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이다. 예전만은 못해도 어디를 가나 양념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김치야말로 우리의 대표적인 소울푸드다. 그래서 김치는 으레 태곳적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아삭한’ 김치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아삭한 김치를 만들려면 아삭한 무와 배추가 있어야 한다. 그런 무와 배추를 우리에게 처음으로 선사한 인물이 우장춘(1898~1959)이다. 그는 격동기에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하고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 세계적인 육종학자다. 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나 기록은 의외로 적다. 그저 엉성한 아동용 위인전이 대부분이다.

이런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그의 삶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해 본 것이 바로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나의 조국’(わが祖國·1990)이다. 이 책은 한·일 두 나라에 걸쳐 광범위한 자료 조사와 주변인 취재를 바탕으로 쓰인 우장춘 일대기다. 아울러 저널리스트인 이영래의 ‘우장춘의 마코토’(2013)를 곁들여 보면 그의 진면목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

우장춘의 아버지는 우범선이다. 그는 개화기의 중인 출신 군인 장교였다. 친일 개화파인 그는 명성황후 시해 당시 자신의 휘하 병사를 이끌고 현장에 출동했다. 그가 내막을 모른 채 일본 측 요청으로 단순히 군대를 움직였을 뿐인지, 실제로 사건 내막에 깊숙이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이로 인해 그는 시해사건의 중대한 연루자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했다.

당시 친일 개화파란 개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던 세력이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의 개화를 순수하게 지원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실제로 재산을 탕진해가며 조선 망명객을 도운 사람도 없지 않았다. 우범선을 도왔던 일본인도 우장춘을 돌봐주고 후견인까지 되어주었다. 하지만 한일병합으로 치달으며 친일 개화파는 대부분 친일파로 변질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범선은 ‘국모를 시해한 친일 반역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여전히 혁명지사로 대우받았다. 귀국이 난망하다고 여긴 그는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우장춘을 낳았다. 하지만 우범선은 우장춘이 5세 때(1903년) 고영근에게 살해되었다. 가정은 엉망이 되고 유복자로 동생이 태어났다. 우장춘은 한동안 절에 맡겨지기도 했다.

한일병합은 얄궂게도 우장춘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친일 개화파 출신인 박영효의 주선으로 그는 총독부의 ‘조선인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총독부는 그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 진학을 주선했다. 실과(實科)는 말 그대로 실무 교육을 통해 주로 농촌지도사를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1916년 그는 ‘조선인 유학생’ 자격으로 실과에 진학했다.

1919년 그는 과정을 마치고 그를 눈여겨본 교수의 주선으로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들어갔다. 당시 시험장은 선망의 직장이었다. 이듬해 그는 기수(技手) 직급을 받았다. 1924년 그는 초등학교 교사인 일본인 여성을 만나 어렵사리 결혼을 했다. 한편 그는 농사시험장에서 유채종자과의 책임자가 되어 뛰어난 업적을 쌓으며 두루 신망을 얻었다.

1930년 가을 그는 나팔꽃의 유전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여 제출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험장 본관에 화재가 발생하여 박사논문에 관한 모든 자료를 잃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1935년 그는 ‘종의 합성’에 관한 논문을 제출해, 이듬해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 취득 소식은 국내 신문에도 대서특필되었다.

그는 양배추와 재래유채를 교배하면 서양유채가 얻어진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처럼 삼자 간의 세포학적 관계를 밝힌 그의 연구는 ‘종의 합성’ 또는 ‘우장춘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며, 인공교배를 통해 새로운 식물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밖에도 그는 다양한 업적을 쌓았지만, 시험장에서 고등관 직급인 기사(技士)로 진급하지 못했다.

1943년 8월 그가 사직하자 시험장은 그를 기사로 발령냈다. 단 하룻동안 기사였던 그는 다키이종묘회사의 시험장 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종전이 되자, 조선에 토지가 있던 회사는 그에게 조선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1945년 9월 회사를 떠났다. 이후 4년여 동안 야인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때 마침 부산 동래 출신 유명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비록 야인이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일본에서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노모와 아내와 2남4녀가 딸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심 끝에 가족을 놔두고 홀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1950년 3월 부산에 도착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동래 출신 유명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추진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에는 그곳 출신의 유명한 친일파 인사도 끼여 있었다. 아마 그가 우장춘 환국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고 한 의도도 없지 않았다고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이승만 측근 행세를 하면서 한국은행 초대 총재를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해 5월 우장춘은 동래에서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열었다. 직원은 고작 10여명이었다. 서울로 올라가 이승만 대통령과도 면담했다. 그러나 곧바로 6·25전쟁이 터졌다. 그는 얼마든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묵묵히 실험농장을 지켰다. 그의 우선적 목표는 채소의 우량한 고정품종을 만들고 그 종자를 대량생산하여 농민들의 손에 쥐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한·일 두 나라의 종자 간 인공교배를 통해 ‘아삭한’ 배추와 무를 개발했다. 1955년 드디어 새로운 종자가 대량생산되어 보급을 시작했다. 그밖에도 그는 제주에 밀감을 심도록 독려하고, 강원도 고랭지에서 씨감자 생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육종학의 기반이 전무한 신생독립국에 그는 말 그대로 육종학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많은 전문 인력을 길러냈다.

그는 농림부 장관직 제의를 뿌리치고 자신의 영역을 떠나지 않았다.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 원장, 1958년 원예시험장장을 거쳐 1959년 영면했다. 그는 평생 “일본은 어머니 나라이고, 한국은 아버지의 나라다”라고 말하며, 한국 생활 9년여 내내 일본어만 고집했다. 당시 혼탁한 세파로부터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켜내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그는 병상에서 문화포장을 받고는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고 오열했다. 그는 경기도 수원 원예시험장 뒷산에 묻혔다.

그의 뛰어난 업적과 국민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점은 그에게 주홍글씨였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를 반역자라고 생각한 흔적은 없다. 또한 일본에서 나서 자라면서 특별히 민족의식을 드러낸 적도 없다. 자신만 한국에 왔을 뿐, 가족은 그대로 일본인으로 살도록 했다. 그럼에도 그는 말년에 9년 동안 대한민국에 묵묵히 헌신했다.

이처럼 우장춘은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인 문제적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그를 배척했다면 우리는 커다란 유익을 스스로 걷어찰 뻔했다. 오늘날 ‘시퍼런’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영락없는 친일파다. 무엇보다 총독부 장학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이 우리에게 맛있는 김치를 선사했다. 우리가 매일 즐기는 김치에도 이런 험난한 역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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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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