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청우출관도’. 비단에 색. 29.6×23.2㎝. 왜관수도원
정선. ‘청우출관도’. 비단에 색. 29.6×23.2㎝. 왜관수도원

이번 추석 최대의 화제는 단연 나훈아였다. 그동안 봇물처럼 쏟아지던 트로트에 피로감을 느끼던 사람들조차도 나훈아의 등장에는 반색을 했다. 사람들은 가지 못하는 고향 대신 TV 앞에 앉아 노장의 귀환에 열광하면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특히 노년층들의 반응은 남달랐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두 시간 반 동안 무대 위를 펄펄 날아다니는 그를 보면서 “저게 가능하구나!” 싶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나이가 나이니만큼 “저러다 무릎이라도 삐끗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조바심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나훈아는 한창때의 무대장악력과 쇼맨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명실공히 ‘가왕’을 넘어 ‘가황’의 자리에 우뚝 설 만한 자격이 인정되는 쇼였다. 왕도 아니고 황제의 자리에 추대되었으니 당분간 그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옥황상제라면 몰라도.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열에 아홉은 변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전혀 딴사람으로 돌변하는 것이 세태다. 그런데 나훈아는 옥황상제 외에는 건드릴 수 없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자기 자신으로 남는 법을 잊지 않았다. 어떤 가수로 남고 싶냐는 질문에 “유행가 가수는 흘러가는 거지, 뭘로 남고 싶다는 것 자체가 웃기다”란 말로 응수했다. 역시 가황답다. 영혼이 자유로워야 한다면서 훈장도 거부했다는 그의 내공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황은 자신을 신비주의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가당찮다”는 말로 일침을 놓았다. 꿈이 고갈될 것 같아 모습을 감춘 것이고, 신곡을 만들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내면이 시키는 대로 산 사람 나훈아. 그를 보고 있자니 2500여년 전의 노자(老子)가 떠올랐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외치던 바로 그 노자 말이다. 노자 역시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신비주의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청우 타고 함곡관 나서다 도를 얘기한 노자

먼저 그림을 보자.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청우출관도(靑牛出關圖)’는 노자가 청우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나서기 전에 윤희(尹喜)와 대화하는 장면을 포착한 작품이다. 윤희는 노자에게 도(道)에 대해 묻고 노자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그 대답을 정리한 책이 ‘도덕경(道德經)’이다. 윤희는 함곡관을 지키는 관리였다. ‘관(關)’은 고대에 이웃 나라를 왕래하던 길목이나 요충지에 설치하던 방어시설로 병사를 주둔시키던 곳이다. 이웃한 두 나라에서는 관문을 통해 왕래하는 사람을 조사하거나 수입물품에 대해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말하자면 윤희는 지금으로 치면 국경세관원이라 할 수 있다. 그중 함곡관은 중국에서 서역으로 나가기 위해 거치는 관문이다. 지금 노자는 함곡관을 통과해서 서쪽으로 가려는 참이었다.

그림에는 우람한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 청우를 탄 노자와 윤희가 보인다. 청우(靑牛)는 검은털의 소인데 신선들이 타고 다닌다고 전해진다. 소나무는 노자가 타고 가던 소를 매었던 청우수(靑牛樹)의 표현일 것이다. 두 사람 뒤로는 구름에 싸인 함곡관의 2층 누각이 그려졌다. 소나무 가지가 끝나는 왼쪽 상단에는 ‘청우출관’이라는 제목과 함께 ‘겸재(謙齋)’라는 정선의 호가 적혀있다. 사선으로 배치된 길과 구불거리며 흐르는 시냇물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흰구름 등이 깊이감과 공간감을 더해주는 작품이다.

‘청우출관도’는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 ‘노자기우도(老子騎牛圖)’ 혹은 ‘자기동래도(紫氣東來圖)’라는 제목으로 그려졌다. 모두 노자가 소를 타고 함곡관을 나서는 장면이 주제다. ‘자기동래도’라는 제목은 윤희가 누대에 올라 사방을 관망하다가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의 자줏빛 기운(紫氣)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오는 것을 보고 성인(聖人)이 오실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과연 노자가 왔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중국 신선들의 얘기를 모은 책 ‘열선전(列仙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자색’은 아주 귀한 색이다. 황제가 입는 곤룡포의 색이 황색과 자색이다. 그런 상서로운 자색의 기운이 동쪽에 가득 찼으니 분명히 그만한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는 인물이 올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윤희가 노자를 기다렸다가 도에 대해 묻게 된 연유다.

