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미상. ‘고신도상(高臣圖像)’ 중 ‘장자(莊子)’. 26×20㎝. 국립중앙도서관
필자미상. ‘고신도상(高臣圖像)’ 중 ‘장자(莊子)’. 26×20㎝. 국립중앙도서관

살다 보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건과 만날 때가 있다. 그 사건의 의미가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2008년 1월 1일에 전남 담양으로 답사를 떠났다. 가사문학의 산실인 담양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소쇄원과 환벽당을 거쳐 식영정(息影亭)에 도착하자 눈이 펄펄 내렸다. 쌓인 눈 위를 또다시 덮어주는 눈. 식영정은 ‘그림자가 쉬는 정자’라는 의미가 그러하듯 사람의 마음까지 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런 멋과 아취가 있는 정자이니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이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소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눈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타령 소리가 들렸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흥타령’이었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맞으며 소리꾼이 쥘부채를 쥐었다 폈다 하면서 흥타령을 부르고 있었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간 인생 부질없다”가 이어지는 동안 눈이 그쳤던가, 계속 내렸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날 소나무를 배경 삼아 느닷없이 듣게 된 흥타령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생생하다.

‘식영정’의 식영과 ‘흥타령’의 꿈은 모두 ‘장자(莊子)’와 관련이 있다. 식영은 ‘장자’의 ‘어부(漁父)’편에, 꿈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온다. 나는 1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식영과 꿈이 ‘장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리꾼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거기서 소리를 한 것이었을까. 궁금하다.

남화진인 장자

장자(莊子·기원전 369~286)는 이름이 주(周), 자(字)는 자휴(子休)다. 그의 생애를 ‘고신도(高臣圖)’에 그려진 ‘장자’의 화제(畫題)를 바탕으로 정리해보겠다. ‘고신도’는 중국의 왕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그린 초상화집이다. 장자는 전국시대 때 송(宋)나라의 수양(睢陽·현재의 허난성) 몽현(蒙縣)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몽수(蒙叟)’ 또는 ‘몽장(蒙莊)’이라고도 부른다. ‘몽현의 장로’ 또는 ‘몽현의 여윈 늙은이’라는 뜻이니 그가 빼빼 마른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장상공(長桑公)에게 사사했으며 호를 남화선인(南華仙人)이라 했는데 일찍이 몽현의 칠원(漆園)에서 하급 관리를 지냈다. ‘칠원’은 옻칠을 하는 곳이니 매우 낮은 직급이다. 그는 칠원에서의 벼슬을 곧 사직하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장자’를 보면 그가 뒷골목에 살면서 짚신을 삼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때로는 먹을 것이 떨어져 어떤 제후에게 양식을 꾸어 달라고 했던 얘기도 등장한다. 매우 궁핍하게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의 가난은 능력이 모자라거나 실력이 부족해서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인 가난이었다. 사마천의 ‘노자한비열전’에 의하면 초(楚)나라 위왕(威王)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왕들이 그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지만 사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유가 무엇일까. 장자가 위왕이 보낸 사신에게 한 말을 들어보자.

“천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경상(卿相)이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치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들어가게 되오. 그때 소가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장자’의 ‘추수(秋水)’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가 복수라는 장소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초왕이 보낸 대부가 또 찾아와 정치를 맡아달라는 왕의 뜻을 전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신령스러운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3000년이나 되었다더군요. 왕께서 그것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 위에 간직하고 있다지만, 이 거북은 차라리 죽어서 뼈를 남긴 채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을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그가 은자(隱者)의 전형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고결하게 살겠다는 이런 은자들의 삶은 때로 누추해 보여 무시하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장자와 같은 송나라 사람 중에 조상(曹商)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송나라 왕을 위해 진(秦)나라로 사자(使者)가 되어 떠났다. 그가 출발할 때 송나라 왕은 몇 대의 수레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나라 왕이 그에게 수레 100대를 덧붙여 주었다. 그가 외교적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지금으로 치면 벤츠 같은 비싼 외제차를 여러 대 받은 셈이다. 자연히 우쭐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금의환향한 후 장자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이렇게 비좁고 지저분한 뒷골목에 살며 가난하게 짚신을 삼는 일, 또는 목덜미는 비쩍 마른 채 두통으로 얼굴이 누렇게 뜬 꼴이 되는 일에는 서투른 편입니다. 그보다는 만 승의 천자를 한 번 깨우쳐 주는 것만으로 백 대의 수레를 따르게 하는 일에는 능한 사람이오.”

