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십이성현화상첩’ 중 ‘주공’. 1706년. 비단에 연한 색. 43×31.2㎝. 국립중앙박물관
윤두서. ‘십이성현화상첩’ 중 ‘주공’. 1706년. 비단에 연한 색. 43×31.2㎝. 국립중앙박물관

주나라 건국의 주역은 문무와 강태공 그리고 주공(周公)이다. 그중 주공은 주나라를 얘기할 때 문무와 강태공보다 더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공자는 성인(聖人)의 계보를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으로 설정했는데 그중 주공을 가장 존경하여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공자는 평생 동안 주공처럼 되기를 갈망했고 주공과 같은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자 했다.

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흠모했던지 꿈속에서라도 뵙기를 고대할 정도였다. 공자는 주공이야말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왕권이 교체되면 새 왕조의 가치는 예악과 문물의 정비로 드러난다.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설령 새 왕조가 전 왕조를 폭정과 학정 때문에 무너뜨렸다 해도 피 묻은 칼날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문화적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곧 예악과 문물이다. 주공은 주나라의 문화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교육적·제도적 기반시설뿐만 아니라 인적·정신적 인프라까지 완벽하게 구축한 인물이었다. 그 덕분에 주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가 되었다. 그들이 판을 짜놓은 봉건제도는 후대 중국 제왕들의 전형적인 통치방식이 되었고, 그들이 제정한 주례(周禮)는 관직제도의 기준이 되었다. 그런 틀을 짠 중심에 주공이 있었다.

임금 노릇도 신하 노릇도 하기 쉽지 않다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그린 ‘주공’은 대단히 ‘심플’한 초상화다. 주공은 무늬가 없는 병풍을 배경 삼아 두 손을 맞잡고 탁상에 앉아 있다. 그의 앞 바닥에는 단정하게 다듬은 신발탁자가 보이고 그 위에는 주공이 벗어놓은 신발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주공의 오른쪽으로는 협탁이 비스듬하게 배치되었다. 협탁 위에는 칼과 천으로 싼 악기와, 기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물들이 올려져 있다. 그림 전체는 군더더기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한 절제가 느껴진다. 꼭 필요한 붓질이 아니면 단 한 번의 스침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엄정함이다. 이 엄정함은 주공을 향한 윤두서의 마음임과 동시에 주공의 삶에 대한 경외심일 것이다. 윤두서는 주공의 얼굴을 중국에서 편찬한 ‘삼재도회(三才圖會)’와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을 참고한 반면 기타 주변 소품들은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였다.

‘주공’은 윤두서의 벗인 이잠(李潛·1675~1706)이 국문을 받고 죽기 직전에 부탁한 작품으로 ‘십이성현화상첩(十二聖賢畵像帖)’에 들어 있다. 이잠의 동생인 성호 이익(李瀷)은 ‘십이성현화상첩’을 그리게 된 내력에 대해 4쪽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했다. 서문을 제외한 그림은 4폭으로 모두 유교의 성인 열두 명을 담았다. 그중 첫 번째 그림의 주인공이 ‘주공’이고 단독으로 그려졌다. 두 번째 그림은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인 안연, 자유, 증자가 등장한다. 세 번째 그림은 소강절(邵康節)과 정이천(程伊川) 형제 세 사람이 맹자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 네 번째 그림은 주자가 의자에 앉아 있고 황간(黃幹)과 채침(蔡沉)이 서 있다. ‘십이성현화상첩’의 인물들은 요순우탕문무주공까지 이어진 도통(道統)이 후대에 어떻게 전승되었는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주공은 공자와 함께 선성(先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식을 줄 모르는 추앙을 받는 것일까.

주공은 이름이 단(旦)이고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이다. 문왕은 상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둘째 아들 무왕이 즉위했다. 무왕은 주공과 태공망, 소공(召公)의 도움을 받아 상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아버지대부터 시작된 전쟁을 끝마쳤다. 정복이 끝나면 피정복민에 대한 처우가 가장 큰 문제다. 무왕은 새 왕조를 시작하면서 상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고 민심을 다독였다. 상나라 주제의 아들 무경(武庚)도 죽이지 않고 제후로 봉해 주제를 계승해 상나라 도성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대신 아우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곽숙(霍叔)을 무경이 통치하는 지역 옆에 있는 세 고장의 제후로 봉해 무경을 감시하게 했다. 무왕은 옛 성인들의 후손을 책봉함과 동시에 공신들에 대한 책봉도 계속했다. 강태공은 제(齊)를, 주공은 노(魯)를, 소공은 연(燕)을 받았다. 주나라 초기 조정은 무왕을 중심으로 주공, 태공망, 소공이라는 견고한 트로이카 체제의 협조에 힘입어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고 주변 제후국들도 주나라에 복속되었다.

