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표 작가의 ‘인스턴트 풍경-검질#7’(Instant Landscape-Gumgil#7)
김남표 작가의 ‘인스턴트 풍경-검질#7’(Instant Landscape-Gumgil#7)

인생 오십 고개 앞에 서면 겸손해진다. ‘순간적 풍경’을 주제로 그려온 작가 김남표(50),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작 ‘기적’을 만든 영화감독 민병훈(51), 전시기획자 김윤섭(51) 아이프미술경영연구소 대표도 그랬다. 치열하게 달려왔던 세 남자도 50이라는 숫자가 인생을 중간점검하게 만들었다. 민병훈 감독은 얼마 전 부인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고, 김윤섭 대표는 암이라는 강적을 만나 싸웠고, 김남표 작가는 예술과 삶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지쳐 있었다. 2년여 전 겨울이었다. 부인 요양차 제주로 내려와 살던 민 감독의 집에 오랜 친구인 세 남자가 모였다.

“벌써 오십….” “어떻게 살지?” “그림만 그리고 살 수 없나?” “그럼 제주로 내려와.”

이런 말들이 오간 끝에 김남표 작가의 제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여기에는 혼자 된 민 감독 옆을 지켜야겠다는 김남표 작가의 마음이, 전업작가의 형편을 살펴 1년간의 집세를 감당한 김윤섭 대표의 마음이 합해졌다. 이런저런 꿈은 많았어도 늘 현실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십이라는 나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봐”라며 용기를 주었다.

작업실 밖을 나선 적이 없던 김남표 작가는 제주의 자연이라는 거대한 스튜디오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채석장으로, 숲으로, 특수 제작한 대형 이젤을 들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호흡한 제주의 자연은 그의 손끝에서 생생히 살아났다. 실제로 김남표 작가는 붓이 아닌 손끝과 면봉으로 그림을 그린다. 스케치도 없다. 손끝 감각으로 눈이, 마음이 보는 풍경을 담는다. 미술계에서 김남표 작가는 ‘잘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면봉이 닳고 그의 손끝 지문이 사라질수록 나무를 덮은 넝쿨, 수풀 더미, 이끼는 생명력을 얻었다. 길에서 작업을 하는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제주 사람이 한마디 던지고 갔다. “검질을 그렸네.” 검질은 제주어로 길가나 수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나 넝쿨을 이르는 말이다. 그는 ‘검질’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자신의 작업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제주 프로젝트에 ‘검질’이라는 제목이 붙게 된 사연이다. 김남표 작가는 정신없이 작업을 하고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 자신의 그림을 보면 ‘어? 이거 내가 그린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서 “마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가 작업도구를 들고 나설 때면 민병훈 감독도 카메라를 들고 따라나섰다. 그의 작업 과정은 민 감독의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다. 제주의 자연은 작가의 캔버스 속으로, 다시 카메라 속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제주를 품은 화가’를 모티브로 장편영화 ‘팬텀’이 만들어졌다. 부인을 잃은 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는 김남표 작가가 배우로도 출연했다. 화가의 작업이 영화로, 영화가 화가의 작업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민 감독의 새 영화 ‘팬텀’은 내년 개봉될 예정이다.

김 작가의 길을 동행한 민병훈 감독은 “그림을 보고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떨림을 느낀 것은 간만이다”라면서 “달리는 동안의 피나는 노력과 고통은 보는 사람까지도 숨 가쁠 정도로 힘겹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달리고 난 후의 성취감은 직접 달려보지 않고서는 절대 느낄 수 없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아주 작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그것이 그의 그림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셀’ 시리즈가 전시된 ‘아이프라운지’ 전경.
‘셀’ 시리즈가 전시된 ‘아이프라운지’ 전경.

“공동 소장 하세요” 조각조각 작품 판매

제주살이 1년을 포함해 30개월 작업 끝에 만들어진 ‘김남표의 제주 이야기-Gumgil(검질)’전은 서울 청담동에 있는 김윤섭 대표의 ‘아이프라운지’와 ‘호리아트스페이스’(대표 김나리)에 걸렸다. 10호에서 150호까지 유화작품 30여점이 선보였다. 이번 제주살이를 계기로 김 작가의 작품은 달라졌다. 작업실이 아닌 제주의 삶은 작가의 작품에도, 삶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상상의 공간이 작품의 배경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이 배경이 됐다. 김남표 작가는 “일상이 추상이 되고, 추상이 다시 일상이 된다”고 말했다. 우리 옆에 있는 자연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는 작품을 통해 말해준다.

이번 전시는 새로운 판매방식을 제안했다. 이번 전시에는 ‘셀(Cell)’ 형식으로 작업한 대형작품 3점이 선보였다. 이 중 53조각으로 구성된 한 점을 ‘공동 소장’, 즉 각각의 조각을 따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한 사람당 최대 4조각까지 살 수 있고 13조각은 작가와 기획사 쪽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한 작품의 소장자가 10~40명이 되는 셈이다. 이번 전시는 12월 18일까지이다. 김 작가의 ‘제주 이야기’는 내년 민병훈 감독의 영화 ‘팬텀’ 개봉에 맞춰 2탄을 선보일 계획이다.

제주 프로젝트를 기획한 김윤섭 대표는 “이번 전시의 남다른 의미는 인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50세를 맞으면 누구나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전환점을 생각하게 된다. 김남표 작가도 그랬다. 이번 전시는 김남표의 중진작가 신고식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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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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