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수도 사나 인근 하라즈 지방의 커피 농장에서 농부들이 커피를 수확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예멘 수도 사나 인근 하라즈 지방의 커피 농장에서 농부들이 커피를 수확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리모컨에 새겨진 숫자 5번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다른 번호들과 달리 5번 위에만 입체적으로 돌출된 작은 요철이 새겨져 있다. 시각장애인용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리모컨 5번의 비밀이다. 연령, 성별, 국적,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1963년 영국에서 고안된 게 5번 요철이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왜 입체적 돌출이 1이나 0이 아닌 5에 찍혔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 10개의 디지털 숫자 가운데 자리 잡은 것이 5이기 때문일 것이다. 손가락 감각으로 5의 돌출을 느끼는 순간, 옆에 늘어선 다른 숫자도 감지해낼 수 있다. 따라서 5번 요철은 다른 9개 숫자를 안내해주는 창문에 해당한다. 눈을 감고 있더라도 5번만 찾아내면 바로 옆의 숫자를 더듬어 원하는 채널을 조합해 낼 수 있다. 리모컨 속의 또 다른 리모컨이 5번 요철의 정체일지 모르겠다.

제대로 눈을 뜬 채 세상을 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자기만의 우물과 골목에 안주하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외눈박이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리모컨 5번의 돌출 디자인은 시각장애인만이 아니라 두 눈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도 필요한 ‘중용의 메타포(metaphor)’로 느껴진다. 마음속의 5번을 통해 나머지 세계의 조화와 순리를 파악할 수 있는 균형점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모카항을 통해 퍼져나간 예멘 커피

예멘 커피는 리모컨 5번에 비견될 수 있는 필자의 가슴속에 새겨진 ‘중용의 메타포’ 중 하나다. 전 세계 모든 커피를 가늠할 수 있는 균형점 또는 기준점이 바로 예멘 커피이기 때문이다. 리모컨 숫자 5를 기준으로 채널을 조합해내듯, 예멘 커피를 통해 다른 커피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해진다. 당연하면서도 원칙적인 얘기지만, 커피는 혀의 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감을 통해 인류 문화와 문명사를 압축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대상이 커피다. 글로벌 시대의 상징인 스타벅스의 쿨한 크리스마스 컵 이전에, 인류가 추구해온 가치와 역사가 커피 한 잔에 배어 있다. 거창하게 들릴 듯하지만, 필자에게 있어 예멘 커피는 그 같은 ‘총체적’ 문화·문명의 길라잡이다.

예멘 커피가 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카(Mocha) 커피라고 하면 어떨까? 예멘 커피는 몰라도 모카 커피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둘 다 같은 의미다. 예멘 커피를 대표하는 수출 항구가 바로 모카이기 때문이다. 아라비아반도와 아프리카대륙 사이 홍해 입구에 접한 항구, 고대 이래 예멘을 지켜온 수출항이 바로 모카다. 예멘 커피는 항구 모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따라서 커피에 관한 한 ‘예멘=모카’라 불러도 된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예멘 커피는 버섯 세계의 흰송로버섯(white truffle)과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커피 세계의 최고봉이라 말해도 좋다.

예멘 커피의 출발점은 신화와 전설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시바의 여왕이다. 기원전 10세기 인물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멘의 통치자다. 유대 지혜의 상징인 솔로몬 왕을 찾아간 신비로운 존재로 알려져 있다. 시바가 부딪힌 수많은 난제에 대해 솔로몬은 전부 지혜롭게 답한다. 감동한 시바는 향료, 금, 보석을 솔로몬에게 바친 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시바 스토리는 성스러운 솔로몬을 찬양하고, 일신교인 유대교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듯, 신과 신의 대리인인 왕은 전부 남성이다. 여성이 왕이라는 것 자체가 유대 세계관에 어긋난다. 여성 시바에 대한 남성 솔로몬, 예멘의 잡신에 대한 유대의 남성 유일신에 관한 교훈이 시바 스토리의 배경에 있다.

시바의 전설 타고 인기 상품으로

시바 스토리는 성(聖)만이 아닌 속(俗)의 얘기로도 통할 수 있다. 예멘이란 신비한 나라를 배경으로 한 여성 에로티시즘이다. 남성의 본능적 상상력을 자극할, 신비한 나라의 아름다운 여성에 관한 이국적 로망인 셈이다. 향료, 금, 보석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여왕은 속의 세상에서 통할 최고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예멘 커피는 그 같은 성과 속이 뒤섞인 땅에서 탄생한 신비한 부산물로 여겨졌을 법하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예멘 커피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다. 예멘 커피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5세기 이후다. 커피만이 아니라 21세기 인간이 향유하는 기호품의 대부분은 15세기 말 신대륙 발견 이후에 등장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부분적으로 교역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양적·질적으로 5대양 6대륙을 오가며 이뤄진 글로벌 특산물의 교류는 15세기 이후부터다.

