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도해역대군감(圖解歷代君鑑)’ 중 ‘택급고골(澤及枯骨)’. 19세기. 목판 채색. 32.6×35.6㎝.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자미상. ‘도해역대군감(圖解歷代君鑑)’ 중 ‘택급고골(澤及枯骨)’. 19세기. 목판 채색. 32.6×35.6㎝.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생을 되돌아보면 삶의 분기점이 되는 때가 있다. 그 분기점을 ‘터닝포인트’라고 한다. 터닝포인트를 계기로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연한 기회에 귀인을 만나 꽉 막힌 인생길이 뻥 뚫릴 수도 있고, 뜻하지 않게 큰돈이 들어와 옹색했던 살림살이가 확 펴질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한 불행도 터닝포인트에 해당한다. 암에 걸리거나 실직을 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보이스피싱에 걸려 큰돈을 날릴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 사건들은 인생의 흐름을 크게 바꿔놓는다. 터닝포인트는 대나무의 마디에 해당한다. 대나무는 완전하게 독립된 공간들이 마디를 경계로 층을 쌓아 올라간 식물이다. 마디와 마디는 그 사이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각각의 마디는 비록 한 몸체라고는 하나 서로 전혀 상관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아파트 1층 집과 2층 집이 전혀 다른 집인 것과 마찬가지다.

터닝포인트는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왕조가 끝나고 다른 왕조가 들어서는 지점이 바로 터닝포인트다. 왕권 교체, 이민족의 침입, 전염병의 창궐, 극심한 한파나 물난리 등이 대표적인 역사의 터닝포인트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이후의 삶을 전혀 다른 상태로 바꾸어놓는다. 마치 코로나19의 전후가 그러하듯.

중국에서는 주(周·기원전 1046~기원전 256년)나라의 등장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 주나라는 상(商)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웠다. 주나라는 790년 호경(鎬京)을 수도로 한 서주(西周·기원전 1046~기원전 771년)와 낙읍(洛邑)으로 천도한 동주(東周·기원전 770~기원전 256년)로 구분한다. 백가가 쟁명하고 수많은 나라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사라진 춘추전국시대도 동주에 포함된다. 주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왕조였고, 친척과 공신들을 제후로 책봉한 봉건제도를 확립한 시기였다. 난세에는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역사의 터닝포인트가 된 주나라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주공(周公)과 강태공(姜太公) 등의 영웅들로부터 시작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문왕이다.

서백의 은택이 해골에까지 미치니 사람에게 있어서랴

문왕이 서백(西伯)이 되어 있을 때였다. 서백이란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란 뜻이다. 서백이 하루는 교외에 행차하였는데 죽은 사람의 마른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서백은 관리에게 명하여 그 뼈를 묻어주도록 했다. 명을 받은 관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마른 뼈는 모두가 아주 오래전에 이미 죽어 후손도 끊어진 사람의 것입니다. 이미 주인도 없습니다.”

주인도 없는 뼈를 굳이 묻어줄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문왕이 대답했다.

“천자는 천하를 가지고 있으니 바로 천하의 주인이다. 제후는 하나의 나라를 가지고 있어 그 한 나라의 주인이다. 지금 이 마른 해골은 내가 곧 그의 주인이다. 어찌 저렇게 드러난 모습을 보고 차마 이를 덮어 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에 장례를 치러서 덮어 주었다. 당시 천하 사람들이 문왕의 이러한 음덕(陰德)을 듣고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서백의 은택은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마른 해골에게도 미치고 있는데 하물며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랴?”

무릇 문왕이 정치를 펴서 어짊을 베풂에는 단지 살아 있는 백성에게만 그 은택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마른 해골에까지 두루 미쳤다. 문왕의 어진 정치를 강조한 아름다운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고 그림의 주제로도 채택되었다. ‘택급고골(澤及枯骨)’이 바로 그 그림이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적힌 제목 ‘택급고골’은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친다’는 뜻이다. 그림은 가로로 휘장처럼 펼쳐진 구름과 꽃을 경계로 상하로 구분된다. 상단에는 문왕이 행차한 마을이 보이고 하단에는 택급고골의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는 황금색 복장을 한 인물이 공수자세를 취하고 서 있는데 그의 머리 뒤에는 ‘주문왕(周文王)’이라고 적혀 있다. 문왕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그가 타고 온 마차가 배치되어 있고, 왼쪽에는 마른 뼈를 담는 사람들이 보인다. 문왕은 지금 그의 앞에 꿇어앉은 관리를 향해 “지금 이 마른 해골은 내가 곧 그의 주인이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연설을 하는 중이다.

