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작자미상. ‘백이숙제(伯夷叔齊)’. 19세기. 종이에 연한 색. 국립민속박물관. (우) 작자미상. ‘문자도 치(恥)’. 종이에 색. 가회민화박물관.
(좌) 작자미상. ‘백이숙제(伯夷叔齊)’. 19세기. 종이에 연한 색. 국립민속박물관. (우) 작자미상. ‘문자도 치(恥)’. 종이에 색. 가회민화박물관.

은·주(殷周)의 교체기는 기원전 1046년이다. 아득하게 먼 그 시절에도 보수와 진보는 있었다. 각 진영의 대표 선수들은 그들 나름의 정치철학과 사명의식으로 무장하고 당의 노선을 결정했다. 물론 서열에서 밀리거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그들은 이념 대신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했고 우왕좌왕하던 시류는 자연스럽게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다. 은나라를 지키자는 쪽이 온건파였다면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쪽이 급진파였다. 문왕과 강태공은 주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간 급진파였다. 반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그 대척점에 선 사람들로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무도한 일은 할 수 없다는 온건파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급진파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여차직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입산할 각오가 되어 있던 온건파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념과 가치관이 다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노선과 색깔이 다른 사람들이 한 치 양보도 없이 맞부딪쳤으니 불꽃 튀는 칼날의 부딪침은 어느 한쪽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끝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야기는 대립하는 세력의 충돌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읽는 맛이 나는 법이다. 과연 그 싸움의 끝은 어디였을까. 후세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으며 그들이 선택한 삶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강태공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백이숙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폭력을 폭력으로 바꿀 수 없어 수양산에 오르다

은자(隱者)들의 세계에 한 번이라도 출입해본 사람이라면 백이숙제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사마천은 ‘백이 열전’에서 백이숙제의 이야기를 공자(孔子)의 말로부터 시작한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스승에게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공자가 대답했다. “옛날 현자(賢者)들이시다.” 어떤 현자일까? 어떤 생애를 살았기에 현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자공은 우리 생각처럼 묻는 대신 대뜸 돌직구를 던진다. “원망했습니까(怨乎)?”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공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원망했느냐고 묻는 자공의 질문에는 그가 이미 백이숙제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으면서 스승의 생각이 어떠한지 듣고 싶었음이 담겨 있다. 공자가 대답했다. “인(仁)을 추구하다 인을 얻었는데, 다시 무엇을 후회했겠느냐.” 사마천이 인용한 공자의 이야기는 ‘논어’의 ‘술이’ 편에 나온다.

인은 공자가 강조한 최고의 도덕원리다. 공자는 인의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실천방법으로 효(孝), 제(悌), 충(忠), 서(恕), 예(禮), 악(樂) 등을 제시했다. 공자는 백이숙제가 그중 한 가지를 실천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했는데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백이숙제는 원망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후회하는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원망했습니까(怨乎)?”라고 물었을 때의 원(怨)에는 후회하다(悔)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논어’는 제자들이 공자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당시에는 글을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죽간이나 목간에 새겼기 때문에 문장이 지극히 간략하다. 그래서 자공이 공자에게 “원망했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에도 누구를 원망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생략되어 있다. 원망의 대상이 왕위를 버린 자신의 과거 행적인지 주나라 무왕인지 알 수 없다. 후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튼 그 사건이 무엇이고 그 대상이 누구였든지 간에 공자는 백이숙제가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백이의 심정이 슬펐을 거라고 추정하고 공자와는 다른 기록이 있어 그 이야기를 적는다면서 비로소 그들의 생애를 들려준다. 사마천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의 생애는 이렇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이었는데 왕위를 형제에게 양보했다. 그들은 서백창(西伯昌·문왕)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으나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대신 서백창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시호를 문왕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제를 치러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이렇게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 신분으로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백이숙제의 간언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온건파가 문왕과 무왕의 봉기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서 ‘음모수덕(陰謀修德)’을 지적했다. 강태공이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문왕이 도덕과 인의를 음모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문왕과 무왕을 추켜세웠지만 알고 보면 그들 또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인의를 빌려왔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백이와 숙제였다.