시바 스토리는 예멘 커피를 대항해 시대의 인기 상품으로 만든 주역이다. 시바가 솔로몬에게 바쳤다는 향료 중 하나가 커피였을 것이란 가설이 대항해 시대에 퍼져나갔다. 성경 속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예멘 커피가 대대손손 예멘에 존재했을 것이란 추론은 가능하다. 향료는 신을 찬미하기 위한 기본 소재다. 예수 탄생 당시 동방 3박사가 가져온 선물 가운데 2개가 향료다. 좋은 냄새는 정신적·육체적 차원의 정화(淨化)로 이어질 수 있다. 향료와 더불어 혀와 정신을 자극하는 커피도 솔로몬에게 전해진 선물 중 하나였을 것으로 다들 믿었다. 예멘 커피는 ‘솔로몬의 지혜에 감동한 시바의 선물’로서 15세기 이후 세계를 풍미한다.

예멘 커피의 정수는 예멘 현지에 가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이 그러하듯, 천국은 닫혀 있다. 예멘은 최근 5년간 내전 상태에 빠져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리전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인구 2800만명인 나라 전체가 총성으로 뒤덮인 상태다. 예멘 커피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0여년 전 오스트리아 빈의 커피점에서였다. 우연히 만난 50대 독신여성의 예멘 커피 예찬론을 통해 시바의 커피가 유럽 역사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빈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이 호시탐탐 노렸던, 유럽 기독교권 최전선 방어기지였던 곳이다. 예멘 커피는 16세기 이슬람의 오스만투르크제국이 빈 전체를 포위 공격할 당시 갖고 온, 오스만투르크제국 지도부 최고의 기호품이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예멘은 물론, 중동과 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한 세계 최대 제국으로 군림했다. 21세기 빈이 자랑하는 수많은 커피의 출발점은 500여년 전 오스만투르크가 갖고 온 이슬람 전사용 기호품에서 시작됐다.

터키의 고도 가지안테프의 커피 원두 가게. 예멘 커피의 절반 정도가 터키로 수출된 뒤 다시 중개무역을 거쳐 유럽이나 서방으로 팔린다. ⓒphoto 유민호
터키의 고도 가지안테프의 커피 원두 가게. 예멘 커피의 절반 정도가 터키로 수출된 뒤 다시 중개무역을 거쳐 유럽이나 서방으로 팔린다. ⓒphoto 유민호

보통 커피보다 수배 비싼 예멘 커피

빈에서 만난 여성을 통해 알게 됐지만, 당시 오스만투르크가 갖고 온 수많은 커피 가운데 예멘 커피가 신의 선물로 통했다고 한다. 시바의 전설이 깃든, 솔로몬 영광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예멘 커피에 대한 기억은 이후 잠시 사라졌다가 5년 전부터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터키 여행이 잦아지면서 예멘 커피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굴, 발견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멘 커피는 귀하다. 생산량도 적지만, 2015년 이래 계속된 내전으로 그나마 외국으로 수출되는 커피도 극소량에 그친다. 고맙게도 터키는 희귀한 예멘 커피를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지역 중 하나다. 오스만투르크에서부터 시작된 커피 수입경로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멘 커피의 대부분은 현지에서 소비된다. 남은 절반 정도가 터키로 수출된 뒤, 다시 중개무역을 거쳐 유럽이나 서방으로 전해지는 식이다. 보통 터키에서 거래되는 커피 원두는 1㎏에 10달러 정도다. 예멘 커피는 1㎏에 최하 20 달러 선에서 거래된다. 그렇게 큰 차이가 없지만, 서방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2017년 6월 블룸버그 뉴스에 따르면, 1㎏에 500달러 선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전쟁도 계속되고 있고, 3년이나 지난 지금 기준으로 하면 1㎏당 1000달러 선에 육박하지 않을까 추정된다. 부르는 게 가격인 셈이다.

