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였다.

중세유럽을 발칵 뒤집은 편지 한 장

십자군전쟁 당시인 1260년대 지도. 화살표는 몽골군의 침략 루트, 붉은 별표는 이슬람군 주둔지, 초록색은 십자군 주둔지다.
십자군전쟁 당시인 1260년대 지도. 화살표는 몽골군의 침략 루트, 붉은 별표는 이슬람군 주둔지, 초록색은 십자군 주둔지다.

편지가 도착하는 순간 비잔틴은 물론 유럽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편지 덕분에 이후 거의 500여년간 프레스터 존 신화가 지속된다. 프레스터 존 편지는 ‘신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공상과 더불어 디즈니랜드 스타일의 ‘판타지 이미지’로도 확산된다. 뿔이 7개나 달린 동물, 완전무장한 인간을 낚아챌 정도의 큰 새, 눈이 3개 달린 거인이 프레스터 존 대제국을 응원하는 호위무사들이다.

왜 기독교는 프레스터 존에 빠져들었을까? 한국으로 치자면 ‘정도령 신화’에 비견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구세주를 기다리는 심정이다. 정도령이 정(正)에서 온 것인지, 정(鄭)씨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상관없다. 눈앞의 모순과 비극을 해결해줄 만병통치약이 정도령의 의미다. 프레스터 존의 위력은 13세기 초 십자군전쟁이 절정기에 달했을 때 발휘된다. 유럽 대부분이 군대를 파견했던 시기지만, 연전연패로 점철된 ‘어둡고 비참한’ 절정기에 불과했다.

십자군전쟁은 교황 우르반 2세의 주창하에 1096년부터 시작됐다. 이후 전부 8차에 걸쳐 1271년까지 무려 175년간이나 지속된 전쟁이다. ‘문명의 충돌’이라고 에둘러 표현하지만, 피와 살이 튀는 대살육전이 800여년 전 역사의 현실이다. 십자군의 위력은 이슬람이 대응에 나서지 않았던 초기에 국한된다. 승전보를 전한 1차 십자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부분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스정교와 가톨릭 사이의 힘겨루기, 유럽 각 나라 지도자들의 세력확장에 이르기까지 참전 목적이 제각각이었다. 예루살렘 탈환은 명분일 뿐 실제 목적은 ‘권력·돈·명예’로 압축할 수 있다.

‘금속 피로’ 현상이라고나 할까. 연전연패 소식과 더불어 유럽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왜 신의 군대가 이교도에게 당해야만 하는가. 더불어 이슬람군이 십자군만이 아니라 아예 유럽 전체를 이교도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해올 것이란 소문이 돈다. 중세는 단순한 사회다. 21세기 사람들이 본다면 1차원적 세계관으로 느껴지겠지만, 기독교 외에는 전부 악(惡)으로 인식됐다. 악이 선(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신앙이자 상식이었다. 그러나 반대 상황이 십자군전쟁을 통해 나타난다. 프레스터 존 편지는 그 같은 모순된 현실을 바로잡아 줄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아무리 강한 악이라도 신이 프레스터 존을 파견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기독교도도 구원할 것으로 해석된다.

프레스터 존 편지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인물은 로마 교황 알렉산더 3세다. 1177년 대규모 사절단을 구성해 이슬람을 넘어선 ‘동쪽의 어딘가에 있을’ 기독교 황제에게 파견한다. 유럽의 기독교도가 프레스터 존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는 편지도 동반한다.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프레스터 존의 대답은 물론 아예 사절단으로부터의 소식도 끊어진다. 십자군전쟁이 계속되는 13세기 전체를 통틀어 프레스터 존에 관한 희망은 극에 달했다. 알렉산더 3세 이후 교황들도 프레스터 존에 대한 기대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슬람을 적으로 대할 기독교 형제 프레스터 존은 과연 실존인물이었을까. 실제 어디에 존재하는 기독교 나라였을까. 흥미롭게도 로마 가톨릭이 내린 결론은 몽골이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몽골 대제국이야말로 로마 교황이 목이 타게 기다린 신의 군대로 귀결된다. 이유는 몽골의 이슬람 정복에 있다.

