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식으로든 2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될 전망이다. 나아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야가 아예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격돌할 가능성이 높다.(본지 제2609호 본란 참조) 실제로 야당은 얼마 전에 기본소득을 정강정책의 첫머리에 올리겠다고 공표했다. 여당도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런 중대사를 제대로 알고나 추진하는 것일까.

마침 이런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줄 만한 기본 안내서가 있다. 바로 필리프 판 파레이스와 야니크 판데르보흐트의 ‘기본소득’(Basic Income·2017)이다. 우리말 제목은 ‘21세기 기본소득’(2018)이다. 부제는 ‘자유로운 사회와 건전한 경제를 위한 근본적 제안’이다. 저자들은 이 책이 기본소득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모아놓은 ‘기록보관소’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저자들은 다양한 논거를 두루 제시해 가며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차분하게 설파한다.

이미 취약층을 상대로 사회적 복지 및 부조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선별 과정에서 낙인이 생기며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더구나 소득발생 등으로 기준이나 조건을 벗어나면 지원이 철회되는 탓에,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원에만 의존하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본질적으로 복지나 부조는 빈곤을 모면하게 해주는 소극적 대처일 뿐이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그런 소극적 대응을 뛰어넘는 대담한 조치다. 그것은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그들이 다른 소득 원천이 있든 없든 아무 조건도 내걸지 않고 국가가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현금이다. 이를 통해 구성원들은 낙인이나 모멸감 없이도 빈곤을 모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이처럼 평생 동안 정기적으로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는 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사회’의 바탕인 것이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추가로 소득을 더 올릴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근로소득을 다소 희생시키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심지어 근로소득이 없는 자신만의 일에 열중할 수도 있다. 설사 실업상태가 되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구직을 모색할 수 있다. 약자에게도 협상력이 생기기 때문에 열악한 일자리를 조급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로 인해 열악한 일자리의 근로조건이 개선되는 효과도 기대된다.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소득도 다소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는 부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기본소득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다. 이제는 더 이상 무작정 성장과 무한정 소비만 추구하기 어렵다. 경제도 효율성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건전한 경제’의 바탕이기도 하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전일제 완전고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근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일찍이 ‘땅은 인류 전체의 공동재산’이라는 관념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18세기 말에 지대를 사용해서 50세 이상의 모든 사람에게 일정 금액을 주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나중에는 토지·천연자원·대기 등 자연뿐만 아니라 기술·제도·사회적 자본 등도 ‘공동의 재산’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개념은 오늘날 기본소득을 논할 때 중요한 관점이 되고 있다.

20세기에는 유럽보다 미국에서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이 더 활발하게 벌어졌다. 심지어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도 마이너스 소득세(minus income tax)를 제안했다. 이것은 수입이 일정 수준 이하가 되면 부족분에 대해 국가가 보조하자는 아이디어다. 이어서 다양한 기본소득론이 제기되었고, 일부 정치인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미국에서 이런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것은 아이러니이며,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의 거부감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이며, 다른 하나는 ‘재정적으로 지속가능한가’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노동윤리를 절대시했다. 이때 노동은 대부분 수입이 생기는 노동, 특히 임금노동을 가리킨다. 가사노동 등은 무시되었다. 따라서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지원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노동 윤리는 부는 오로지 노동으로 창출된다는 관념에 뿌리박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숙고해 보면, 우리는 공동의 유산 또는 재산을 향유하는 가운데 노동을 통해 부를 만들고 있다. 그 부를 몽땅 노동의 공로로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즉 자연, 기술진보, 사회조직, 시민의식 등은 우리에게 아무 대가 없이 많은 혜택을 나눠 주고 있지만, 그 혜택의 배분은 지극히 불공정하다. 그것을 공정하게 시정하자는 것이 기본소득의 출발점이다.

달리 말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만드는 조세는 생산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無)에서 창조한 것들에 대한 과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집단적으로 물려받았거나 가꾸고 있는 ‘공동의 재산’을 생산자들이 자기들의 개인적 혜택을 위해 사용한 특권의 대가로서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fee)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재분배가 아니라 분배 그 자체인 것이다. 물론 수수료 이외의 추가적인 부분은 노동한 사람들의 정당한 몫이다.

다음으로 ‘재정적으로 지속가능한가’라는 의구심이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은 ‘필수적인 욕구를 충분히 채우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액수를 처음부터 특정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저자들은 적은 액수로 시작하여 차츰 늘려나갈 것을 제안한다. 또한 아동, 노인, 청년 등에 대해 먼저 시작하고 차츰 전 연령으로 확대하는 방법도 있다. 지금도 이미 그런 집단들에는 다양한 보조가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낮은 수준의 사회적 수당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수당의 아랫부분도 대체하게 된다. 실제로 이런저런 명목으로 이미 상당한 재정이 지출되고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을 전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래도 증세는 필요하다. 저자들은 근로소득에 대한 과도한 증세보다는 자본에 대한 과세, 토지 및 자연 이용에 대한 과세, 부가가치세 등 적절한 세원을 발굴, 또는 강화할 것을 제안한다.

최근에 기본소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고 국민투표까지 실시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커다란 영감을 주는 인물은 비스마르크다. 그는 사회보험을 도입하면서 실험 따위를 하지 않았다. 다만 작게 시작하여, 신뢰와 자신감을 쌓으며 점점 확대해 나갔다. 그것이 20세기 복지국가의 틀이 되었다. 지금 그 틀이 수명을 다해가는 마당에 우리 앞에 기본소득이 등장한 것이다.

기본소득은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사회의 틀 자체를 개조하는 대변혁이다. 이런 거대 기획은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성패를 속단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나라를 통째로 불확실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무책임한 노릇이다. 그래서 아직은 어느 나라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정당들은 앞다퉈 나서고 있다. 이제 2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되고, 머지않아 기본소득 논쟁이 봇물을 이룰 것이다. 제발 제대로 알고나 추진하기 바란다.

키워드

#지금 이 책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