기고만장해 거드름을 피우는 조상을 보며 가만히 있을 장자가 아니었다. 장자가 일침을 놓았다.

“진나라 왕은 병이 나서 의사를 부르면 종기를 터뜨려 고름을 뺀 자에게 수레 한 대를 주고, 치질을 핥아서 고치는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준다더군. 치료하는 데가 더러운 곳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주어지는 수레가 많다는 거야. 그대도 수레가 정말 많은 것을 보니 그 치질을 고친 모양이지?”

‘장자’의 ‘열어구(列禦寇)’편에 나오는 얘기다. 위의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다니는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독립과 자존을 실천하며 살고자 했던 장자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자존적인 삶은 힘들지만 자유롭다. ‘장자’를 읽으면 공맹(孔孟)으로 대표되는 유가(儒家) 서적을 읽었을 때의 답답함이 사라진다. 대신 무한히 넓고 광활한 천지 속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듯한 자유로움을 느낀다. 기존에 정해놓은 제도나 관념, 관습과 개념에 얽매여 있던 사람들은 ‘장자’를 펼치자마자 압도되기 시작한다. “북녘 바다에 사는 곤이라는 물고기는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로부터 시작해 “곤이 변해서 된 붕새는 한 번 날아오르면 9만 리 장천을 비행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장자의 우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가 열어준 호방함의 세계는 고정된 관념 속에 갇혀 있는 정신세계를 무한히 확장시켜준다.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하는 데는 우화(寓話)가 제격이다. 그래서 남화내외편(南華內外篇)으로 알려진 ‘장자’ 50권 10만여자는 모두 우화로 채워져 있다. 도덕적인 명제나 원칙을 적절한 이야기 속에 버무려 들려주기 위해서는 재치와 순발력은 물론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그만큼 많은 지식과 통찰력이 갖춰져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마천은 장자에 대해 “그의 학문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 학문의 요체는 근본적으로 노자의 학설로 돌아간다”고 평가했다. 그가 노자에게서 도가의 바통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촌철살인의 우화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철학자에서 하늘을 뚫을 정도로 위상이 높은 신의 경지까지 올라간 것은 도교(道敎)를 국교로 삼은 당나라 때였다. 현종(玄宗)은 천보(天寶) 원년(742), 장자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존호를 내렸다. ‘진인’은 참된 도를 깨달은 사람이다.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신격화된 인간을 의미한다. ‘장자’를 ‘남화경(南華經)’ ‘남화진경(南華眞經)’ 또는 ‘장자남화경(莊子南華經)’이라 부르게 된 배경이다.

장자는 전국시대의 끝자락을 장식한 철학자다. 그는 공자(기원전 551~479)보다 약 150년 뒤에 태어났고, 맹자(기원전 371~289)와는 거의 동시기에 활동했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였던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한 때가 기원전 221년이었다. 통일 직전의 전쟁과 살육이 일상이 된 비참한 시대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참담함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송나라 출신이다. 전국시대의 송나라는 주변 국가들이 전쟁만 일으켰다 하면 초토화가 되는 힘 없고 약한 나라였다. 그런 상황에서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有眞人而後有眞知)”는 장자의 주장은 눈물겨운 인간존중의 선언임에 틀림없다.

장자가 들려준 수많은 우화 중 호접몽(胡蝶夢)은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조선 후기에 양기성(梁起星·?~1755)이 그린 ‘장수몽접(莊叟夢蝶)’을 보면 한 선비가 바위에 팔을 기대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기 마련이다. 그는 누구이며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그 궁금증을 그림 상단 좌측에 적힌 ‘장수몽접’이 밝혀준다. ‘장수몽접’은 흔히 ‘호접몽’ 또는 ‘장주의 꿈’이라고 부른다. 호접몽은 ‘나비 꿈’이다. ‘장수몽접’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호접몽을 그린 작품이다. 내용은 이렇다. 장자가 칠원리에 살 때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는 겉보기에 반드시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물화(物化·만물의 변화)라고 한다.

