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유산 영각사 화엄전 바로 뒤에 붓끝에 먹물을 찍은 듯한 문필봉이 버티고 있다. ⓒphoto 조용헌
남덕유산 영각사 화엄전 바로 뒤에 붓끝에 먹물을 찍은 듯한 문필봉이 버티고 있다. ⓒphoto 조용헌

남덕유산 자락에 있는 영각사(靈覺寺). 영각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학, 그중에서도 풍수지리까지를 포함한 인문지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영각사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이 행정구역이다. 덕유산이 남쪽으로 내려와 뭉친 봉우리가 남덕유산이고 함양은 이 남덕유산이 배산(背山)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함양의 뒷산이 남덕유산이고 앞산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북쪽인 마천 쪽의 봉우리들은 함양에서 보자면 남쪽에 포진하고 있는 안산(案山)이자 조산(朝山)이다.

안산은 무엇이고, 조산은 무엇인가? 안산은 바로 코앞에 밥상처럼 놓여 있는 산을 가리키고, 조산은 안산보다 더 멀리 있는 산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할아비 조(祖) 자를 쓰는 조산(祖山)은 무엇인가? 할아비 조를 쓰는 조산은 뒷산이자 뒷산에서 내려오는 산맥을 가리킨다. 함양은 덕유산(남덕유산 포함)이 조산(祖山)에 해당하고 지리산이 조안산(朝案山)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 터가 오래가는 장수의 터냐, 아니면 짧게 반짝하다가 마는 단명의 터냐 하는 문제는 뒷산인 조산(祖山)의 형태가 구불구불 길게 내려왔는가가 결정한다. 반면에 부와 귀는 대체적으로 앞에 놓여 있는 안산과 조산(朝山)이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풍수가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함양은 뒷산인 덕유산 자락보다 앞에 놓여 있는 지리산이 더 높고 크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물들이 안에 있는 인물들보다 더 크고 비중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함양군수를 지냈던 최치원 같은 인물이다. 최치원뿐만이 아니다. 역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함양에 들어와 살았다. 그러다 보니 함양은 조선시대 선비의 고장이라고 여겨졌다. 경상도에서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 경상좌도에서는 안동에 인물이 많고 경상우도에서는 함양에 인물이 많다는 말이다. 함양은 외부에서 큰 인물들이 들어와 살기 좋은 터라는 이야기도 된다. 풍수라는 것이 미시적으로는 검증하기 어렵고 황당하게 여겨지는 담론체계이지만 시간을 수백 년, 수천 년 단위로 장기적으로 놓고 볼 때는 일리가 있다. 풍수야말로 망원경으로 놓고 보아야 하는 롱텀 플랜인 것이다.

함양은 도사들의 터미널

도사를 추적하는 필자 같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함양이 또 다르게 보인다. 사람은 자기 안경대로 사물을 보기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함양은 도사들의 터미널이었다. 터미널이 무엇인가? 티켓 끊는 곳이다. 고속터미널에 가면 행선지가 어디냐에 따라 각기 다른 티켓을 산다. 그리고 그 티켓에 따라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어 있다. 나는 함양에 들를 때마다 함양이 도사들의 터미널이라는 생각을 쭉 해왔다. 함양에서 보면 주위에 온통 명산들뿐이다. 함양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있다. 덕유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 덕이 풍부해서 여유로운 산이라는 의미지 않은가. 덕유산은 육과 골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는 산이다. 스테이크로 치면 미디엄쯤 된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이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옛날 같으면 함양이다. 함양군수로 오면 지리산 유람은 기본이었다. 함양 동북쪽으로는 합천 가야산이 있다. 가야산이 또한 어떤 산인가. 남한에서 골산을 대표하는 산이 가야산이다. 또 옆으로는 황매산도 있다. 해발 1000m급의 산들이다. 황매산은 대표적인 육산이기도 하다. 백운산도 있다. 백운산도 1000m급이다. 백운산 상연대 같은 터는 도선국사 이래 명당으로 손꼽혀왔던 터이다. 이 백운산이 함양 관내에 포진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가 하면 황석산도 있다. 황석산은 정상 부근이 바위 절벽으로 둘러싼 요새 지형이다. 임진왜란 때 황석산성 전투가 치열했었다. 일제 때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서 도망을 다녔는데, 그 도피생활 중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하늘에다 제사를 지낸 곳이 바로 황석산이다. 보통 산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거창의 금원산과 기백산도 바로 지척이다. 금색 원숭이가 산다는 금원산, 깃발처럼 뾰족한 바위산인 기백산도 보통 영발이 강한 산이 아니다. 이런 명산들이 함양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니까 도사 지망생 또는 중견간부급의 도사들이 여행을 하다가 함양에 머물면서 주변 명산들의 정보를 수집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어느 산에 어떤 도사가 요즘 초능력을 얻었다, 어디에 산삼이 많이 나온다, 어디서 누가 호랑이에 물려 죽었다 등등의 정보가 함양에 모인다. 도사들은 몇 달 함양에 머무르면서 이 정보들을 토대로 자기가 들어가 수도할 산을 선택하였다. 함양에 있으면 주변 백리안에 있는 명산들의 정보가 총집결하였던 것이다. 도사들도 한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 함양에 모여 있다 보면 도사들끼리 서로 간에 정보교환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북의 묘향산에서 몇 년 살아 보았는데 물산이 어떻고 중국에서 넘어오는 도사들도 있더라!” “오대산의 중대는 과연 명당이더라, 거기에서 석 달만 살아도 기운을 확실히 받는다” “금강산은 차력과 축지를 하는 고단자가 많더라. 금강산에서 내가 축지법을 쓰는 어떤 도사를 만나서 건봉사까지 몇 시간 만에 다녀오곤 하였다” 등등 경험담을 서로 교환하는 장소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니까 터미널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영각사의 문필봉 기운을 상징하는 구광루. 불경을 찍어내고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영각사의 문필봉 기운을 상징하는 구광루. 불경을 찍어내고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신라·백제 사신의 협상터

