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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28호]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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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당취 총대장 서산대사 키운 지리산 요새의 수수께끼

글·사진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지리산 의신사에 속한 31개의 암자 중 하나인 원통암은 ‘청학포란’의 명당이다.
서산대사가 조선조 승려들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당취(黨聚)들의 총대장이었다고 한다면 수수께끼가 풀린다. 그 수수께끼는 임진왜란이다. 왜 승려들이 전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에서는 승군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사명대사가 대표적이고,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과 함께 실질적인 전투에 앞장섰던 부대도 계룡산 갑사의 영규대사가 이끌었던 승군이다. 복부에 일본군의 조총을 맞고 창자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영규대사가 금산전투 이후 아랫배를 손으로 움켜쥐고 계룡산 갑사까지 걸어왔다는 이야기가 계룡산에 구전으로 전해진다.
   
   행주대첩에서도 총지휘는 권율이 했지만 왜군들이 공격해 오는 정면 루트에는 뇌묵처영(雷默處英)이 지휘하는 승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행주대첩도 승병들이 큰 역할을 했지만 기록에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기록은 유생들이 남겼기 때문에 천대받던 계급인 승병의 역할에 대해서는 기록이 소략할 뿐이다. 하동 쪽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길목인 석주관(石柱關)전투에서도 화엄사 승려 수백 명이 투입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석주관전투의 보복으로 왜군들은 구례 화엄사를 불지르고 절에 남아 있던 승려들까지 살육하였다. 그렇다면 왜 승려들이 이처럼 치열하게 전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을까.
   
   불교는 불살생의 종교이다. 살생을 아주 중요한 계율로 금한다. 살(殺), 도(盜), 음(淫) 아닌가. 불교는 왜 살생이라는 가장 큰 계율을 어겨가면서까지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조국을 위해 진리를 버린 것인가? 필자가 품는 결정적 의문은 전쟁에 나가서 전투를 한다는 게 평소에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목이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창자가 터지는 살육의 현장에 나가서 칼과 창을 휘두른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인가. 평소에 군사훈련, 아니면 중국 소림사의 무술승들처럼 치열한 무술훈련을 받지 않았으면 전쟁터에 갑자기 호출받고 나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승려들은 왜 창을 들었을까?
   
   임진왜란의 승군 참여는 사전에 승려들이 조직화되어 있었고, 나름대로의 정신무장과 훈련이 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당시 일본도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조선과 종교가 다른 것도 아니었다. 유럽의 십자군전쟁은 종교가 달랐다. 일본도 조선 승려들에 대해 종교적 적대감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종교적 이유 때문에 붙을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조선 승려들은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천민으로 계급이 강등된 상태였다. 국가로부터 착취나 당하고 있던 승려 계층이 무슨 책임감이 있다고 목숨을 내놓고 전쟁에 참여한단 말인가. 오히려 이 산 저 산의 깊은 산속 암자에 숨어 있기 좋은 계층이 조선의 중들이었다. 그런데 산속에 숨어서 목숨 부지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한 점이 참 이상하다.
   
   지리산 의신사(義神寺)에 소속된 암자가 31개쯤 있었다고 한다. 그 암자 중의 하나가 원통암(圓通庵)이다. 해발 700m에 있는 원통암은 의신사에서 30~40분쯤 올라가면 나타난다. 청학이 알을 품는다는 청학포란(靑鶴抱卵)의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원통암 뒤의 봉우리가 도덕봉인데, 이 도덕봉의 꼭대기 부분이 바위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이 도덕봉 꼭대기의 바위 부분이 청학의 머리에 해당하고, 도덕봉 양옆의 봉우리 형태가 청학이 적당하게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둥그런 형태의 봉우리 꼭대기에 날카로운 바위가 있으면 매나 독수리, 학으로 간주하고, 바위가 없이 그냥 둥그런 형태면 닭이나 봉황으로 본다. 도덕봉은 매나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바위는 아니고 그보다는 뭉툭한 바위에 해당하므로 청학으로 본 것 같다. 거기에다가 원통암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너 겹으로 거듭 둘러싸고 있다. 여러 겹으로 둘러쌀수록 좋은 것으로 본다. 두껍다는 이야기이다. 암자 터를 좌우에서 봉우리들이 겹겹이 쌓아줄수록 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고 보존된다. 이러한 명당의 조건을 갖춘 원통암에는 당시에 숭인장로(崇仁長老)가 머물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과거에 낙방하고 친구들과 지리산에 놀러갔을 때 숭인장로는 15~16세 무렵의 청소년이었던 서산의 관상을 보고 “너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게 좋겠다. 공문급제(空門及第)도 있다. 기골이 맑아서 중이 되면 깨달음을 얻을 상이다”는 칭찬을 하였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없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인재발굴이야말로 지도자의 최대 임무이다. 그러려면 관상과 골상을 보고 그 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서산 픽업은 숭인장로의 예지력과 도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숭인장로가 문제의 인물이다. 청소년 서산을 출가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숭인장로는 아마도 의신사의 조실(祖室)에 해당하는 식견과 경륜을 지닌 60~70대 어른 스님이었을 것이고, 숭인은 지도사범으로 부용영관에게 어린 서산의 공부를 맡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보기에 원통암이 자리 잡은 위치가 의신사의 조실스님이 머무를 만한 높이와 격국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빗점골 옆의 ‘연암난야’ 부용영관에게 5~6년 인턴과정을 공부시킨 다음 서산이 21세가 되었을 때 다시 원통암의 숭인장로에게 데려와서 정식으로 머리를 깎게 하고 출가를 시킨다. 서산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숭인장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숭인장로는 서산 이전에 지리산에 모여 있던 지리산 당취의 정신적 지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조 억불정책에 반발하여 가장 먼저 당취를 결성한 세력이 금강산으로 갔고, 그다음에 하는 거 보다가 ‘역시나 안 되겠구나’ 하고 결성된 세력이 지리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이 연재 초반에 한 적이 있다. 지리산에 모였던 당취 2중대 세력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던 곳이 바로 의신사 일대였고, 그 의신사의 조실급 비중의 인물이 숭인장로였으며, 숭인장로가 머무르던 곳이 원통암이라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 원통암에서 바라본 산세.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전국 명산 당취를 불러모으다
   
