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칼레 성 앞 유프라테스강이 만들어낸 호수는 깊고도 넓다. 룸칼레는 ‘로마성’이란 의미지만 4500년 전 히타이트 시대 때부터 이미 활용되어온 성이다.
룸칼레 성 앞 유프라테스강이 만들어낸 호수는 깊고도 넓다. 룸칼레는 ‘로마성’이란 의미지만 4500년 전 히타이트 시대 때부터 이미 활용되어온 성이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철학가에다 행동하는 평화운동가, 나아가 행복론의 대명사로 20세기 서방의 지성을 대표하는 영국 신사다. 러셀이 쓴 에세이는 어디선가 한 번쯤 읽었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러셀이란 이름을 처음 안 것은 국민학교라 불리던 반세기 전 초등학교 시절이다. 5학년 때쯤, 막 부임한 20대 신임 여선생님이 들려준 얘기를 통해서다. 철학·평화·행복에 관한 어려운 얘기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선명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러셀=강 탐험’이다. 여러 얘기를 들려줬겠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러셀의 취미는 강 탐험이었다’로 모아진다.

취미는 러셀 행복론의 기본요소에 속한다. 취미를 통해 세계관을 넓히고,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사소한 취미라도 올곧게 파들어가면, 인생의 여유와 우주를 발견해낼 수 있다. 여선생님에 따르면, 98세 장수를 누린 러셀의 취미는 ‘강 탐험’이었다고 한다. 세계 곳곳의 강 탐험에 나선 인물이 러셀이었다는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60대 이후부터 평화운동에 직접 나선, 행동하는 철학가가 러셀이다. 강연을 위해 찾은 낯선 도시에서의 취미활동이 현지 강 탐험이었을 듯하다. 배를 타고 천천히 강을 오가며, 문명·문화적 차원에서 주변 역사를 훑었을 것이다. 그 같은 이유겠지만, 러셀의 글 속에는 강을 비유로 한 것이 많다.

왜 ‘러셀=강 탐험’이란 기억이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있을까? 자문자답의 결과지만, 필자의 어린 시절에 드리워진 ‘큰 바위 얼굴로서의 강’이란 추억에서 비롯된 것일 듯하다. 그냥 눈앞에 던져진 ‘아파트 베란다 앞의 한강’이 아니다. 매일매일 직접 활용하고 맛보는 ‘일상으로서의 강’이다. 필자는 강둑을 앞에 둔 학교에서 생활했다. 평소에는 폭 30m 정도의 얕은 강이지만, 여름철이면 한강보다 더 크고 넓고 깊게 변했다. 어릴 때 모든 야외활동이 강으로 연결돼 있었다. 매일 걸어서 1시간 거리의 강둑을 오가며 등교했다. 간디스토마 감염자가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지만, 강에서 물고기, 조개, 심지어 자라도 잡아먹었다. 겨울에는 천연 스케이트장, 여름에는 수영장으로 활용한 전용 놀이공간이 학교 옆 강이었다. “둑으로 가자”는 말은 동급생끼리 승부를 보자는 은어로 통했다. 여름철에 물이 불으면, 수영하다가 익사하는 사람도 한두 명씩 꼭 생겼다. 수영 감시당번은 여름방학 중 교사들의 고정임무였다. 러셀에 대한 선명한 기억은 당시 필자 스스로가 강 탐험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강을 매개로 한 영국 철학가와 12살 시골 어린이의 ‘동류의식’이 기억의 원천인 셈이다.

초라한 성에 이끌려 찾은 곳

2020년 8월 유프라테스강에 들렀다. 말로만 듣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반이 된 곳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유프라테스강을 살피기 위해 의도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다 우연히 접한 곳이 유프라테스강이다. 고대 유적지를 찾아 헤매던 중 큰 성(城)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윤곽만 남은 초라한 성이지만, 첫눈에 끌렸다. 비레직(Birecik)이란 이름을 가진, 멀리는 4500년 전 히타이트, 가까이는 고대 로마와 비잔틴 십자군전쟁 때까지 활용된 성이다. 성 탐방은 전염병으로 인한 해외 망명 중 얻은 새로운 관심영역이다. 수백 수천 년 전 사람들의 땀과 희망, 삶과 웃음이 표류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비레직은 인적이 드문 성들과 달리, 주택가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성의 뼈대만 남았지만, 높이 50m 암반 위에 세워진 견고한 조형물이다. 개인 집 마당이 깎아지른 성으로 올라가는 출입구다. 섭씨 40도 더위에 성 위로 올랐다. 암반 위 성 안은 ‘무(無)의 공간’이다. 부서진 대리석만 몇 개 뒹굴 뿐 아무것도 없다. 성의 돌들이 주변 집들의 건축자재로 재활용되는 과정에서 ‘무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성곽을 살피던 중 바로 밑에 흐르는 강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로 스쳐지나갈 때는 몰랐지만, 위에서 보니까 엄청난 강이다. 한강 정도 규모지만, 깊이와 수량, 유속은 훨씬 더하다. 강 옆을 지키며, 주변의 물자 운송을 호위했던 성이 비레직의 임무였을 듯하다. 유프라테스란 이름은 성에서 내려와 케밥집에 들러 식사를 하던 중 알게 됐다.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유명한 유프라테스강이 여기에?” 반갑기도 했지만, 유프라테스강이라는 존재도 알지 못한 채 성에 오른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역사와의 대화와 같은, 뭔가 낭만적이고도 목가적인 만남이 아닌 ‘성에 오르다 얼떨결에 만난 강’이 유프라테스강이다. 케밥집 주인으로부터 유프라테스강이라는 말을 듣고 난 뒤, 곧바로 다시 한번 더 성 위로 올랐다. 일몰 직전이었기에 다행히 기온이 내려갔다. 인류 4대 문명의 젖줄 중 하나로 통하는 유프라테스강이라는 관점에서 주변을 다시 한번 더 살펴봤다. 배운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다. 전혀 새로운 관점의 강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강뿐만 아니라 성 바로 아래 붙은 집들과 사람들의 모습도 유프라테스강이라는 돋보기를 통해 새롭게 변신했다. 표면적으로만 변했을 뿐,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인류의 역사가 그대로 새겨진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넓고 깊은 강 저 멀리 드리워진 일몰 풍경이 너무도 아름답다.