십자군전쟁의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교도 이슬람 척결과 예루살렘 반환이란 종교적 명분이 앞서겠지만, 이슬람권에 불어닥친 아시아 유목민족의 팽창도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11세기 초, 동쪽 아시아 유목민들이 서쪽으로 밀려들면서 이슬람의 서진이 시작된다. 최강의 아시아 유목민족 몽골은 12세기 초 이슬람권의 서진을 촉진시킨 가장 큰 원인이다. 수많은 아시아 유목민족 가운데, 가장 늦게 서쪽으로 몰려온 정복자가 몽골이었다. 결국 비잔틴 대제국의 영역인 아나톨리아 지방에도 터키인(Turk)이 밀려들어온다. 불안하게 유지되던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세력균형이 한순간 무너진다. 몽골은 이교도로 넘치던 역내 불안요소를 한순간 없애준 해결사다.

이슬람을 공격하는 몽골이 프레스터 존?

1219년 몽골은 셀주크 대제국의 맏형 격인 페르시아를 공격한다. 3년 전쟁 끝에 1221년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곧바로 아나톨리아 지역 정복에 나선다. 1243년 그 유명한 ‘고세 다그 전투(Battle of Köse Dağ)’에서 터키 연합군(Sultanate of Rum)을 섬멸한 뒤 현재의 중동 지역을 석권한다. 12세기 중반 중동은 십자군과 몽골, 이슬람군이 뒤엉킨 ‘삼국지의 격전 무대’였다. 그러나 동쪽의 몽골이 이슬람을 초토화할 당시, 서쪽의 십자군은 사분오열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제5차 십자군전쟁에 돌입했지만 곳곳에서 패한다. 그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는 몽골이란 존재를 알게 된다. 프레스터 존 편지는 이미 몽골의 이슬람 공격 70여년 전에 등장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프레스터 존 신화가 몽골이라는 존재와 함께 한순간 확산된 것이다.

이슬람군은 십자군을 연전연패로 몰아세운 백전백승 전사들이었다. 몽골군은 그 같은 백전백승 전사를 누른 초강력 정복자다. 고통에 빠진 기독교도를 돕기 위한, 신의 명령을 따르는 ‘신의 전사’가 몽골이라는 것이 당시 유럽인들의 신앙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다. 당시만 해도 ‘전쟁 승리=자신이 믿는 신의 승리’로 해석했다. 전쟁에 이길 경우 돈·영토·노예의 획득만이 아니라 승자의 신을 정복지에 확산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했다. 몽골은 다르다. 세금만 내면 어떤 신을 믿든지 상관치 않았다. 기독교에 관대한 몽골 통치방식을 확대해석하는 과정에서 ‘몽골=기독교 국가’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7월 중순 이후 터키 아나톨리아 안타키아(Antakya)에 머물고 있다. 시리아 국경 지역으로, 한국 기독교들인에게는 ‘안디옥’으로 통하는 유서 깊은 도시다. 원래 지명은 안티옥(Antioch)으로, 이스라엘 밖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곳이다. 예수 한번 만난 적 없는 바울이 만든 교회가 이곳에 세워졌다. 고대 로마 당시 안티옥은 21세기 뉴욕에 필적할 만한 국제도시였다. 기독교 역사만이 아니라 로마의 흔적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필수 방문지이다.

안타키아에 들르자마자 찾아간 곳은 안타키아 성(城)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다. 20㎞ 떨어진 바다라고 하지만 계곡에서 불어오는 해풍으로 인해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다. 1년 내내 강풍이 불어온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까 소나무들이 강풍에 쓰러져 70도 정도 굽은 상태에서 자라고 있다. 강풍에 따른 신비한 소리도 성 주변에 울려퍼진다. 성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처럼 느껴진다.