   이렇게 본다면 지리산 당취가 키워낸 인물이 서산대사라는 말이 된다. 서산은 30대 초반에 서울에 가서 잠깐 부활했던 승과(僧科)에 급제한다. 승과도 일종의 과거 합격이다. 서산은 승과에 급제함으로써 지리산 당취라는 재야세력의 뒷배와 서울 승과라는 제도권의 인증을 모두 획득하게 된다. 강호와 강단을 모두 통합할 수 있는 스펙을 획득한 셈이다. 말하자면 길거리 복싱 실력자가 UFC에도 나가서 챔피언이 된 경우라고 할까. 거기에다가 서산대사는 ‘한 소식’을 한 인물이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보고 총명하고 승과급제를 했다고 해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한 소식’을 못 하면 카리스마가 발휘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것으로 본다.
   
   서산은 20대 어느 날에 봉성(鳳城·현재의 구례)의 동네를 지나다가 초가지붕 위에서 우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한 소식을 깨닫게 되었다. 한 소식에다가 승과급제까지 했으니 서산은 이후로 지리산은 물론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 명산에 흩어져 있던 당취들의 총대장이 될 수 있었다. 서산의 카리스마 앞에 아무리 힘이 세고 무술을 잘하던 중이라 할지라도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서산이었기에 당대의 불교계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적절한 가르침을 전해주면서 서산 휘하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서산 밑에서 배출된 제자들이 임진왜란의 전쟁터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하조직인 당취 대장으로서의 서산대사라는 측면을 보지 못하면 임진왜란에서의 승군 참여를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지리산 당취를 규합한 이후에 서산은 금강산으로 갔다. 조선 초기에 입산하였던 강경파 당취들이 머물러 있던 산이 금강산이다. 이들 금강산파는 지리산파를 다소 내려다보는 입장이었지 싶다. 금강산 당취들은 ‘너희들 봐라, 결국 일찍 들어온 우리가 맞지 않았나!’ 하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은 금강산에서도 머물렀다. 백화도인(白華道人)이라는 호는 금강산에서 머물 때 사용하던 호이다. 금강산을 접수하고 다시 지리산에 되돌아와 머물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이북의 묘향산에 머물렀다. 말년이라고 하면 대략 60대부터이지 않나 싶다.
   
   서산은 산을 평가할 때 장(壯)과 수(秀)라는 개념으로 기준을 삼았다. 장은 두껍고 육중한 느낌이고, 수는 날카롭고 호기로운 느낌이다. 서산은 지리산에 대해서 장이불수(壯而不秀)라고 보았고, 금강산에 대해서는 수이부장(秀而不壯)이라고 보았다. 장엄하되 빼어난 기운이 좀 덜한 산이 지리산이고, 아주 기백이 있고 빼어나기는 하되 육중한 맛이 좀 덜한 산을 금강산으로 본 것이다. 이는 당취들이 지녀야 할 양대 자질을 이야기한 것인 듯하다. 제대로 된 당취가 되려면 양쪽 기운을 다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묘향산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묘향산은 장이수(壯而秀)라고 보았다. 지리산의 장점과 금강산의 장점을 모두 다 갖춘 산이 묘향산이라는 이야기인데, 묘향산의 어떤 점을 그렇게 높이 평가했을까. 묘향산은 해발 1909m로 상당히 높은 산이다.
   
