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 ‘주자초상(朱子肖像)’. 1914년. 비단에 색. 110.2×65㎝. 경상대도서관
채용신. ‘주자초상(朱子肖像)’. 1914년. 비단에 색. 110.2×65㎝. 경상대도서관

2010년 8월, 중국 푸젠성(福建省)에 있는 무이산(武夷山) 계곡에 다녀왔다. 무이산은 송(宋)나라의 주희(朱熹·1130~1200)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강학과 저술에 전념했던 곳이다. 주희는 36봉과 37암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무이산을 휘도는 아홉 굽이의 계곡을 따라 배를 타며 유람했다. 유람의 결과 탄생한 작품이 그 유명한 ‘무이도가(武夷櫂歌)’다. ‘무이도가’는 아홉 계곡의 아름다움을 묘사했기 때문에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라고도 한다. 필자가 무이산을 찾아간 이유는 특별히 주희를 숭모해서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그려진 무이구곡도의 출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무이구곡도를 그린 조선의 화가들은 마치 그들이 실제로 현장답사를 다녀온 것처럼 구곡의 명칭과 봉우리 이름을 세세하게 적어 넣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림 속의 산봉우리와 기암절벽들은 이곳이 신선들이 사는 선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환상을 직접 검증해봐야 했다. 무이구곡도는 단순히 특정한 장소를 그린 풍경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이구곡도 자체가 곧 주희를 상징했다. 주희를 이해하는 것은 곧 조선시대의 근본 바탕을 아는 것이다. 조선은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이라는 사상적 토대를 기둥 삼아 세워진 나라였다. 또한 주희는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맹자로 이어지던 도통(道統)의 마지막 주자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선호했던 중국 성현과 고사(高士)들을 살펴보는 글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주희를 선택한 이유다.

조선시대를 지배한 주자의 가르침

주자(朱子)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통치 철학이자 이데올로기의 기반이었다. 그런 위대한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는 왠지 민망하다. 그래서 ‘주희’라는 이름 대신 ‘주자’라고 높여 불렀다. ‘자(子)’는 ‘스승님’ 혹은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스승에 대한 호칭이다. ‘부자(夫子)’라고도 한다. 공자(孔子)를 ‘공구(孔丘)’라는 이름 대신으로, 맹자(孟子)를 ‘맹가(孟軻)’라는 이름 대신으로 부르는 것과 똑같다. 존경하는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대신 공자, 맹자, 주자라고 하면 ‘공 선생님’ ‘맹 선생님’ ‘주 선생님’이 되니 그 자체가 곧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주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는 초상화의 제작이다. 주자의 초상화는 각종 서적의 삽도(揷圖)와 ‘역대군신도상’같은 성현도상첩에 포함되어 있다. 서원에 봉안된 예배용 초상화와 주자가 무이구곡을 유람하는 장면을 그린 ‘고사인물도(高士人物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초상화는 반신상과 전신상, 전신입상과 전신좌상 등 다양하다. 게다가 다른 성현들과는 다른 주자만을 위한 특이한 추숭 형식이 더해졌다. 그것이 바로 무이구곡도의 제작이었다. 이런 모든 작업이 다 ‘주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과 행적을 선양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1914년에 그린 ‘주자초상(朱子肖像)’은 대표적인 봉안용 초상화다. ‘주자초상’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전신궤좌상(全身跪坐像)이다. 주자는 머리에 복건(幅巾)을 쓰고 있고, 얼굴은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측면관을 하고 있으며 옥색 유복(儒服)을 입었다. 유복은 보통 흰색을 입는데 푸르스름한 옥색을 입은 모습이 특이하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문공주자(文公朱子)’라고 적혀 있다. 문공은 주자가 받은 시호(諡號)다. 주자 용모의 특징은 우안팔분면의 측면관과 복건, 그리고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는 북두칠성 모양의 반점이 전형적이다. 채용신은 초상화를 제작할 때 거의 정면상을 고집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주자초상’은 측면관으로 그렸다. 이런 특징은 채용신이 그린 또 다른 주자상인 ‘회암주선생유상(晦菴朱先生遺像)’(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채용신이 ‘주자초상’을 그리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과 성현도상첩 속 주자상의 특징을 매우 자세히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채용신이 그린 ‘주자초상’은 본지 2609호에 ‘공자의 패션 코드와 정치인들의 X개 싸움’이라는 글로 소개한 ‘공자초상’과 함께 제작되었다. 두 작품은 채용신이 그린 성현 초상화 중 드물게 연도가 밝혀진 사례들이다. 두 성현의 초상화는 2018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경남 진주의 도통사(道統祠)에 봉안되어 있던 초상화를 경상대도서관에 영구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도통사에서는 사당의 중앙에 공자상을 봉안해 남쪽으로 향하게 했고, 동쪽에는 주자상을, 서쪽에는 안자상(安子像)을 배치했다. 공자상이 남면을 했다는 것은 그를 제왕과 동일하게 인정했다는 뜻이다. 제왕만이 남면을 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생전에 왕관을 쓴 적이 없는 소왕(素王)이었지만 사후에 계속 봉호를 받았고, 당나라 현종 때는 문선왕(文宣王)에 추증되었다. 이 말은 공자 옆에 시립한 주자와 안자의 직위도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쪽에 배치한 안자상의 주인공은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아니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1243~1306)이다. 안향에게도 역시 ‘자’를 붙였다. 공자, 주자 못지않게 동방에 유학을 전해준 공이 크기 때문이라 여겨서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도통사에 공자 옆에 주자와 안자의 초상화를 봉안한 것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도통사를 공격한 유림(儒林)들은 안향이 안회, 증자, 자사, 맹자보다 더 높은 것이냐고 따졌다. 통상 공자 옆에는 네 명의 제자가 시립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관념을 깨고 무엇인가 새롭게 해석해보겠다는 시도는 그만큼 어려운 법이다. 채용신이 ‘주자초상’을 제작해 도통사에 봉안했던 1914년대 유림계의 상황이 그러했다.