안타키아 성은 로마 이전 시대 때부터 등장한 오래된 유적지다. 성의 흔적은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 남인수의 노래 ‘황성옛터’가 저절로 읊어질 만한 곳이다. 그러나 수천 년간 전해진 역사의 관록은 곳곳에 표류한다. 무수한 나라·민족·군대가 지나쳤던 곳이지만, 필자의 가슴속에 와닿는 가장 큰 이정표는 십자군이다. 안타키아, 즉 안티옥은 십자군 당시의 핵심적 군사도시다. 십자군은 일단 안티옥에 도착한 뒤 이스라엘 공격에 나섰다. 철옹성, 난공불락이 십자군 당시 안티옥의 이미지다.

01 중세시대 신화 속 프레스터 존을 묘사한 그림.<br/></div>02 이슬람군과 싸우는 몽골군.<br/>03 십자군기를 들고 있는 중세 기사를 묘사한 그림.
01 중세시대 신화 속 프레스터 존을 묘사한 그림.
02 이슬람군과 싸우는 몽골군.
03 십자군기를 들고 있는 중세 기사를 묘사한 그림.

몽골과 십자군의 연합

성 주변을 오가며 필자가 상상한 인물은 13세기 안티옥 지배자 보헤몬드 6세(Bohemond VI)다. 십자군전쟁 도중 38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출신 귀족이다. 프레스터 존 신화와 관련해 보헤몬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몽골과의 연합을 주장하면서, 몽골군과 함께 이슬람권의 다마스커스를 정복한 십자군 수장이기 때문이다. 몽골이야말로 이슬람 이교도를 없앨 동지라 역설하면서 함께 피를 흘린 인물이다. 보헤몬드의 몽골 연합론은 ‘몽골=프레스터 존’이란 생각과 무관한, 전략전술적 차원의 발상에 따른 것이었다.

1260년 보헤몬드는 몽골연합에 따른 구체적인 성과도 내놓는다. 몽골과 함께 싸운 뒤 다마스커스를 비롯한 북부 시리아 대부분을 십자군 점령지로 장악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보헤몬드를 통해 정복 지역에서 세금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프레스터 존 신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뜻밖에도 로마 가톨릭의 반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몽골은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그리스정교의 비잔틴 대제국을 우선시했다. 13세기 당시 로마에 비해 비잔틴의 국력이 한층 더 높았다. 보헤몬드도 몽골의 생각을 따르는 과정에서 비잔틴을 우선시한다. 비잔틴을 적대시하기 시작한 로마 가톨릭은 보헤몬드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이후 13세기 말 몽골도 약해지면서 시리아 북부 전체가 또다시 이슬람 지배하에 들어간다.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안티옥도 1268년 이슬람에 무너진다. 곧이어 8차에 이어진 십자군전쟁도 막을 내린다.

고대도시 안티옥을 내려다보는 안타키아 성은 십자군전쟁의 중심에 서 있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정작 십자군 최후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은 조용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뒤엉킨 역사의 현장이지만, 몽골도 빼놓을 수 없는 주역 중 하나다. 프레스터 존으로 떠받들어졌다가 나중에 ‘야만 이교도’로 비난당한 몽골도 안티옥 역사의 한 장으로 남아 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안타키아 도시 전체를 뒤집으며 몽골의 흔적 찾기에 나섰다. 유물·유적만이 아니라 음식·의상·무기·도자기 등의 유적을 꼼꼼히 살폈지만 몽골의 흔적은 단 하나도 없다. 루브르박물관에 가도 전무한 것이 대제국 몽골의 유물·유적이다. 프레스터 존 신화가 그러하듯, 몽골 대제국도 인류 역사의 신기루로 남아 있을 듯하다. 프레스터 존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집념은 십자군전쟁 이후에도 계속된다. 최종적으로 프레스터 존이 누구인지 찾아낸 나라는 포르투갈이다. 17세기 아프리카 식민지 정복에 나섰다가 ‘뜻밖에’ 에티오피아가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라고 결론짓는다. 물론 이러한 발견 역시 당시 사람들끼리 공유한 믿음이었지 프레스터 존은 아직도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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