가지안테프(Gaziantep)는 예멘 커피를 즐길 최적의 공간이다. 내전 중인 예멘 현지를 제외할 경우, 예멘 커피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고대도시가 가지안테프다. 이스라엘,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 도시로, 기원전 2000년 히타이트 시대 때부터 번성했던 곳이다. 예멘 커피는 바다와 육지를 거쳐 북쪽으로 수출되는 과정에서 가지안테프의 풍경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차이가 1리라, 예멘 커피는 10리라

터키의 대중 음료는 차이(Cay)다. 홍차를 약을 달이듯 푹 끓여서 마시는 차다. 커피는 차이에 비해 비싸고 만들기도 까다롭다. 걸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커피를 분말로 만든 뒤 끓는 물과 함께 달여 마시는 커피가 주류다. 이른바 터키식 커피로, 카페인을 100% 그대로 흡수하는 강한 맛의 음료다. 이스탄불에서 예멘 커피는 특별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매니아용 음료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동쪽 끝, 가지안테프에서는 다르다. 예멘 커피가 도처에 널려 있다. 가짜는 없다. 전부 예멘산 정품이다. 가지안테프 구석구석을 뒤지며 예멘 커피와 대면했다. 예멘 커피를 찾는 아시아인은 처음이라는 얘기를 곳곳에서 들었다.

음료는 터키, 나아가 이슬람 문화의 정수이자 핵심 소재에 해당한다. 차나 커피 한잔을 통해 인간의 품과 격을 교환하고 향상시켜 나간다. 따라서 차,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이 엄청 길다. 예멘 커피 한잔 시켜 놓고 보통 1시간 이상씩 떠든다. 원두 자체가 비싸지만, 예멘 커피는 터키에서도 고가의 대명사다. 보통 차이가 1리라 수준인 데 비해 예멘 커피는 10리라 정도다. 지식인, 종교인, 대학생의 기호품으로 통한다.

예멘 커피의 특징은 달콤한 산미와 중독성 강한 향에 있다. 세계를 석권한 아라비아 커피의 원조로, 원래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에티오피아 커피가 총론으로서의 ‘대륙의 맛’이라면, 예멘은 각론으로서의 ‘반도의 맛’이라 할 수 있다. 대륙보다는 반도가 섬세하고 예민하다. 엑기스 상태로 워낙 강한 맛이기 때문에 먼저 물을 한잔 마시고 맛을 봐야 한다. 입안에 남은 커피 원두의 쓴맛을 지우기 위해 커피를 마신 후 초콜릿이나 작은 아몬드로 입안을 헹궈야 한다.

가지안테프는 15세기 이후 굳어진, 터키 일상생활 속의 커피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타임슬립(Time Slip)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실크로드 흔적인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와 한(Han)이 주된 무대다. 카라반세라이는 카라반(Caravan·장사꾼 여행객)과 세라이(Saray·궁전)를 합친 말로, 장사꾼을 위한 호텔이란 의미다. 여행자용 호텔로 도심 밖에 있는 것이 카라반세라이, 도심 안에 있는 것이 한으로 표현된다. 가지안테프 중심 상가 지대로 가면 약 10개의 크고 작은 여행자용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과거 실크로드 여행자용 호텔을 개조해 음식점이나 찻집으로 활용하고 있다. 500년 전 실크로드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가지안테프의 카라반세라이. 과거 실크로드 여행자용 호텔로 활용되던 곳에서 예멘 커피를 판다. ⓒphoto 유민호
가지안테프의 카라반세라이. 과거 실크로드 여행자용 호텔로 활용되던 곳에서 예멘 커피를 판다. ⓒphoto 유민호

카라반세라이에서 나눠 마시는 커피

커피는 타임슬립 공간에서 즐기는 최상의 기호품이다. 실크로드 당시 분위기로 돌아가 마시는 예멘 커피는 특별한 예법 하나를 필요로 한다. 의자가 아닌 땅바닥 카펫에 앉아 모두 함께 나눠 마시는 식의 문화다. 마치 음식을 나눠 먹는 기분으로 커피를 모두에게 나눠 주면서 함께 마신다. 무슬림 모두에게 평등한, 신의 선물로서의 커피인 셈이다. 알라에게 바치는, 기도에 앞서 행하는 집단의식이 커피 문화의 기원이다. 종이컵 하나하나에 나누어 주는 커피가 아니다. 큰 대접에 수프처럼 끓여서 청동잔에 나눠 마시는, 평등이자 예의로서의 커피다. 예멘 커피는 그 같은 예법의 최정점에 선, 인류가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자 증거였을 듯하다.

우아하고 격조 높은 일상의 기호품으로 커피만 한 것이 있을지 의문이다. 비교적 싼 데다 풍부한 풍미가 커피를 예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오감은 물론, 역사와 종교 그리고 전 세계의 풍광이 드리워진 ‘작은 원두’를 찬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핵심은 나만의 색깔에 있을 듯하다. 무슨 향료와 맛으로 토핑된 똑같은 맛과 멋의 성형 커피가 아니다. 나만의 역사와 색감, 기억으로 만들어진 나만의 커피가 답이다. 리모컨 숫자 5를 통해 나머지 채널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해 나갈 수 있듯이 예멘 커피 한잔만으로도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과 절규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재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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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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