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미상. ‘상산사호(商山四皓)’. 비단에 색. 63×32㎝. 조선민화박물관
필자미상. ‘상산사호(商山四皓)’. 비단에 색. 63×32㎝. 조선민화박물관

한 생을 전투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믿는 신념과 노선을 따라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직진한다. 노선을 정하면 오히려 처신하기가 쉽다. 앞뒤 잴 것 없이 자신이 정한 원칙대로 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노선에 맞는 사람이면 무조건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 편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그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내 편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포용이 된다. 다른 이유가 없다. 내 편이니까 그래도 된다. 자신의 노선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 무조건 안 된다. 아무리 그의 견해가 옳고 타당하더라도 일단 배제하고 본다. 옳은 줄은 알지만 내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오로지 내 편인가 아닌가의 잣대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래서 아주 편협하다. 그런 태도가 조금 더 심해지면 모든 사람을 아군인가 적군인가로 편가르기한다. 자기 스스로는 매우 선명한 사람이라고 자평하면서 말이다. 본인만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과연 오류가 없을까. 아니면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지금은 노선을 정할 때 진보냐, 보수냐로 따지지만 조선시대에는 유가(儒家)인가, 도가(道家)인가로 따졌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가 유가인지 도가인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좋아했던 중국의 상산사호(商山四皓)는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다. 그는 분명히 도가 계열의 사람인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유가의 자세를 지켰다. 상산사호야말로 특정한 노선을 고집했다기보다는 필요에 따라서 상황에 맞는 이념을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네 명의 노인, 상산에서 바둑을 두다

네 명의 노인이 바둑판 곁으로 모였다. 그들 위로는 차양처럼 소나무가 서 있다. 두 명의 프로 바둑기사가 대국을 펼치는 가운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손까지 뻗어가며 훈수를 둔다. 뒷짐 지고 서 있는 노인은 영지버섯을 따러 가야 하는데 본분을 잊고 구경만 하고 있다. 프로들끼리의 대결이라지만 그 실력을 공식적으로 검증받아 본 적이 없으니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훈수 두는 사람이 답답해할 정도로 경기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수준 높은 고단자들의 대국은 아닌 듯하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대국에 임하는 기사들의 마음가짐은 입신의 경지인 9단에 버금갈 정도로 진지하다.

‘상산사호’는 ‘상산의 네 노인’을 그린 작품이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앉거나 서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한다. 네 명 모두 노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노인은 노인인데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들이다. 호(皓)는 희다는 뜻이다. 흰 수염을 길게 길러야 노인 분위기가 나지 요즘처럼 면도를 말끔하게 해버리면 그 맛이 사라진다. 눈썹과 수염이 하얗고 수북해야 도인 같고 사호답다. 그렇다면 수염과 눈썹이 희다는 것은 강조하면서 왜 머리카락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을까. 그 이유는 나중에 살펴보겠다. 상산사호는 실존 인물이지만 거의 도인이나 신선급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그림에서는 그 콘셉트에 맞게 그려진다.

상산은 산시성(山西省)에 있다. 상산은 평범한 산이었지만 눈썹과 수염이 허연 노인 네 명이 그곳을 아지트 삼아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들은 왜 멀쩡한 집을 놔두고 입산했을까. 춘추전국시대는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통일된 후 막을 내렸다.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던 나라들이 진나라의 창칼 아래 무너지고 흡수통일되는 과정에서 처참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을 것이다. 상산사호는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난리를 피해 상산에 들어가서 숨어 살았다.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도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를 피해 무릉도원에 들어간 사람들이 모티브가 되었다. 진나라의 무력통일이 그만큼 강한 피바람을 일으켰을 것이다. 아무튼 네 명의 노인들은 뭉뚱그려 상산사호라는 그룹명으로 불리지만 각각의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름은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각리선생(角里先生)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네 명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냥 상산사호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영지버섯을 캐며 불렀다는 다음과 같은 ‘자지가(紫芝歌)’가 지금까지도 전한다. “색깔도 찬란한 영지버섯이여, 배고픔을 충분히 달랠 수 있지. 요순의 시대는 멀기만 하니, 우리들이 장차 어디로 돌아갈 거나. 고관대작들을 보게나, 얼마나 근심이 많은가. 부귀하면서 사람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빈천해도 내 뜻대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曄曄紫芝 可以療飢 唐虞世遠 吾將何歸 駟馬高蓋 其憂甚大 富貴之畏人 不如貧賤之肆志)”라는 구절이 나온다. 빈천해도 내 뜻대로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은자들이 입산을 결심한 이유일 것이다. 자발적인 빈천을 실천하기 위해 입산하면서 부른 ‘자지가’는 흔히 은자(隱者)의 노래로 알려지게 되었다.