상서로운 인물의 만남 때문일까. 아니면 ‘도덕경’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일까. 수많은 화가가 노자를 그리면서 ‘청우출관도’를 소재로 삼았다. 영조시대를 대표하는 겸재 정선은 물론 조선을 대표하는 김홍도가 ‘노자출관도’를 그렸다. 조선 말기의 유숙, 장승업, 안중식, 조석진, 최우석도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다. 많이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많았다는 뜻이다. 유학을 기둥 삼았던 조선에서 도교의 교조에게 관심이 많다니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노자는 어떤 사람인가. 사마천의 ‘노자 한비열전(老子 韓非列傳)’에 의하면, 노자의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이고,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으로 주나라 왕실의 장서(藏書)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그래서 노자를 주하사(柱下史) 혹은 주장사(柱藏史)라고 부른다. 그는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났다. 이것이 노자와 윤희가 함곡관에서 만나게 된 이유다. 사마천은 노자가 윤희에게 ‘도’와 ‘덕(德)’에 대해 5000여자로 말하고 떠나가 버려 그가 어떻게 여생을 보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노자가 도를 닦아 수명을 연장했기 때문에 160여살 또는 200여살을 살았다고 덧붙였다. 정확한 사실과 사건을 바탕으로 쓴 사마천의 역사책이 이 정도였으니 노자에 대한 황당무계한 얘기들이 대단히 많이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 인물인 이규경(李圭景·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진강(陳剛)의 말을 인용해 노자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마천의 글보다 더 ‘뻥’이 심하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노자는 주나라 말기에 출생했는데 그 아버지 광(廣)은 시골의 가난한 백성이었다. 광은 어려서부터 부잣집에 고용살이하면서 나이 70이 넘도록 아내가 없었고, 노자의 어머니 역시 시골의 어리석은 여자로 나이 40이 넘도록 남편이 없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우연히 산중에서 만나 야합(野合)을 했고 천지의 영기(靈氣)을 받아 임신을 했다. 그러나 80개월이 지나도 출산하지 못하자 주인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쫓겨난 여인은 하는 수 없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밑을 헤매다가 머리카락이 하얀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의 성(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오얏나무(李)를 가리켜 아들의 성으로 삼았고, 아들의 귀(耳)가 커서 이름을 이(耳)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하얀 것을 보고 ‘노자’라 불렀다. 뱃속에서 80개월을 보냈으니 태어났을 때 이미 노인네가 되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노자를 그린 대부분의 그림이 그를 노인네로 그린 이유가 바로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노자는 장성하여 주나라 천자의 장서각을 맡아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례(古禮)와 고사(古事)를 많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공자가 그에게 예제(禮制)와 관명(官名)에 대해 묻기 위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이상이 실학자 이규경이 조사한 노자의 출생 내력이다.

김진여. ‘공자성적도’ 중 ‘문례노담’. 1700년. 비단에 색. 32×57㎝. 국립중앙박물관
김진여. ‘공자성적도’ 중 ‘문례노담’. 1700년. 비단에 색. 32×57㎝. 국립중앙박물관

노자에게 찾아와 예에 대해 물은 공자

사마천이나 진강의 글이 아니라 해도 노자의 출생 시기나 활동 연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심지어는 그가 실존했던 인물인가에 대해서조차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노자는 실존 여부도 불투명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후에는 거의 옥황상제에 가까운 신적 존재로 추앙받았다. 당나라 황제는 성씨가 이씨였기 때문에 그럴듯한 조상을 찾다가 노자의 이름이 이이임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당 황실은 그들이 노자의 후손이라 자처했다. 덕분에 노자는 영문도 모른 채 성조(聖朝)의 시조(始祖)가 되어버렸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국교로 삼은 것도 시조의 종교 때문이었다. 그 후 노자는 그를 교조로 받드는 도교에서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격화되었다. 존호(尊號)는 현현황제(玄玄皇帝) 혹은 현원황제(玄元皇帝)라고 일컬어졌다. 당 고종(高宗)은 건봉(乾封) 원년(666)에 노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 추호(追號)했다. 노자 살아생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감투들이다. 나훈아 같은 가수도 영혼이 자유롭고 싶어 훈장을 사양한 마당에 노자인들 태상노군이니 현원황제니 하는 감투를 순순히 받아 썼을까. 생각만 해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 와중에도 공자가 노자를 찾아 예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던 듯하다.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을 정도다. 조선 후기의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문례노담(問禮老聃·노자에게 예를 묻다)’은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 기록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공자의 일생을 수십 장의 그림으로 그린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 들어 있다. 그림 오른쪽 병풍 앞에서 무릎에 거문고를 올려놓고 앉은 인물이 노자이고, 왼쪽에 손을 맞잡고 앉아 있는 인물이 공자다. 노자는 태어날 때부터 백발이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림에서도 역시 탈모가 심한 백발 노인이다. 노자와 공자는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노자가 공자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나이 34세 때(BC 518) 제자들과 함께 노자를 찾아가 “예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런데 노자의 대답이 의외였다. 예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대뜸 독설을 퍼붓는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들은 뼈가 이미 썩어 없어지고 그들의 말만 남아 있을 뿐이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해 투덜거릴 것이다. “내가 다시는 저런 인간을 상종하나 봐라.” 그러나 공자는 달랐다. 그는 노자에 대해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노자를 ‘용과 같은 존재(猶龍)’라고 추켜세웠다.