‘택급고골’은 적색과 청색, 황색과 녹색 등 강한 채색을 써서 눈에 들어온다. 이 작품은 중국 역대 황제들의 일화를 그린 ‘도해역대군감(圖解歷代君鑑)’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도해역대군감’은 명(明)나라 때 장거정(張居正·1525~1582)이 열 살이던 황태자 신종을 위해 만든 교재 ‘제감도설(帝鑑圖說)’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엮은 책이다. ‘택급고골’의 구성은 오른쪽에는 그림, 왼쪽에는 ‘제감도설’의 내용이 적혀 있다. 특이한 것은 ‘도해역대군감’과 거의 동일한 형식의 그림이 ‘군왕좌우명(君王左右銘)’이란 제목으로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지영의 석사학위 논문 ‘동아시아 삼국의 ‘제감도설’ 판본과 회화 연구’에 따르면 이 두 작품은 현재 소장처는 다르지만 그림의 크기나 양식을 고려해볼 때 본래 하나였던 것이 분철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도해역대군감’과 ‘군왕좌우명’은 제감도설에 수록된 이야기의 일부만 추려 화려한 채색으로 개장한 그림책이다. ‘제감도설’은 제왕을 위한 교재였던 만큼 왕실에서 수용되었고 그 수도 한정적이었다. 즉 왕이 될 사람은 이 책을 보면서 사치와 방종에 빠지지 말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작자미상. ‘고신도(高臣圖)’ 2책 1권 중 ‘문왕(文王)’. 26×20㎝. 국립중앙도서관
작자미상. ‘고신도(高臣圖)’ 2책 1권 중 ‘문왕(文王)’. 26×20㎝. 국립중앙도서관

고난 속에서도 잃지 않은 문왕의 측은지심

‘고신도(高臣圖)’는 중국 고대의 본받을 만한 왕과 신하의 모습을 그리고 한글로 제목을 적은 책이다. 그중에는 문왕(文王)의 초상화도 들어 있다. 그의 얼굴에는 그가 겪었을 고난의 시간이 제거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즐겁게 살았을까? 사람들은 성품이 너그럽고 여유로운 사람을 보면 그가 아무런 고생도 하지 않고 살았을 것으로 착각한다. “먹고살기 힘들어봐라. 어디 다른 사람 챙길 여유가 있는가.” 그런 말과 함께 큰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남을 돌볼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는 논리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사소한 상처에도 죽는 소리를 한다. 이를테면 암에 걸려 큰 수술을 앞둔 사람 앞에 가서 반창고 붙인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며 아파 죽겠다고 하는 식이다. 물론 그 사람을 비난할 일도 아니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의 암보다 더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큰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작은 일도 큰일처럼 힘들기 마련이다.

문왕 서백의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서백이야말로 갖은 핍박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서백은 상나라 끝물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상나라의 마지막 황제 주제(紂帝)의 신하였다. 주제는 서백이 세운 주(周)나라와 이름은 같으나 내용이 다르다. 주제는 사람이고 주나라는 나라 이름이다. 한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항상 그러하듯 주제의 폭정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주제는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오만함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인물묘사는 ‘사기’의 ‘은본기’에 자세히 나온다. 주제는 타고날 때부터 영리하고 민첩하며 변별력이 뛰어났다. 힘도 장사여서 맨손으로도 맹수와 싸울 정도였다. 그의 지혜는 간언이 필요하지 않았고, 말재주는 허물을 교묘히 감추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뽐내며 천하에 그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다. 그 오만함이 결국 상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그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황실을 돈으로 채웠고, 개나 말과 기이한 물건들을 거둬들여 궁실을 가득 채웠다. 폭군은 폭군의 전철을 밟기 마련이다. 그는 하(夏)나라를 망하게 한 걸왕(桀王)처럼 주지육림을 만들어 술로 만든 연못과 고기의 숲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게 했다.

폭군은 폭군의 전철을 밟으며 더 발전된 행태로 타락하기 마련이다. 주제는 그를 원망하는 백성들이 많아지고 배반하는 제후들이 많아지자 포격(炮格)이라는 형벌을 발명했다. 포격은 기름칠한 구리 기둥 아래 불을 지피고 죄인에게 기둥 위를 걸어가게 하는 형벌이다. 뜨거운 기둥 위를 걸어가야 하니 뛸 수밖에 없고, 뛰자니 기름을 칠해놔서 미끄러져 불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결국 몸부림을 치다 죽는 모습을 구경하자는 형벌이다. 주제는 그 모습을 보고 서커스를 보듯 즐거워했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황후나 삼공이라도 포를 떠서 죽였다.

어느 시대나 폭군 밑에는 아첨하고 고자질하는 간신이 있다. 주제의 폭정에 서백이 저절로 탄식을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간신이 주제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했다. 서백은 당장에 유리(羑里)의 옥에 갇혔다. 서백은 이 감옥에 7년 동안 유폐되어 있으면서 복희씨의 팔괘를 인간에게 접목한 역(易)을 만들었다. 그것이 ‘주역(周易)’이다. 주역은 ‘주나라의 문왕이 만든 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복희씨의 팔괘가 선천팔괘라면, 문왕팔괘는 후천팔괘라고 부른다. 서백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이다 보니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을 것이고 그 범위를 확장시켜 우주와 인간과의 관계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감옥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장소가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철학을 완성할 수 있는 사색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서백의 경우는 후자였다.