생각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백이숙제는 기어이 효와 인이라는 거북한 말까지 들먹이며 기세등등한 군사들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 모습을 본 무왕의 신하들이 백이숙제를 칼로 베려고 했다. 이때 강태공이 나서서 사태를 정리했다. 강태공은 낚싯대를 버리고 문왕 캠프에 합류해 은나라 타도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백이숙제를 일으켜 세워 가게 했다. 그 뒤 무왕은 은나라를 평정했고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의롭게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었다(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採薇而食之, 遂餓而死). 그들은 수양산에서 굶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런 노래를 불렀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캤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이때부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먹는 백이숙제의 모습은 절개를 지킨 인물의 상징으로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작자미상의 ‘백이숙제’는 민화 ‘고사인물도10폭병풍(故事人物圖十幅屛風)’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역시 수양산에 입산한 이후의 백이숙제 모습이다. 병풍에 들어 있는 작품이라 세로가 매우 길다. 세로가 긴 화면은 상단의 제시, 중단의 산과 솟아오른 언덕, 하단의 인물과 배경으로 구분되는데 하단으로 갈수록 복잡하다. 그 복잡한 하단 중앙에 오늘의 주인공인 백이숙제가 서 있다. 그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어깨에는 바구니를 걸쳤다. 이미 고사리 채취가 끝났는지 바구니가 나물로 수북하다. 고사리는 수양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발 앞에도 아직 미처 꺾지 못한 고사리가 고개를 쳐든다. 백이숙제 뒤로는 그들이 살았을 법한 소박한 초가삼간이 보인다. 초가삼간은 오른쪽의 소나무와 함께 이 그림이 조선 그림임을 증명한다. 그림의 상단 빈 공간에는 ‘주속의불식 채미수양산(周粟義不食 採薇首陽山)’이라는 제시가 적혀 있다. ‘주나라 곡식을 의롭게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었다’라는 의미다. ‘백이열전’의 ‘의불식주속(義不食周粟)’을 ‘주속의불식’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은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서 굶어 죽은 이야기로 그들의 전기를 끝낸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노자가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백이숙제는 착한 사람이 아닌가. 요즘 세상에는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폼나게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심하고 말도 가려 하면서 공평하고 바른 일만 하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것이 과연 하늘의 도라면 그 도는 옳은가, 그른가? 사마천의 심도 있는 한숨 소리는 요즘도 우리가 자주 집어삼키는 바로 그 내용이다.

청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은 백이숙제

중국 고전문학 전문가 이나미 리쓰코(井波律子) 여사는 ‘중국의 은자들’에서 중국 고대의 은자들은 양극단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쪽 극단에는 누구한테도 속박당하지 않는 생활을 즐기려는 자유지향형 은자가 있다. 주간조선 2603호에서 살펴본 허유와 소부가 대표적이다. 반대쪽 극단에는 긴급 피난하듯 은둔의 길을 택해 자신을 다스리려 하는 금욕형 은자가 있다. 백이숙제가 그런 경우다. 후대에 이름깨나 날린 은자들은 거의 다 자유지향형과 금욕형 중 한쪽을 선택했다. 거기에 자신만의 기이한 행각을 덧붙여 개성적인 은자 캐릭터를 만들었다. 문제는 그들 중에서 가난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 물질적 금욕주의자는 수두룩한 반면, 백이숙제처럼 정신까지 자유롭게 해방된 은둔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만큼 백이숙제의 신념은 무겁고 의지는 강했다.

백이숙제가 지키고자 했던 신념과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맹자(孟子)는 ‘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백이숙제에 대해 “섬길 만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부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으며,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러워지면 물러나 숨은 분”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성인 가운데 맑은 분(聖之淸者也)”이라고 칭송했다.

‘문자도 치(恥)’는 글씨 그림이다. 문자도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의 여덟 글자에 그 의미와 관련된 이야기나 대표적인 상징물을 그려 넣는다. 문자도는 18세기 이전부터 장식병풍으로 많이 제작되었고 19세기에는 민화로도 유행했다. 특히 민화로 제작된 문자도는 유교적 이념을 담은 여덟 글자 외에도 ‘수복강녕’ 등의 길상적이고 기복적인 의미의 글자가 인기를 얻었다.

