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가을에 이어 곧 겨울이 닥친다. 코로나19 감염자 수도 늘어날 것이다. 마스크 미착용이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무감각, 무신경이 확산의 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도 자신만은 예외라 믿는 동물이 인간이다.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설마’가 대세로 등장한다. 곧 나온다던 백신도 소문만 요란할 뿐 감감무소식이다. ‘될 대로 돼라’는 심리도 곳곳에서 일고 있다. 유럽의 ‘역병화(疫病畫·Plague Paintings)’는 그 같은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최적의 반면교사다. 14세기부터 등장했던 그림으로, 보통 해골과 함께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시련이 담겨 있다. 죽은 사람의 경우, 얼굴이 검고 몸에는 반점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유럽의 역병화에 담긴 생사관
역병화는 주기적으로 들이닥치던 유럽 전염병의 부산물이다. 1346년부터 10여년간 계속된 흑사병(Black Death Disease)은 최악의 전염병 역사로 남아 있다. 당시 유럽·아프리카 인구의 3분의 1 정도인 최대 2억명이 희생됐다. 기독교 국가인 유럽은 전염병을 천벌로 해석했다. 성경에도 나오지만,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 56절)는 말이 있다. ‘전염병=신의 천벌=죽음’이다. 지옥은 천벌을 받고 죽은 사람들이 모이는 최종 정류장이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천벌을 면하기 위한, 지옥에 안 가기 위한 회개의 목소리가 유럽 구석구석에 울려퍼진다. 20세기를 무대로 한 카뮈의 소설 ‘페스트(La Peste)’에도 등장하지만, 전염병에 쓰러진 인간들의 아비규환이 교회 안을 가득 메운다. 인간의 한계이자 무지의 결과지만, 역병화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해 전염병은 한층 더 확산된다.
전염병은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도 창궐했다. 문명·문화국가로서의 아테네는 대표적인 본보기다. 공교롭게도 아테네 최고 절정기(The Golden Age of Athens)는 전염병 창궐 직전에 펼쳐진다.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을 세운 페리클레스(Pericles) 통치하의 기원전 457년부터 20여년간의 시기다. 페르시아전쟁 대승리 후 국력이 상승하고 주변국 전체를 아래로 내려다보던 때다.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될 수는 없다. 에게해 패자로 군림하던 어제의 친구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들어간다. 바로 펠로폰네소스전쟁이다. 그러나 전쟁 즉시 곧바로 전염병이 창궐한다. 아테네 추락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페리클레스 자신도 기원전 429년 전염병으로 사라진다.
중세유럽과는 다른 그리스의 역병관
흥미로운 것은 전염병 이후 나타난 아테네, 나아가 그리스 문화권의 반응이다. 14세기 유럽 기독교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죄의 삯은 죽음’이란 식의 세계관이 전혀 없다.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전염병을 주관하는 신은 아폴로다. 아폴로의 뜻을 거슬렀기에 전염병에 걸려 죽기는 하지만 ‘죄인으로서 지옥에 간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럽의 경우 ‘전염병 사망=신에 대한 죄인=지옥행’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역병화=지옥화(地獄畫)’에 해당한다. 그리스의 경우 죄의식은 물론, 지옥이란 개념이 아예 없다.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예외 없이 어둡고 추운 지하세계(Underground)에 가서 플루토(Pluto)와 페르세포네(Persephone) 부부신의 지배하에 놓인다는 것이 전부다. 이승에서의 죄의 경중에 따라 화형 고문에 처해지는 식의 지옥관(觀)은 전무하다. 화형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은 전염병과 종교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부활은 기독교와 그리스 문화권 모두에서 볼 수 있는 사후(死後) 세계관 중 하나다. 기독교에 따르면 부활의 대상은 예수에 국한된다. 죽음을 이긴 신의 아들만이 부활의 주인공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허문 유일한 존재가 바로 예수다. 그리스 문화권은 어떨까? 예수처럼 죽음에서 깨어나 하늘로 비상하는 식의 부활은 없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를 넘어 이승에서 다시 생활하는 식의 부활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나타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오르페우스(Orpheus)다. 죽음을 불사한 채, 지하세계로 간 연인 에우리디케(Eurydice)를 찾아나선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오르페우스는 음악과 노래로 지하세계의 플루토와 페르세포네를 감동시킨 뒤 그 보상으로 에우리디케의 부활을 허락받는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붙는다. 지상으로 나아가는 도중 절대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 오르페우스는 플루토의 말을 잊고 에우리디케가 뒤에 있는지 뒤돌아본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지하세계로 영원히 사라진다.