서백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감옥 밖에서는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백의 신하 중 굉요(閎夭)가 대표적이었다. 굉요는 당대 최고 가는 미녀와 기이하고 진귀한 보물과 서른여섯 필의 준마(駿馬)를 구해 주제에게 바쳤다. 준마는 지금으로 치면 ‘고급 세단’이니 엄청난 뇌물을 바쳤다고 보면 된다. 주제는 뇌물을 받자마자 이렇게 소리치며 즉시 서백을 풀어주었다.

“이 중에서 한 가지만으로도 서백을 풀어주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이렇게 많이 바치다니!”

서백은 나오자마자 낙수 서쪽에 있는 알토란 같은 땅을 주제에게 바쳤다. 그가 바친 땅은 주나라의 요지 중의 요지였으니 서울 강남 한복판의 땅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 뜻밖에 부동산을 취득하게 된 주제는 서백이 인사성이 밝다고 생각했다. 그를 풀어준 대가로 뇌물을 바쳤다고 확신했다. 주제는 서백이 은혜를 잊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사람이라고 여겨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고 했다. 그 당시는 부동산을 매개로 한 관직매매의 커넥션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다. 주제는 서백이 더 큰 이익을 위해 알토란 같은 땅을 리베이트 자금으로 바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백의 입에서 나온 청이 의외였다. 포격형을 없애 달라는 요청이었다. 조금 모자라는 사람 아닐까?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주제마저 놀랄 정도였다. 부동산이라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직을 버리고 집을 택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다. 그런데 서백은 엄청난 돈을 포기한 대가로 자신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포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동안 제정신이 돌아온 주제는 즉시 포격형을 없애라고 명을 내렸다. 동시에 서백을 서방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서백은 봉국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덕을 쌓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교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주나라 곁에 있던 우(虞)와 예(芮)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송이 발생했다. 그들은 법적인 다툼에서 결론을 낼 수 없자 주나라로 서백을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은 주나라 국경 내에 들어서자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밭을 가는 사람들이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했다. 자기 밭의 경계를 서로 침범했다고 다투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그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심하게 부끄러웠다. 그들은 미처 서백을 만나지도 않고 돌아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싸운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가겠는가? 단지 치욕만 얻을 뿐이네.”

그리고는 각자의 나라로 되돌아가서 그들도 주나라 사람들처럼 밭의 경계를 양보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서백을 “천명을 받은 문왕”이라고 일컬었다. 문왕은 그의 아들 무왕이 주나라를 세운 후 추존한 서백의 명호다. 택급고골의 에피소드도 ‘천명을 받은 문왕’이 펼친 선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반면 주제는 변하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다. 주제의 배다른 형인 미자(微子)와 친척인 기자(箕子)는 주제에게 여러 차례 간언해도 듣지 않자 상나라를 떠났다. 주제의 친척인 비간(比干)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하 된 자는 목숨을 바쳐 간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물러서지 않고 간언했다. 비간의 모습을 보고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한 주제는 열이 뻗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다. 어디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겠다.”

그러면서 비간의 배를 갈라 그 심장을 꺼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제후들이 주제를 배반하고 서백에게 몰려갔다. 그중에는 태공망으로 알려진 여상(呂尙)도 있었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의인들도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결국 노선이 달라 서백의 아들 무왕 때 갈라서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또한 문왕이 꿈으로 현몽을 받아 80세의 노인 여상을 발탁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역시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문왕이 천명을 받게 된 비결

문왕 서백이 주나라의 시조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에게 측은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공손추’에는 측은지심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에게는 모두 남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仁心)이 있다. 옛날 선왕(先王)들은 남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어 남에게 차마 못하는 정사(仁政)를 행하셨다. 남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차마 못하는 정사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천명을 받은 왕조의 특징을 보면 위정자의 정책 바탕에 측은지심이 깔려 있다. 반면 몰락하는 왕조의 특징을 봐도 일정한 공식이 있다. 그것은 오만함과 편가르기를 통해 제 무덤을 제가 판다는 것이다. 대나무는 각각의 마디가 독립된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디와 마디는 그 사이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 서로 전혀 상관없는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마디와 마디는 결국 대나무라는 한 몸의 일부분일 뿐이다. 백성이라는 마디가 고달픈데 왕이라는 마디가 괜찮을 수 없고, 왕이라는 마디가 행복한데 백성이라는 마디가 불행할 수 없다. 그 논리를 잘 깨우친 왕은 백 세 천 세 칭송을 받았고 반대의 경우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가?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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