상산사호에 관한 내용은 사마천 ‘사기’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처음 등장한다. 유후는 유방(劉邦)을 도와 진나라와 항우(項羽)를 무너뜨리고 한(漢)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량(張良)이다. 상산사호가 유방과 장량과 같은 시대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후세가’에는 사호가 상산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사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바둑 두기가 후대 사람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어느 순간부터 그림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상산사호’에는 노인들 주위로 두 마리 학이 내려앉고, 차 끓이는 동자까지 등장한다. ‘유후세가’에는 바둑 두기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사호가 차를 마셨다거나 학이 날아다녔다는 내용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구성요소들이 필요했을까.

전효진의 ‘조선시대 사호도 연구’에 따르면 상산사호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그려진다. 첫 번째는 상산사호가 모두 바둑에만 열중하는 위기상(圍棋像)을 그린 경우, 두 번째는 세 사람은 바둑을 두고 한 사람은 영지를 캐러 가는 위기와 채지상(採芝像)이 결합된 경우, 세 번째는 세 사람은 바둑을 두고 한 사람은 잠을 자는 위기와 수면상(睡眠像)이 결합된 경우다. ‘상산사호’는 첫 번째 유형에 속한다. 여기에 학과 차 끓이는 동자까지 가세했다. 유명인사의 바둑 대국에 학과 동자가 왕림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원래 바둑과 차는 은일자의 탈속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요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유행한 음다(飮茶) 풍속은 당(唐)대부터는 일상이 되었다. 일상에서 항상 일어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고 말하는 예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떤 일이 차 마시는 일이나 밥 먹는 일과 같이 자연스럽다는 뜻이니 그만큼 다반이 자주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활동을 거부했던 은일 처사는 다회(茶會)를 열어 술과 차를 대화의 도구로 활용했다. 다회는 문인들의 문화를 표현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고결한 인격을 지닌 선비의 청정한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문인들의 모임을 그린 문회도(文會圖)에는 거의 빠짐없이 차 끓이는 동자가 등장한다. 격조 있는 집안에서는 시동이 단지 잔심부름만 하는 정도 가지고는 모양이 빠진다고 여겼다. 요즘으로 치면 커피 바리스타의 실력에 따라 그 집 커피맛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상산사호’에서도 쌍계 머리를 한 나이 어린 바리스타가 풍로 앞에 앉아 열심히 부채질을 하며 차를 달이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고아한 취미생활을 반영한 모습이다.

바둑 두기도 마찬가지다. 바둑은 위진(魏晉)시대 이후부터 은거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여가생활의 표현이었다. 속세를 떠난 사람들의 대표적인 취미생활 네 가지는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 등의 금기서화(琴棋書畵)였다. 금기서화는 은거자들이 누릴 수 있는 풍류이자 여유로운 삶의 표현이었다.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바둑을 두는 것, 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대숲에 앉아 거문고를 타는 것, 때때로 흥이 돋으면 붓을 들어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이런 사치는 마음의 여유가 없고 바쁜 사람이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은거자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그림을 보면 속세를 떠나지 않은 고관대작들의 문회도에도 금기서화가 단골메뉴처럼 등장한다. 금기서화가 은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고관대작들의 금기서화에는 단서가 붙기 마련이다. 진짜 산에 들어간 은둔자는 소은(小隱)이고 저잣거리에 사는 자신들은 대은(大隱)이라는 말이다. 금기서화는 소은과 대은을 가리지 않고 고상한 문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최고의 취미생활이었다.

필자미상.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 종이에 색. 77.6×61.8㎝.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 종이에 색. 77.6×61.8㎝. 국립중앙박물관

상산사호 그리면서 장수의 염원 담아

그렇다면 학은 왜 등장할까. 학은 소나무와 함께 은거자의 절개를 상징한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제2의 인생을 청아하고 한가롭게 사는 것을 청복(淸福)으로 여겼다. 청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의 모습에는 고송과 백학 또는 사슴이 등장한다. 원래 사슴은 서왕모의 정원에 사는 동물이다. 그림에 사슴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곳이 신선들이 사는 선계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속세에 살면서 시시비비에 얽히는 삶을 버리고 솔바람 소리 들어가며 학이 날아다니고 사슴이 노는 모습을 보고 산다면 신선이 부럽지 않으리라. 아니 이미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상산사호’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의 허리에 호리병이 걸려 있는 것만 봐도 사호의 삶이 이미 신선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호리병은 신선들의 전유물이다.