양기성. ‘예원합진(藝苑合珍)’ 중 ‘장수몽접(莊叟夢蝶)’. 조선 18세기. 종이에 채색. 33.5×29.4㎝. 일본 야마토분가칸(大和文華館)
양기성. ‘예원합진(藝苑合珍)’ 중 ‘장수몽접(莊叟夢蝶)’. 조선 18세기. 종이에 채색. 33.5×29.4㎝. 일본 야마토분가칸(大和文華館)

그림자가 쉬는 정자와 꿈

꿈에 나비가 되기를 꿈꾸는 ‘몽접’은 답답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 번 날갯짓을 하면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간다는 붕새의 비상과도 같은 자유다. 장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유학을 최고로 알고 있던 조선에서도 아주 인기 있는 스타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수많은 우화와 이야기로 가득 찬 장자 그림이 그다지 많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껏 남아 있는 것이 ‘장수몽접도’와 ‘어락도(魚樂圖)’ 정도일 뿐이다. 좋아하지만 자신들이 견지하는 노선과 맞지 않아서일까. 여전히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기야 공자에 버금간다고 해서 아성(亞聖)으로 불리는 맹자도 그림의 주제로 거의 채택되지 못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왕도 왕답지 못하면 바꿔야 한다고 ‘역성혁명’을 설파한 맹자였으니 왕이나 기득권자들에게는 반역을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맹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다.

‘장수몽접’은 ‘예원합진(藝苑合珍)’이라는 화첩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예원합진’은 감계적인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글과 함께 그린 작품집이다. 거기에 소개된 인물들은 대개 유가에서 멘토로 인정하는 강태공, 부열, 증자와 같은 역사 속의 스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책에 노장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장자가 들어가 있다. 뜬금없어 보인다. 그만큼 장자의 호접몽이 인기 있는 테마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잠을 잔다. 잠은 잠인데 어떤 잠을 잘까. 이 세상에는 특이한 것이 궁금한 학자도 있다. 미술사학자 유옥경은 잠자는 사람들이 궁금해 그 사람들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유옥경은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수인상(睡人像)의 유형과 표상’이라는 논문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여러 부류로 분석했다. 수인(睡人)은 잠자는 사람이다. 조선시대 옛 그림 가운데는 자연을 벗하며 한가로이 잠든 고사(高士), 술에 취해 잠든 이태백, 길고 긴 잠으로 은거했던 진단(陳摶), 파도 위의 갈대를 타고 앉아 잠든 선동(仙童) 등 다양한 콘셉트로 잠든 사람들이 보인다. 잠자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바윗돌에 턱을 괸 채 잠든 사람, 평상 위나 초당 안에서 팔을 베개 삼아 잠든 사람, 갈대 위에서 자는 사람 등등 백인백색이다.

이들을 총체적으로 검토한 유옥경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잠은 단순히 자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옛사람들에게 잠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견줄 수 없는 참 깨달음의 공간으로, 물욕의 속박이 없는 소요하는 정신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니까 늦은 밤까지 총을 쏘아대는 할리우드 영화를 본 다음에 잠자리에 들어 누군가에게 쫓기며 두들겨 맞는 꿈을 꾸느라 비명을 지르는 혼몽한 상태와는 다른 잠이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잠을 자고 있을까.

우리에게 그림자는 무엇일까

다시 식영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정자 이름의 출처가 된 ‘식영’은 ‘장자’의 ‘어부’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떨어지려고 달린 자가 있었소. 발을 들어올리는 횟수가 잦으면 그만큼 발자국이 많아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소. 그래서 아직 느리게 달린다고 생각하여 더욱 빨리 쉬지 않고 달리다가 힘이 빠져 죽고 말았소.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멈추어 있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몰랐던 거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오!”

장자가 얘기하고 싶은 결론이 바로 ‘식영’이다. 우리에게 그림자는 무엇일까. 탐욕일 수도 있고 떨쳐내고 싶은 기억일 수도 있고 타인과 나를 구별하려는 분별심일 수도 있다. 모두 다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 생각들은 남과 나를 가르고,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진보와 보수를 편 가르기 한다. 그늘에 들어가면 멈추어질 그림자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평생 발목 잡히고 불행에 빠진다. 어디 인생뿐이겠는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식영정에 다녀올 것을 권한다. 식영정에 앉아 죽음에 이르러 “천지를 관으로 삼고 일월을 보물로 삼으며, 별들을 주옥으로 삼고 있으니” 장례 준비가 필요 없다고 했던 장자의 유언을 되새겨보는 것도 그림자를 쉬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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