인간은 석양 앞에 서는 순간 선인으로 변할 수 있다. 반성의 시간을 부여하는, 인간의 품격을 드높이는 자연의 파워 중 하나가 일몰이다. 지중해 에게해 의 수평선 일몰을 ‘혼(魂)’이라고 한다면, 유프라테스강의 풍경은 땀 냄새로 범벅이 된 ‘육(肉)’이라 부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땅을 노동으로 지켜낸 사람과 동물의 소리가 강 주변에 울려퍼지기 때문이다. 어두워지면서 곧바로 성에서 내려와야 했다. 반세기 전 여선생님의 말씀 속에 드리워진, 러셀과 12살 소년의 강 탐험의 ‘부활’인 셈이라고나 할까? 다음 날 곧바로 본격적인 유프라테스강 탐험에 나섰다.

암반 위에 세워진 비레직 성곽. 성곽 주변에서 매주 두 번씩 야외시장이 열려, 메소포타미아 문명 당시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암반 위에 세워진 비레직 성곽. 성곽 주변에서 매주 두 번씩 야외시장이 열려, 메소포타미아 문명 당시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가는 시간여행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진 끝에 찾아간 곳은 룸칼레(Rumkale)다. 유라시아에서 룸(Rum)은 로마를 의미한다. 터키어로 칼레(Kale)는 성이다. 지명에서 보듯 로마성이 들어선 곳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모신 제자 요한(John)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룸칼레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위치한, 비레직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있다. 강 주변에 도로가 없기 때문에 산길을 타고 들어가야만 만날 수 있다. 룸칼레로 가는 길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을 더듬는 시간여행에 해당한다. 사람 하나 없는 바짝 마른 척박한 환경이 인상 깊다.

지중해 인근 지역은 겨울에 비가 오고 여름은 건조기다. 뜨겁고 메마른 땅이지만, 대략 12월부터 비와 눈이 내리면서 순식간에 물로 넘친다. 룸칼레로 가는 상류 유프라테스강 주변은 겨울 홍수지역이기도 하다. 흔적만 남은 작은 강이지만, 절벽을 보면 물이 스쳐 지나간 흔적이 5m 높이까지 올라가 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 전부가 물에 잠긴다는 얘기다. 노아의 홍수는 성경만이 아닌, 유프라테스강 주변 모두에게 알려진 전설이기도 하다.

아몬드밭은 유프라테스강 주변의 인상 깊은 풍경 중 하나다. 풀 하나 없는 평원 전체가 아몬드나무로 뒤덮여 있다. 가끔 올리브나무도 볼 수 있지만, 아몬드가 메소포타미아의 주된 풍경이다. 둘 다 기름을 짜낼 수 있고, 식용은 물론 비누와 방부제로도 사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 접하는 아몬드는 대부분 9월 이후 알이 단단해진 상태에서 판매된 것이다. 작지만 알이 연하고 풋풋한 7월에 수확한 아몬드도 맛이 좋다.

룸칼레는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듯 눈앞에 나타났다. 큰 계곡을 하나 돌자마자 바로 앞에 울트라블루(Ultra Blue) 빛깔의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물속 깊이는 전혀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이 표류한다. 관광객용 식당 몇개만 들어서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인적이 끊긴 상태다. 물 위에 떠 있는 듯, 높이 60m 암반 위에 흔적만 남은 성이 눈에 들어왔다. 100m 정도 거리의 유프라테스강이 룸칼레 앞에 드리워져 있다.