그런데 상나라를 함락시킨 다음 해에 변고가 발생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탓인지 갑자기 무왕이 중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신하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태공망과 소공은 점을 치게 했다. 무왕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동생 주공을 불러 어린 태자 대신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주공은 대답 대신 조용히 물러나와 세 개의 제단을 설치했다. 주나라 개국 시조인 태왕(太王·고공단보)과 조부 왕계(王季), 아버지 문왕의 제단이었다. 주공은 제단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 후 그가 죽간에 미리 써놓은 책서(策書·기도문)를 사관에게 고하게 했다. 그 기도문에는 형님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는 간곡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주공은 자신이 ‘능력도 많고 재능도 많아’ 선조님과 천지신명을 잘 섬길 수 있으니, 하늘의 명을 받고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무왕은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기도였다. 기도문 낭독이 끝나자 큰 거북으로 점을 쳐서 선왕들의 명을 확인했다. 점괘는 ‘길(吉)하다’고 나왔다. 주공은 그 책서를 금으로 밀봉하여 금색실로 묶은 나무궤짝에 감추어 두고는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일렀다.

이튿날 무왕은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 그러나 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마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무왕이 승하할 때 태자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주공은 태공과 소공 등 다른 대신들과 함께 태자를 왕좌에 앉히니 그가 바로 성왕(成王)이다. 주공은 각 지역의 제후들이 모반할까 두려워 성왕을 대신해 섭정을 시작했다. 주공은 조카인 성왕을 보좌하기 위해 궁궐에 남고 봉지인 노나라에는 아들을 보냈다. 애초에 권력과 돈에 관심이 있어서 섭정을 한 주공이 아니었으니 왕좌를 차지할 마음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사람의 눈에는 주공의 행동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질투와 시기는 더 큰 법이다. 형제간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무왕의 동생 관숙이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상나라의 무경을 감시하는 대신 그와 손잡고 “주공이 왕위를 노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말을 들은 어린 성왕도 주공이 행여 왕위를 찬탈할까 의심스러웠다. 조선시대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좌를 가로챈 사건만 보더라도 성왕의 의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공은 성왕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시찰을 핑계로 남쪽에 있는 초나라로 떠났다.

주공에 대한 성왕의 오해는 의외의 사건으로 풀어졌다. 주공이 떠나고 난 가을에 천둥번개가 치고 물난리가 나서 주공의 집에 갔다가 금색실로 묶은 나무궤짝을 발견했다. 주공이 무왕을 대신해 죽을 테니 제발 무왕을 살려달라고 올렸던 기도문이 담긴 궤짝이었다. 성왕은 그때 처음으로 궤짝 안에 담긴 주공의 기도문을 읽게 되었다. 또한 주공이 그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관들의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성왕은 숙부가 절대로 찬탈할 마음이 없었음을 확실히 알고 숙부를 모셔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성왕은 주공을 시켜 반란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무리들을 처형시켰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주공이 섭정을 시작한 지 7년이 지나갔다. 그 사이 성왕은 폭풍성장을 거듭하더니 의젓한 성년이 되어 있었다. 주공은 어른이 된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다시 신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사람들도 비로소 주공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아들이었을 때나 동생이었을 때나 숙부였을 때나 신하였을 때나 어느 위치에 있든 상관하지 않고 주나라의 제도와 예악의 정비에 힘써 주나라 문화의 터전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주공의 협탁에 놓인 기물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내옥은 ‘공재 윤두서’에서 “주공이 50여개의 나라를 정벌해 고대 중국의 혼란을 마무리하고, 봉건제도를 실시해 주나라의 토대를 굳건히 했다”고 평가하면서 이런 인간상을 표현하기 위해 기물을 그려 넣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칼은 전장을 누빈 주공의 무용을 상징하고 천에 싸인 물건은 거문고와 같은 악기로 주공이 중국 문물제도의 창시자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둥그런 통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에는 그것이 시초점(蓍占)을 치기 위한 산가지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나라 때는 길흉화복을 시초점과 거북점(龜占)으로 결정하였다. 그만큼 점괘를 중요시했다.