언덕 위로 바위를 영원히 굴려야만 하는 형벌의 주인공 시시포스(Sisyphos)도 부활에 관한 좋은 예다. 제우스의 미움을 사고 지하세계로 내려가지만, 꾀를 써서 다시 지상세계로 부활한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미움으로 곧 죽음이 닥칠 것이라 예측했다. 자신의 부인에게 죽은 뒤라도 장례를 지내지 말라고 말해둔다. 장례를 치르지 않는 한, 지하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그리스의 관습이다. 시시포스는 플루토에게 자기의 장례를 치르지 않은 부인 때문에 지하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이승으로의 외출을 요청한다. 부인에게 장례를 치르라고 말한 뒤 다시 돌아오겠다고 플루토에게 약속한다. 플루토는 시시포스에게 지상세계로의 외출을 허락한다. 합법적으로 지상세계로 돌아온 시시포스는 플루토와 제우스를 바보라고 부르면서 삶을 만끽한다. 언덕 위의 바위 형벌은 플루토를 속이고 지상세계에 부활한 시시포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의 부활은 이승·저승을 넘나드는 육신으로서의 죽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승·저승의 경계선을 허무는 영(靈)과 혼(魂) 차원의 부활도 존재한다. 아네모네 꽃에 관한 신화는 영과 혼의 부활이란 관점에서 본 그리스인의 생사관의 증거다. 미의 여신 비너스는 ‘난생처음’ 진짜 사랑을 느끼게 된다. 비너스 사랑의 대부분은 가슴이 아니라 몸에서 시작된다.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질 듯한 순수한 사랑은 극히 드물다. 상대는 미소년 아도니스다. 어느날 사냥에 나서는 아도니스를 보면서 불길한 예감이 든다. 비너스가 집에 머물라고 부탁하지만, 아도니스는 괜한 걱정이라면서 활을 멘 채 사냥에 나선다. 비너스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도니스는 사냥 중 멧돼지에 받혀 세상을 뜬다. 비너스는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떠난 아도니스를 기린다. 대지를 적신 아도니스의 피와 비너스의 눈물이 합쳐져 붉은 꽃 하나가 피어난다. 바람과 함께 시작되고 사라지는, 봄을 알리는 꽃 아네모네의 탄생이다.
아네모네는 필자가 지중해에 빠진 출발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깊고도 뜨거운’ 붉은색의 꽃잎이 가슴속에 파고든다. 지중해의 아네모네를 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색에 대한 감각이 달라질 것이다. 하늘에 올라 모두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작은 꽃 한 송이를 통한 영과 혼의 부활이다.
아폴로(Apollo)와 다프네(Daphne)에 관한 얘기는 부활에 관한 그리스 신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그 유명한 월계수 탄생에 얽힌 얘기다. 먼먼 2500여년 전 신화에 무심한 사람이라도 올림픽 우승자에게 허락된 월계관 얘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월계관은 지중해 곳곳에 자라는 월계수로 만든 관이다. 사시사철 푸른 월계수(Laurel)는 ‘칭송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라우디스(Laudis)’를 어원으로 한 말이다. 가지와 잎으로만 엮은 월계관은 올림픽 승리자뿐만 아니라 전쟁 승리자나 황제, 나아가 영웅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수여되던 존경과 영광의 아이콘이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월계관은 영광을 넘어선 ‘인간의 품격’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당연하지만, 올림픽 우승자에게는 돈이나 상품이 따르지 않는다. 월계관 단 하나만이 우승자에게 주어진다. 월계관은 남이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 우승자 스스로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린다. 신화, 청빈, 자아를 기초로 한 품격의 그리스 문화가 올림픽 월계관에 함축돼 있다. 인류 전체의 품격을 높인 폴리스(Polis) 직접민주주주의가 그리스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