룸칼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바위를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성인지 알기 어렵다. 바깥쪽 방어벽만 남아 있을 뿐, 현재 전면 복구 중이라고 한다. 로마 이전인 기원전 2500년 히타이트 시대 때부터 14세기 이슬람 정복까지, 무려 4000년간 활용된 천연요새가 룸칼레다. 주변이 호수로 느껴지는 이유는 계곡을 막은 댐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많은 댐이 들어서 있다. 에너지 확보와 홍수조절용 댐이다. 유프라테스강은 전장 3000km에 달하는 긴 강이다. 터키·시리아·이라크·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가 유프라테스강 영역권이다. 발원지 터키가 전체 강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 룸칼레는 상류 유프라테스강에 남은 몇 안 되는 고대의 흔적 중 하나다.

유프라테스강은 수많은 지류로 구성돼 있다. 여름철 유프라테스강에서의 수영은 터키인들이 거의 매일 즐기는 일상이다.
유프라테스강은 수많은 지류로 구성돼 있다. 여름철 유프라테스강에서의 수영은 터키인들이 거의 매일 즐기는 일상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 룸칼레

룸칼레 아래 유프라테스강에 다가가면서 12세 소년의 추억에 어울릴 만한 ‘유치한 충동’ 하나가 생겼다. 수영이다. 메아리조차 삼킬 만한 침묵 속 강이기에, 뭔가 활기를 불어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심정과도 같았다. 룸칼레까지 100m 거리의 수영에 도전했다. 만약에 대비해 바로 옆에 따라 붙을 작은 배도 하나 빌렸다. 수영 중이던 현지 사람도 함께 따라나섰다. 항상 지참하는 수영안경, 귀마개, 모자로 무장하고 물속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표면은 따뜻하지만 안쪽은 차갑게 느껴졌다. 물고기들은 아주 가늘었다. 평소 수영으로 몸을 단련하지만, 뭔가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100m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작은 배의 보호를 받으며 자유형과 배영을 번갈아 해가면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룸칼레 바로 밑 암반에 도착했다.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룸칼레가 눈앞에 펼쳐졌다. 60m 암반을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깊은 계곡으로 드리워진 오지의 산속에 왜 저토록 큰 성이 들어섰는지 궁금했다. 청동이 이유 중 하나일 듯하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최초의 문자를 창조한 수메르(Sumer) 문명의 발상지다. 수메르는 청동기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대문명이다. 청동의 재료인 광석을 운반하는 것이 유프라테스강 주변을 오가는 배들의 주된 임무 중 하나다. 식량·목재·가축 운반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다이아몬드 가격에 준하는 청동자원과 제품을 운송하는 것이 룸칼레의 탄생의 주된 배경이었을지 모르겠다. 청동은 식량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뒤에 나타난 문명의 상징이다. 원시 공동사회에서 계층사회로 나아간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청동의 출현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칼, 그릇, 도구는 지배층의 상징이다. 룸칼레는 그 같은 인류의 변화를 지켜보고, 지켜준 역사의 비망록일 듯하다. 인적조차 끊어진 고대 역사의 뒤안길이지만, 인류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낸 메소포타미아의 전설과 신화를 보듬은 깊고도 깨끗한 성이다.

룸칼레를 뒤로하고 하루 전 들렀던 비레직 성으로 향했다. 케밥집에 다시 들르고 싶었다. 음식과 더불어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갖고 온 목재 숯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싶었다. 필자의 고집이지만, 케밥은 반드시 숯으로 요리해야만 한다. 가스나 전기열선이 아닌, 나무 숯으로 된 케밥 요리가 진짜다. 케밥집으로 향하는 도중 21세기에만 볼 수 있는 유프라테스강의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난민촌이다. 강 주변에 천막 하나로 지탱하는 난민촌이 즐비하다. 시리아 난민들이다. 비레직 성에서 시리아 국경선까지 거리는 불과 20km다. 유프라테스강으로 연결돼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넘나들 수 있다. 터키 정부는 같은 이슬람 국가인 시리아 난민들의 유입을 막지 않는다.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 비레직이지만, 구걸하는 시리아 어린이들이 도로 주변에 넘친다. 시리아는 멀리 아시리아 문명의 원조이자, 예수가 남긴 복음 언어의 나라다. 고대 시리아어가 2000여년 전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가 신호정지를 받는 순간 난민 어린이들이 몰려든다. 메소포타미아 주변에 갈 때는 동전을 잔뜩 준비하는 것이 좋다. 동전 몇 개를 나눠주는데 기뻐하는 기색보다 뭔가 궁금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동양인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구걸보다 호기심이 더 큰 듯, 난민 어린이 20여명이 필자에게 몰려든다.

확신컨대 2020년 메시아가 재림한다 해도 시리아 난민처럼 나타날지 모르겠다. 나사렛 예수가 그러했듯이, 길 잃은 양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이 신의 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대홍수로 인해 천벌을 받은 땅이 유프라테스강 주변이다. 노아의 대홍수를 잊고 다시 인류의 새 출발지로 변했던 인류 문명의 출발지도 메소포타미아다. 시리아 어린이들의 미소가 남아 있는 한, 유프라테스강 재생과 회복의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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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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