영각사가 자리 잡고 있는 함양군 서상면은 또한 지정학적 위치가 남다르다. 서상면은 함양 전체에서 보았을 때 서북쪽에 붙어 있는 위치이다. 지금은 도로가 뚫려서 느낌이 사라졌지만 옛날에 걸어다니던 시절에는 아주 오지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육십령 고개 아래에 있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육십령은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9m) 사이에 움푹 꺼져 있는 지점이라서 사람들이 넘나들 수 있는 고갯길이 일찍부터 성립하였다. 육십령 고갯길은 해발 730m이다. 조령이 643m이고 죽령이 689m, 남원의 팔랑치고개가 513m이다. 죽령과 조령은 경상도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넘어가는 고갯길이고 육십령과 팔랑치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올 때 거쳐야 하는 고갯길이었다. 대표적인 4개의 고갯길이다. 이 4개의 고갯길 가운데 가장 높은 고갯길이 바로 육십령이다. 경상도 함양 서상면과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을 넘어 다니는 고개이다.

이름도 특이하다. 왜 육십령인가? 옛날부터 이 고갯길에는 도적 떼가 많이 살았다. 그만큼 산세가 깊고 험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고개를 넘어가는 보부상 또는 행인들의 봇짐을 터는 도적들이 상주해 있었다. 산적들로부터 자기 봇짐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떼를 이루어 고개를 넘어가는 방법이 안전하였다. 적어도 60명 이상이 떼를 이루어 이 고개를 넘어가야만 안전하였다고 해서 고개 이름이 육십령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고갯길이지만 과거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이었다. 백제와 신라가 섞이는 지역이었고, 조선시대 이래로 전라도와 경상도 문화가 섞이고 교류하는 지역이었다. 예를 들면 전북의 장수군 출신이었던 논개가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 가서 왜장을 껴안고 같이 죽는다. 이 논개의 무덤이 현재 함양군 서상면 방지(芳池) 마을에 있다. 육십령을 사이에 두고 생가터와 무덤이 각각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함양군 서상면의 영각사도 신라, 백제의 사신들이 서로 만나서 의견을 조율하던 장소였다고 전해진다. 영각사 터를 들어섰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문필봉이다. 화엄전 건물 뒤로 문필봉이 아주 또렷한 형태로 뒤를 받치고 있다. 붓의 끝 지점은 약간 뭉툭하다. 붓의 끝에다가 먹물을 찍어 놓은 형태와 같다. 이 문필봉의 해발을 주지인 덕일(德一·60) 스님에게 물어보니까 1200m라고 한다. 남덕유산의 지맥이 내려와서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 사상을 총집합시킨 화엄사상의 정수를 모아 놓은 화엄전(華嚴殿) 건물이 바로 이 문필봉 아래에 정확하게 포진해 있다.

화엄경 목판을 영각사에 보관한 이유

문필봉이라고 다 같은 문필봉이 아니다. 약간 기우뚱한 문필봉도 있고, 끝이 섬세하냐 아니면 두루뭉실하냐에 따라 그 터에서 배출되는 문장가나 학자의 붓끝이 예리하게 작동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영각사 뒷산의 문필봉은 아주 정확하면서도 반듯한 문필봉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다가 앞산에 또 하나의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다. 영각사 앞으로 조산이 보이는데 그 이름이 계관산(鷄官山)이다. 이름하여 ‘닭 벼슬봉’이다. 계관산은 ‘v’ 자 형태의 홈이 파여 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닭 벼슬같이 생겼다. 벼슬의 원형은 닭 벼슬이다. 닭 벼슬이 있으면 그 터에서 벼슬이 많이 나온다고 본다. 요즘 같으면 시험 합격이다. 고시공부나 명문대학 합격 같은 기도를 하면 효험을 볼 수 있다. 서울 관악산 연주대가 닭 벼슬 위에 얹혀 있는 암자인데, 영각사 앞으로 멀리 보이는 조산(朝山)이 바로 계관산이다. 이 계관산의 ‘v’ 자 홈의 왼쪽 부분이 아주 뾰쪽한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문필봉이다. 문필봉 중에서도 급수가 높은 재상필봉(宰相筆鋒)으로 보인다. ‘재상필’은 문필봉이 크지 않고 작게 보이면서도 아주 단단하고 야무진 삼각형의 모습이 해당된다. 조선조 황희정승 선조묘 앞에 재상필이 보이는데, 이 재상필봉 때문에 손자가 정승이 되었다고 풍수가에서는 전해진다. 그러한 형태의 재상필이 영각사 앞에 멀리 보이는 계관산의 왼쪽 바위 봉우리 모습이다.