‘치(恥)’의 글자를 파자해 보면 耳+心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의 耳가 큰 변형 없이 원형을 유지했다면 오른쪽의 心에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추정할 만한 단서들을 직접적으로 그려 넣었다. 心의 중앙에는 비석 같은 충절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백세청풍 이제지비(百歳淸風 夷齊之碑)’라는 글자가 칼로 새긴 듯 또박또박 적혀 있다. 비석 위의 공간에는 ‘천추청절 수양매월(千秋淸節 首陽梅月)’이라는 글씨를 흘려 쓰듯 자유롭게 적었다. 왼쪽 상단에는 매화꽃과 달이 장식되어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글자와 매와 달 등의 소품들은 전부 백이숙제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백세청풍’은 ‘일백 세대의 맑은 기풍’, 즉 영원히 맑은 기상을 뜻한다. 송(宋)의 주희(朱熹)는 백이숙제를 사모하여 수양산의 백이숙제 묘에 ‘백세청풍’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이제지비’는 ‘백이와 숙제의 비’를 줄인 말이다. ‘천추청절 수양매월’은 ‘천추에 빛날 청절은 수양산의 매화와 달’이라는 뜻이다. 매화와 달은 청절의 상징이다. 두 사람의 맑고 깨끗한 절개가 매화와 달처럼 환하게 비춘다는 의미다. 청풍, 청절은 맹자가 말한 ‘성인 가운데 맑은 분(聖之淸者也)’과 상통한다. 결국 문자도 ‘치’는 백이숙제의 고귀한 삶을 글씨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문자도에 나온 치(恥)는 흔히 염치(廉恥)와 함께 쓴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염치 좀 알아라” “염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염치다. 그렇다면 염치는 무엇일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우리는 흔히 낯가죽이 두꺼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무치’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맹자’ 의 ‘진심상(盡心上)’에는 ‘무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대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은 왜 중요한가? 맹자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네 가지 기본 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사단(四端)이다. 사단은 네 개의 큰 방향의 발단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 부끄러워하고 염치를 아는 수오지심, 이익과 도움을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 시비를 명확히 가릴 수 있는 시비지심이 사단이다. 이 사단이 있어야 사람이다. 반대로 이 사단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맹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이야말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이라 할 수 있다.

문왕이 옳은가 백이숙제가 옳은가

백이숙제는 불의에 항거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청절(淸節)로 후세에 절의의 상징이 되었다. 직접적으로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수양산이나 고사리만 언급해도 백이숙제의 이야기임을 알아먹었다.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사회 프레임을 구축한 나라였다. 유교의 핵심적인 가치가 효와 충이었으니 백이숙제만큼 그 가치를 정확하게 실천한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백이숙제는 군주에게는 충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신하들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모델로 인기를 얻었다.

물론 조선시대 내내 백이숙제가 추앙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김민호의 ‘충절의 아이콘, 백이와 숙제’에 따르면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 초기에 고려에 충성하려던 정몽주를 백이숙제처럼 여겨 결국 그를 제거했다.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 운운하는 것도 일절 금지되었다. 그런 이방원도 나라의 기틀이 잡히자 백이숙제를 높이 평가하고 두둔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왕조에 백이숙제 같은 충성스러운 신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미묘한 상황은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백이숙제를 그린 그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도 이 고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입장이 바뀌면 평가도 바뀐다. 야당이 여당이 되면 자신들이 야당 시절에 극구 반대했던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야당이 야당 시절의 생각이 옳은가 아니면 야당이 여당이 된 후의 생각이 옳은가. 누가 옳고 그른가의 잣대로 평가하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 법안이 국민의 백년대계를 위해 마땅한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후대의 역사가들 또한 무왕과 백이숙제를 두고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무왕과 백이숙제 중 누가 옳은가. 만약 무왕이 옳다면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내려왔어야 마땅하고, 백이숙제가 옳다면 그는 폭군을 옹호한 기득권자에 불과하다. 결국 사마천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강태공과 무왕도 높이고 백이숙제도 높이는 식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3000년 전에 있었던 시비가 전혀 다른 시공간인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서 재현되는 것은 그만큼 명분과 실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결론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는 시대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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