   서산이 말년에 묘향산에 머물렀다는 것은 북쪽 지역에 산재해 있던 당취들을 규합하는 차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가장 안전한 산이라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묘향산은 위도상으로 평양보다 훨씬 위에 있다. 왜병으로부터 안전한 지점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 70대였던 서산은 이 묘향산에 있었다. 이것도 미리 내다본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리 내다본 착점이었다. 서산대사를 비롯한 당시 불교계에서 한 소식을 한 고승들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서산은 미리 침략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서산은 이 묘향산에서 임진왜란 승병을 총지휘하였다.
   
   
▲ 원통암 대문 간판에 ‘서산선문’이라고 쓰여 있다.

   첩첩산중 한가운데 자리 잡은 요새
   
   이야기가 곁으로 빠졌다. 다시 되돌아가 보자. 의신마을 뒷길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산대사가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승려가 된 원통암이 나온다. 이 원통암으로 가는 산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고개를 돌려 앞산을 보니 앞산의 형태가 더 완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의신사의 앞산이기도 하다. 좀 더 높은 지점에서 보면 앞산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앞산의 허리 잘록한 부분이 ‘내당재’이다. 이 내당재를 넘어가면 또 하나의 고갯마루가 나타나고 그 고개 이름이 ‘외당재’이다. ‘당재’라는 이름은 ‘당취들이 지키던 고개’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의신사를 가장 앞에서 지키는 고개 이름이 내당재이고, 그 너머로 바깥에 있던 방어 라인이 외당재인 셈이다. 당취 본부였던 의신사를 이중으로 지키던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개념이었다. 칠불사 쪽에서 내당재와 외당재를 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의신사(의신마을) 터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있는 고개들이니까 이해가 된다.
   
   서산대사 이후로 지리산 당취의 본부 역할을 했던 의신사의 지정학적 위치는 절묘하다. 지리산의 가장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원통암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의신사의 요새적 이점을 파악해 보았다. 역시 필드가 선생이다. 현장에 와서 보니 이해가 된다. 의신사에서 내당재를 넘고 외당재를 넘으면 피아골 쪽의 농평 마을이 나온다. 농평은 비결서에 ‘노호농골(老狐弄骨)’의 명당이 있었다고 해서 유명한 마을이다. 늙은 여우가 해골 가지고 노는 명당이 있다는 뜻이다. 농평을 지나 섬진강 옆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구례가 나온다. 조선시대 지리산 동쪽의 산청이나 하동보다도 먹을 것이 풍부했던 동네가 구례이다. 서산은 지리산에 있을 때 당재를 넘어 구례를 왕래하였다. 구례는 옛날에 봉성(鳳城)이라고 불렸다. 구례 읍내 가운데에 봉성산이 있다. 서산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닭울음 소리도 구례에서 들은 것 아닌가.
   
   불가에서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을 이야기한다. 화두나 혹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전혀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집중된 심리 상태를 가리킨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고 오로지 화두만 생각나는 상태를 의단(疑團)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의단의 상태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그 의단이 깨지면서 한 소식을 얻는다. 치열한 긴장상태에서 갑자기 소리를 듣고 이완이 되는 것이다. 서산이 구례의 마을을 지나면서 낮에 닭울음 소리를 듣고 깨쳤다는 것은 이를 가리킨다. 선사들의 어록을 읽어보면 대나무에 돌멩이가 ‘딱-’ 하고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하러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유레카’ 하고 깨쳤다는 일화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 팽팽했던 긴장에서 이완으로 전환된 것이다. 봉성, 즉 구례에서 서산이 깨쳤다는 것은 원통암이나 의신사에서 주로 다녔던 통로가 내당재와 외당재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서산이 머리를 깎은 원통암은 지리산 당취의 중심인 의신사의 조실스님이 머무르던 암자였다. 그만큼 지리산 깊숙한 요새 지형에 해당한다. 지리산 당취의 젖줄을 먹고 성장했던 서산은 승과 합격 후부터 자의 반 타의 반 본격적으로 금강산과 묘향산을 비롯한 전국의 당취를 규합하였다. 간판스타 서산의 지휘 아래 있었던 당취조직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반정부 활동이 아닌 왜군과의 전쟁터에 투입된다. 당취가 조선왕조 붕괴라는 체제전복에 동원되지 않고 왜적과의 전쟁에 투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산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이 점이 참 묘하다. 서산 이후로 당취들은 조선 말기까지 명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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