자, 그렇다면 영각사 앞뒤로 이처럼 잘생긴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으면 어떤 터가 되는 것인가? 어떤 영험이 있단 말인가? 이 터는 합격 기도발도 작동하지만 석학 또는 대학승이 거처할 만한 곳이다. 영각사는 874년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되었다. 심광(心光·深光) 대사라는 분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쭉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설파상언(雪坡尙彦·1707~1791)이라는 고승이 주석하였다. 설파상언은 대학승이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승이기도 하다. 특히 화엄학에 정통하였다고 전해진다. 설파상언은 전북 고창 출신이었는데, 그가 주로 머물렀던 절이었다. 본인이 열반할 때도 이 영각사에서 했다. 그만큼 자신의 취향에 맞았던 터가 영각사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설파상언의 부도가 남아 있는 곳은 전북 순창의 구암사이다. 구암사 터도 또한 문필봉이 빼어난 터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구암사에는 대학승으로 유명했던 백파긍선과 설파상언의 자취가 남아 있고 부도탑까지 있다. 함양 영각사와 순창 구암사가 모두 문필봉의 기세가 뛰어난 도량이고, 이 문필봉 도량에 당대의 석학 스님 유적이 남아 있는 셈이다. 설파상언은 당시 화엄경판이 보존되어 있던 낙안의 징광사 판각이 화재로 소실되자, 복원사업을 벌여서 완성한 화엄경 목판들을 영각사에다 보관하였다. 영각사에 장경각을 세워서 어렵사리 많은 예산을 들여 판각한 화엄경 목판을 보관하였던 것이다. 왜 영각사에 보관하였을까. 그만큼 이 영각사가 화재에 안전하고 깊숙한 지점이라서 외부의 침탈 변수가 적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문필봉이 빼어난 터라는 점도 고려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터가 좋은 곳은 물맛도 좋다. 영각사의 물은 부드럽고 맛이 좋다.
터가 좋은 곳은 물맛도 좋다. 영각사의 물은 부드럽고 맛이 좋다.

문필봉 밑에서 불경 찍어내

그러나 아무리 명당이라도 역사의 참화를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6·25전쟁과 빨치산 토벌 때 영각사의 많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 지금 절 앞에 서 있는 구광루(九光樓)이다. 시커먼 색깔의 목조 2층 건물이다. 목조 건물이 2층으로 건축된 경우는 드물다. 이 구광루는 처음 보는 순간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목조 건물로서 고풍이 어려 있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신식 느낌도 묻어난다. 덕일 주지스님에게 물어보니 1911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상량문에 ‘開國 520년’이라고 써 있습니다. ‘開國(개국)’이라는 글자를 당시에 함부로 쓸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개국이란 조선왕조 개국 520년이란 뜻입니다. 1910년에 일제와 병합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상량문에 ‘개국’이란 글자를 삽입한 배경에는 당시 영각사 스님들의 자존심과 항일정신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구광루를 지은 것도 영각사 스님들이었으니까요.”

영각사의 문필봉 기운을 상징하는 건물은 현재 구광루이다. 이 건물의 용도는 불경을 찍어내고 목판을 보관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출판과 도서관의 기능을 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영각사 스님들이 보기에 절터 앞뒤로 문필봉이 포진한 장소에 책을 펴내는 건물을 짓는 것이 여러 가지로 합당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스님이기에 앞서 대석학이었던 설파상언이 영각사에 장경각을 세웠던 전통을 계승한 건물이기도 하였다.

영각사 터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물이다. 경내의 네모진 석조에 물이 철철 넘친다. 나는 절에 가면 물맛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물맛이 좋아야 도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은 매일 먹어야 하는 액체이다. 각종 미네랄이 많이 함유된 물을 마시고 건강이 유지되어야 도를 닦는다. 이 영각사 물은 부드럽고 맛이 좋다. 퀄리티 있는 삶이란 좋은 물을 먹고 좋은 공기를 마시는 일이다. 영각사 물을 매일 마실 수 있으면 이 또한 멋진 일이다.

주지스님과 인사를 하고 영각사 정문을 나서는데 앞으로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 “투구봉이라고 부릅니다”라는 대답이다. 산꾼들은 이 암봉을 칼날봉이라고 부른다. 이 투구봉을 시작으로 해서 월봉, 거망산, 황석산의 1000m급 영봉들이 용의 등줄기처럼 계속해서 이어진다. 온통 신령스러운 영봉들로 둘러싸인 함양 영각사. 그 영봉들에 깃들어 있는 산신령이 나에게 말을 건다. “왜 이제야 산에 왔니?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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