그렇다면 노자는 왜 그렇게 공자를 야멸차게 대했을까. 그 두 사람은 모두 춘추시대의 혼란기를 살았지만 그 혼란을 극복할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소위 철학이 달랐던 것이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송대관의 ‘차표 한 장’이란 노래에는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사랑했지만 갈 길이 달랐다”고 아픈 이별을 애달파한다. 노자와 공자의 노선이 딱 그 모습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주나라의 혼란기에 살았다. 문무왕과 강태공, 주공이 협심해 기원전 1046년에 판을 짜놓은 주나라는, 수도를 호경(鎬京)에서 낙읍(洛邑)으로 옮기면서 서주(西周·BC 1046~BC 771)와 동주(東周·BC 770~BC 256)로 나뉜다. 동주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뉘는데 수많은 나라가 각축을 벌였던 시기다. 춘추시대(春秋時代·BC 770~BC 476)는 70개가 넘는 나라가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마지막에는 7개의 나라로 재편됐다. 이때가 전국시대(戰國時代·BC 475~BC 221)다. 전국시대는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막을 내린다.

공자(BC 551~BC 479)와 노자(BC 6세기경)는 춘추시대의 끄트머리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주나라는 혈연을 기초로 한 봉건제를 국가관리시스템으로 구축한 사회였다. 봉건제는 종법제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장자 중심의 서열관계를 국가시스템에 적용하는 제도가 종법제도다. 장자가 집안에서 가장 큰 권한과 의무를 지듯 국가에서는 천자가 자신의 동성이나 충신들에게 분봉을 해주고 제후국을 지배하는 구조다. 서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봉건제는 완벽하게 작동되었다. 그러나 동주시대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천자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고, 그 자리를 제후들이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대부가 제사를 지낼 때 사일무 대신 천자가 쓰던 팔일무를 쓸 정도가 되었겠는가. 힘 있는 사람이 장땡이었다. 공자와 노자가 맞닥뜨린 춘추시대 말의 현실이 패권주의가 난무하는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이렇게 명분과 실재가 어긋난 상황에서 두 철학자는 고민해야 했다. 이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서주시대까지만 해도 작동하던 천명(天命)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인간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 그 고민 끝에 공자가 내린 결론은 인(仁)이었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를 마음속에 ‘인’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씨앗을 잘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공자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강조한다. ‘인’이라는 씨앗을 학습을 통해 잘 키워서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단계까지 키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인’은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를 가지는 효제(孝悌)를 모든 예의 근본으로 삼았다. 효제가 확대되는 것이 충(忠)이고 신(信)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노자는 공자와는 정반대되는 결론을 내렸다. 노자는 공자가 말하는 인이나 예 등 특정한 가치나 사상 혹은 이념이 우월적인 지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나 이념도 그것이 개념화되고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경색되고 굳어져 버린다. 곧 자기와 다른 개념과 사상을 가진 사람을 억압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을 주장한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이름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이니 예니 하는 어떤 개념을 정하고 나면 그 프레임 자체가 곧 하나의 틀이 되어 사람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인간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자연의 질서를 따르면 된다. 그것이 무위자연이다. 무위자연은 기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이 아니다. 이미 습득한 특정한 이념이나 지식, 가치관 대신 있는 그대로의 유(有)와 무(無)가 서로 상생할 수 있도록 놓아두는 행위다. 음이 양이 될 수도 있고 많은 것이 적어질 수도 있는 유와 무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결국 공자는 철저히 유위(有爲)를 주장한 반면 노자는 무위를 주장했다. 두 사람의 철학과 세계관은 상행선과 하행선처럼 갈 길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의 귀착점은 같았다. 바로 인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들은 시대 상황에 맞게 유가와 도가의 가르침을 적절하게 잘 활용했다. 그들은 ‘안으로는 황로를 사용하면서 겉으로는 유술을 보여준(內用黃老 外示儒術)’ 정치를 펼쳤다. 안으로는 열린 사고를 하면서 밖으로는 정해진 원칙에 따라 국정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당색이 다르면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한번쯤 귀기울여 봄 직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