주공의 잔소리

작자미상. ‘경직도 8폭 병풍’ 중 ‘농사짓기와 누에치기(耕織圖)’와 세부도(아래). 비단에 색. 135.5×49.4㎝.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경직도 8폭 병풍’ 중 ‘농사짓기와 누에치기(耕織圖)’와 세부도(아래). 비단에 색. 135.5×49.4㎝. 국립중앙박물관

그렇다면 주공은 섭정을 그만두고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준 후에는 어떠했을까. 무조건 성왕을 믿고 맡겼을까. 그렇지 않았다. 형님을 대신해 조카가 선정을 베풀기를 바라는 숙부의 심정은 노심초사로 가득 찼다. 그래서 쉴 새 없는 잔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잔소리의 증거물이 바로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다. 먼저 그림을 보면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은 정갈하게 정리된 집과 정자를 그린 전경, 나무 아래서 색색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모여 있는 중경, 먼 산을 배경으로 초가집들이 아늑하게 들어선 후경으로 구성되었다. 복사꽃은 마을 곳곳에 꽃등처럼 밝게 피었고 버드나무는 연한 새순이 짙어지는 중이다. 그림을 무심히 본다면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그린 풍속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여인들은 지금 누에에게 먹일 뽕잎을 따는 중이다. 단순한 풍속화가 아니라 농사짓고 누에치는 과정을 그린 경직도(耕織圖)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주공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주공은 조카인 성왕이 궁궐에서 귀하게만 자라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알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성왕에게 농사와 길쌈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제왕의 의무를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왕의 첫 번째 의무가 무엇인가. 백성들이 무엇을 위해 고생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공은 성왕에게 “군자는 안일하지 않아야 합니다”로 시작하는 잔소리로 제왕 교육을 한다. 그 내용이 ‘서경’의 ‘무일(無逸)편’에 자세히 적혀 있다. ‘무일’은 안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주공이 성왕에게 한 말이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해도 귓등으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주공은 다시 주나라 농민들이 농사와 길쌈에 종사하는 생활을 월령가(月令歌) 형식으로 읊은 시를 지었다. 그 내용이 ‘시경’의 ‘빈풍칠월(豳風七月)편’이다. 빈(豳)은 주나라의 옛 명칭이다. ‘칠월’은 농민들이 계절별로 어떤 일을 하고 사는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서경’의 ‘무일편’과 ‘시경’의 ‘빈풍칠월편’은 주공이 성왕에게 농사와 길쌈의 중요성을 일깨워줌으로써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안일하지 말고 정치에 힘쓰라는 교훈이 담긴 내용이다.

곱게 자라 백성의 어려움을 모르는 세자에 대한 걱정은 역대 왕들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그래서 중국과 조선과 일본을 막론하고 수많은 왕이 ‘서경’의 ‘무일편’과 ‘시경’의 ‘빈풍칠월편’을 세자에게 교육하는 데 주력했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이다. 계속 같은 말을 해봤자 관심 없는 세자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각매체다. 백문이불여일견 아닌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무일도(無逸圖)’와 ‘빈풍도(豳風圖)’였다. ‘무일편’과 ‘빈풍칠월편’의 ‘그림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역대 왕들은 궁중의 전각이나 침전 등 시선이 가 닿는 곳이면 가능한 한 ‘무일도’와 ‘빈풍도’를 붙여놓았는데 의외로 효과가 대단했다. 그래서 이것을 발전시켜 경직도를 제작했다. 안일하고 나태한 것이 어찌 세자만의 문제겠는가. 왕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선비들은 자주 왕에게 경직도를 진상하였다.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는 주공의 가르침이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글과 그림으로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다. 농사짓고 누에치기는 한 번만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는 사계절에 맞춰 농사짓고 누에치는 과정을 8폭 병풍에 담은 ‘경직도8폭 병풍’에 들어 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여인들 복장이 노동하는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의외로 화사하고 산뜻해 보인다. 경직도가 비록 농상(農桑)의 어려움을 일깨워주기 위한 감계화이지만 궁궐에서 쓰는 그림이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우중충한 그림보다는 화사하고 밝은 그림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리 미적인 감상의 대상이 아닌 실용화이고 감계화라고 해도 그 그림이 놓인 장소의 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공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을까

지금까지 주공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간략한 글만 보더라도 주공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인물인 것처럼 생각된다. 과연 그는 우리와 다른 사람일까? ‘서경’의 ‘다사(多士)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오직 성인도 생각이 없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 주공이 한 말이다. 그러니 성인들도 애초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수많은 시험대를 거치게 된다. 그 시험대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경우일 수도 있고 개인의 삶을 바꾸는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주고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멘토를 가지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자가 주공을 멘토 삼아 평생 동안 올바른 길을 가려 했던 것처럼.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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