상산사호는 수염과 눈썹이 흰 노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킬 뿐 흰 머리카락은 언급이 없다. 왜 그랬을까. 사호는 네 명 모두 대머리이기 때문이다. 머리털이 빠진 부위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네 사람이 똑같다. 전부 다 가운데 머리가 빠졌다. 나이 들어서 탈모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딘가 이상하다. 자연스러운 탈모가 아니라면 가운데 머리를 미는 것이 당시의 트렌드였을까. 아니다. 이것은 당시의 트렌드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윗머리가 대머리인 사람은 수노인(壽老人)이다. 수노인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노인성(老人星)의 화신이다. 수성노인, 남극노인, 남극노인성이라고도 부른다. 수노인은 민간에서 북두칠성을 믿는 칠성신앙과도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된다. 사람들은 수노인과 북두칠성을 보면서 축수를 기원했다. ‘수성노인’은 수노인의 머리가 기형적으로 위로 솟구친 대표적인 사례다. 마치 대머리가 크면 클수록 더 영험한 능력을 가진 신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수노인은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壽(수)’ 자를 들고 보여준다. 수노인은 사호처럼 허리에 신선들의 소지품인 호리병도 차고 있다. 대머리의 사이즈가 조금 차이가 나긴 하지만 ‘수성노인’과 ‘상산사호’의 도상이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뭔가 신비로운 힘이 있고 예사롭지 않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대머리로 그려진다. 청우를 타고 함곡관을 나선 노자도, 갈대잎을 타고 양쯔강을 건넌 달마대사도 대머리다. 어디 그뿐인가. 동방의 산타클로스인 포대화상도 대머리다. 탈모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다

상산사호도가 복을 비는 기복적인 용도로 그려진 것은 19세기 이후부터다. 그러나 원래는 네 명의 노인이 바둑을 두는 모습만 그린 심플한 구도였다. 상산사호의 존재감을 드러낸 사건 또한 기복적인 것과는 무관했다. ‘사기’의 ‘유후세가’에는 상산사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적혀 있다. 상산사호는 진나라의 폭정을 피해 입산했지만 한나라를 세운 유방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방이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방은 상당히 무식했고, 지식인들을 아주 싫어했다. 유방은 유생을 만나면 그들의 모자를 벗겨 오줌을 눌 정도였다. 상산사호에 대한 예우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노인의 노여움은 오래간다. 몇 마디 사과의 말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유방이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산속에서 지냈다. 그럴수록 상산사호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높아만 갔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유방은 태자 유영(劉盈)을 폐하고 자신이 아끼는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세우고자 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태후가 장량에게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읍소를 했다. 장량이 내놓은 대책이 바로 상산사호 ‘찬스’였다. 여후는 말 잘하는 선비에게 옥과 비단 등을 아끼지 않고 들려 보내 상산사호를 모셔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연회를 할 때 상산사호를 태자 곁에 앉게 했다. 황제가 아무리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고고한 은둔자들이 태자를 보위하다니. 그 이유를 묻는 황제의 질문에 상산사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태자를 두둔했다.

“폐하께서는 선비를 하찮게 여기고 욕도 잘하니 신들이 의로움에 욕을 먹지 않을까 하여 달아나 숨었습니다. 그러나 태자께서는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스러우시며 사람을 공경하고 선비를 아끼셔서 천하에는 목을 빼고 태자를 위해 죽지 않으려 하는 자가 없으므로 신들이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할 일을 마친 상산사호는 유유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것으로 ‘게임 끝’이었다. 유방은 천운이 태자에게 있음을 알고 결국 태자를 바꾸려던 마음을 접었다. 장량의 아이디어로 상산사호가 태자를 도운 이야기는 ‘태자우익(太子羽翼)’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익은 좌우에서 보좌하는 사람을 뜻한다.

속세를 떠난 은일자가 다시 속세의 일에 관여한 ‘태자우익’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으로 후대에 두고 두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은거가 도가적 태도라면, 입조(入朝)는 유가적 태도다. 상산사호는 은거자들이 아닌가. 한 가지 노선만을 굳게 지켜야 하는 사람이 상반된 태도를 보여도 되는 것인가. 논쟁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논쟁과는 별개로 상산사호는 모든 계층에서 두루 인기가 많았다. 왕실에서는 급할 때 태자를 도운 인물이라서 칭송받았고, 사대부 계층에서는 출처(出處)를 확실히 한 지조 있는 인물이라서 추앙받았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삶을 통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줘서 즐거움을 주었다. 또한 대머리에 호리병을 찬 영험한 도인이라서 더욱 열렬히 환영받았다. 각 계층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떠나 두루두루 환영받은 상산사호를 보면서 자기 노선이 아니면 일단 적으로 돌리는 사람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권한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