안향은 호가 회헌(晦軒)인데 주자를 사모하여 지은 호이다. 주자는 유난히 ‘회(晦)’ 자를 아껴 자신의 자(字)와 호로 썼다. 주자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이다. ‘회’는 그믐을 뜻하니 어둡고 캄캄한 상태를 의미한다. 주자가 자신의 학문이 부족하다는 겸양의 의미로 사용한 글자라고 할 수 있다. 안향은 학문과 사상의 거인인 주자가 “아직도 나의 학문은 부족하여…”라는 자세를 견지했으니 감동받았을 것이다. 그가 주저없이 주자의 ‘회’를 차용해 자신의 호로 편입시킨 이유다. 안향은 1290년에 연경에서 귀국할 때 주자서(朱子書)와 함께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모사해왔다고 전한다.

김홍도. ‘무이귀도(武夷歸棹)’. 종이에 연한 색. 111.9×52.6㎝. 간송미술관
김홍도. ‘무이귀도(武夷歸棹)’. 종이에 연한 색. 111.9×52.6㎝. 간송미술관

주자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루트

존경하는 ‘주 선생님’을 흠모하고 추종한 후학들은 스승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주자대전’ ‘주자어류’ 등 주자와 관련된 책을 간행했다. 정조의 시문과 산문을 엮은 ‘홍재전서’에는 주자 관련 서적의 간행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요즘 내가 주부자의 저서를 천명하여 집집마다 외워 익히고 사람마다 연구하게 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천리를 밝히고 인륜을 바로잡는 일에 준칙이 되기 때문이다. 이단과 간특한 학술이 따라서 배격을 당하는 것도 반드시 이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니, 말하자면 천리와 인륜의 큰 원칙을 강론하여 밝히는 문제 정도는 오히려 소소한 절차상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강력한 왕권정치를 지향했던 정조는 주부자의 책을 간행하여 사람들을 교육하면 ‘천리가 밝혀지고 인륜이 바로잡아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조의 말은 유선(諭善·왕세손을 가르치던 관직)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는 내용에 대한 답이었다. 이성보의 상소문에는 “우리 자양부자(紫陽夫子)는 수많은 현인의 업적을 집대성하고 천년 동안 끊긴 도통을 이어받아 내놓는 말들이 모두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성인의 도학을 여는 요체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 저서들이 여러 질로 흩어져 전체를 볼 수가 없으니 “전하께서 전질을 하나로 편집”해 주십사 하는 내용이었다. ‘자양부자’는 주희의 호다. 이성보의 상소와 정조의 대답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주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의 ‘무이귀도(武夷歸棹)’는 주자가 무이산 계곡을 유람하는 장면을 그린 고사인물화다. 필자를 무이산으로 향하게 만든 결정적인 작품이다. 높이 솟아오른 절벽 사이로 계곡 물살이 가파르다. 주자를 실은 배 한 척이 지그재그로 굽이치는 계곡물을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두 명의 사공이 배가 부딪치지 않도록 장대로 절벽을 밀고 있다. 날카롭게 솟은 바위는 연잎 줄기처럼 생긴 하엽준(荷葉皴)을 써서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림은 주자가 계곡을 유람하는 모습이 주제이지만 그보다는 무이산 계곡의 자연풍광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둔 것 같다.

정조가 주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했듯이 정조의 뜻을 받든 김홍도도 무이계곡을 성심껏 그렸다. 김홍도는 1800년에 정조에게 진상할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 8폭 병풍을 제작했다. 그중 6폭이 현재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병풍을 본 정조는 김홍도가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고 칭찬했다.

16세기부터 조선에서 그려진 무이구곡도는 세로가 긴 족자 형식과 가로가 긴 두루마리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족자 형식은 한 화면에 무이계곡 전체를 압축해서 넣은 식이다. 반면 두루마리 형식은 마치 배를 타고 구곡을 여행하듯 그림을 펼쳐가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그러다가 김홍도가 살던 18세기에는 각 계곡을 독립된 장면으로 해 병풍으로 제작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문사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 구곡을 만들고 주자처럼 살기를 희망했다. 율곡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권상하의 ‘황강구곡’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주자를 흠모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주자와 같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주자에 대한 흠모가 거의 종교적인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자의 어떤 점이 조선시대 사람들을 그렇게 사로잡았을까.

