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레브 근교 소도시 카를로바츠. 크로아티아 큰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내전의 상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photo 이경민
자그레브 근교 소도시 카를로바츠. 크로아티아 큰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내전의 상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photo 이경민

“전쟁이란 결코 정상적일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야. 정말 끔찍했지. 난 운이 좋게도 살아남아 지금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주말엔 교외에 나가 바람도 쐴 수 있지. 이런 삶이 내게 주어진 것에 정말로 감사해. 전쟁같은 건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미안하지만 그만 물어봤으면 좋겠어.“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잠시 머물렀던 숙소의 주인 아주머니는 괴로운 생각이 든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순간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던 실내에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기분 좋은 저녁 자리 후 술김에 용기내어 전쟁에 대해 물었던 조금 전의 나 자신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크로아티아에서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전쟁, 내전에 관한 언급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발칸반도에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등지로 옮겨가며 내전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차별 인종 학살이 벌어지고, 많은 이들이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 지금도 불과 30년도 채 안 된 아픈 역사로, 여전히 많은 발칸 반도인들의 마음엔 큰 상처로 남아있다.

모스타르 전쟁박물관에서 본 내전당시 사진. 당시의 긴박함이 느껴진다. ⓒphoto 이경민
모스타르 전쟁박물관에서 본 내전당시 사진. 당시의 긴박함이 느껴진다. ⓒphoto 이경민

내가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숙소에서 만난 주인 아주머니는 유난히 정많고 친절했다. 혼자 타지의 생활을 하는 나를 안쓰러워한 그는 가족들이 사는 집으로 나를 초대해 크로아티아 전통 가정식을 대접했다. 크로아티아 태생의 그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났을 때 20대였다고 했다. 내전 당시 갓 태어난 첫째 딸 아이와 함께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자그레브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고 했다. 따뜻한 바닥난방에 맛있는 음식, 거기에 발칸의 전통주 라키야까지. 기분 좋게 취한 나는 그만 내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전쟁에 관해 먼저 질문을 하는 것은 큰 실례란 것을 안 건 이후의 일이었다. 가족 중에 희생자가 있거나, 전쟁 중 일어난 상처로 여전히 고통속에 지내고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크로아티아가 아니더라도 전쟁의 당사자 앞에서 전쟁의 기억을 꺼내드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조금이라도 신중하게 생각해봤더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터. 무엇보다 나의 고국인 한국 또한 내전의 역사가 있는 나라가 아닌가. 내가 직접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만 해도 그 세월을 살아내셨고 그 때의 상처를 안고 계신 분들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당시 독주를 마셔 약간의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 순간 궁금함을 못 이겨 경솔했던 내 행동에 대한 후회가 지금도 몰려온다.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모스타르 전경. ⓒphoto 이경민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모스타르 전경. ⓒphoto 이경민

모스타르 시내 곳곳에서는 내전 당시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있는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photo 이경민
모스타르 시내 곳곳에서는 내전 당시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있는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photo 이경민

크로아티아가 겪은 내전의 상처는 도시의 외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피폭당한 건물들과 무너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두브로브니크나 자그레브 등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엔 전쟁의 흔적들을 많이 지워냈지만, 이들 도시의 근교로 조금만 나가도 내전의 흔적은 짙게 남아있다.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은 여전히 트라우마로 일상 생활을 하지 못할 만큼 고통 받고 있으며, 이들이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모습을 곧잘 목격할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차로 두세 시간 정도 달리면 나오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어제 전쟁이 났다고 해도 믿을만큼 전쟁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박혀 있었다. 건물들엔 총알 자국이 선명했고, 총격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도 많다. 크로아티아는 그래도 발칸국가 중에 그나마 경제적인 상황이 괜찮은 편이라, 빠른 시간 내에 도시의 재건이 이뤄졌다고 했다.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보스니아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가 더딘 편이었다. 삼십여년전 상처를 그대로 내보이며 방치되어 있었다.

전쟁의 잔흔 위론 예쁜 눈을 한 현지 어린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말 그대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해 있는 모습. 반인류적 학살이 자행됐던 공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니 괜히 마음이 먹먹해졌다.

내전당시 피해를 입은 건물 앞에서 뛰어노는 현지 아이들. 카메라를 든 나를 향해 밝게 웃어줬다. ⓒphoto 이경민
내전당시 피해를 입은 건물 앞에서 뛰어노는 현지 아이들. 카메라를 든 나를 향해 밝게 웃어줬다. ⓒphoto 이경민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경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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