안향이 들여온 주자학은 여말선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당시에 고려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단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런 혼란기에 신진사대부들은 왕조를 교체하고 새 왕조를 뒷받침해줄 혁신적인 사상체계가 필요했다. 그때 안향이 전해준 성리학이 큰 역할을 했다. 성리학은 주자에 의해 집대성되었기 때문에 주자학이라고 한다. 또한 정주학(程朱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신유학(新儒學) 등으로도 부른다. 주희는 주렴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등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성리학은 ‘성명과 의리의 학문(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주자는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에 우주만물의 생성과 운행을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적 체계로 해석하여 정리했다. 성리학자들은 불교의 출세간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상과 도교의 은둔적인 경향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사상이 참된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대 이전 당나라까지 중국의 사상계는 불교의 선종이 지배하다시피 했다. 남회근 선생은 ‘맹자와 공손추’에서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자들 역시 겉으로는 유가인 척하지만 내적인 수양은 선(禪) 아니면 도(道)를 수련한 ‘외유내선(外儒內禪)’이었다”고 평가했다. 성리학의 사유체계 자체도 선종과 도가에서 훔쳐오기까지 해 놓고서 오히려 양쪽을 욕한다고 비난했다.

아무튼 성리학에서는 우주의 본체를 이루는 ‘성리, 의리, 이기’를 개인의 수양과 사회 공동체의 윤리규범으로 접목시키는 데 성공했다. 성리학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에는 개인의 수양이 어떻게 국가 통치에까지 연결될 수 있는가를 명쾌하게 제시해 놓았다. 그것이 바로 ‘명덕(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至於至善)’의 삼강령(三綱領)과,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팔조목(八條目)이다. 개인의 수양에서 시작된 ‘수신’이 ‘치국’을 넘어 ‘평천하’까지 할 수 있다는 사상체계는 가족 중심의 혈연공동체뿐만 아니라 국가라는 사회공동체 안에서도 대환영을 받았다. 혈연공동체에서 사회공동체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주례(周禮)’에서 강조한 예(禮)가 기반이 되었다.

주자성리학 고수한 조선왕조의 교훈

예가 무엇일까? 예는 단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다. 예의 사전적 의미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적절함’을 뜻하는 유교 개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고대의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 아니었다. 우홍(巫鴻)은 ‘순간과 영원’에서 “예의 체계는 차별적이고 계층화된 사회에 의지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보증해주고 있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예는 왕과 경대부, 서인과 최하위층을 ‘구분하는 것’의 표현이었다. 귀한 자와 천한 자 사이의 등급과 지위를 구분하기 위해 의복도 차별을 두었고 앉는 자리도 구분을 했다. 이런 구분을 명확하게 지키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법적이며 비도덕적이란 뜻으로 ‘비례(非禮)’하다거나 ‘무례(無禮)’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예는 군신(君臣)·상하(上下)·장유(長幼)의 지위를 구분하고, 남녀·부자·형제 관계를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속에서 소위 ‘질서’라고 부르는 체계가 성립이 되었으니 예야말로 고대 사회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는 작동요인이었다. 그 체계를 정립한 사상이 성리학이었다. 그러니 성리학이야말로 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강고한 체계가 확립되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가장 환영받을 만한 사상이었다.

몇 년 전에 대만(臺灣)에 간 적이 있었는데 타이베이(台北)의 룽산쓰(龍山寺)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룽산쓰는 불교, 도교, 유교의 신들을 함께 모시는 종합 사찰이다. 그중 ‘문창제군전(文昌帝君殿)’에 들어가 보니 ‘자양부자’가 함께 모셔져 있었다. 문창제군은 학문의 신으로 시험 합격을 발원하거나 위대한 문필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와서 비는 곳이다. 그런데 ‘자양부자’에게는 가족들 사이의 화목을 빈다고 적혀 있었다. ‘자양부자’에게 비는 사람들이 바라는 가족 간의 화목은 무엇일까? 그 화목은 누구 입장에서 바라는 소원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리학에서 강조한 윤리도덕은 ‘구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신분계급적인 사회질서와 가부장제적이고 종법적인 가족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고 명분론이었다. 그 사상체계가 조선왕조 500년을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이자 족쇄였다. 성리학은 단일한 사상으로 수 많은 학자를 배출시킨 반면 성리학의 체계에 반하는 다른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무조건 배척했다. 그 결과 조선왕조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다 무너지고 말았다. 경직된 사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후세에게 큰 가르침을 준 사상도 없지 않다. 역사는 수많은 사람이 전 생애를 살아내면서 남긴 사상과 가르침과 교훈으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림 속의 역사 인물들을 마무리하면서 또다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잊지 말아야 할 무거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한 생을 잘 살아야겠다. 그동안 긴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린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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