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의 키벨레 동상.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키벨레 여신은 로마가 수입하면서 유럽의 대표적인 여성 신으로 자리 잡았다. ⓒphoto 셔터스톡
스페인 마드리드의 키벨레 동상.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키벨레 여신은 로마가 수입하면서 유럽의 대표적인 여성 신으로 자리 잡았다. ⓒphoto 셔터스톡

“무슨 의미를 가진 자세일까?”

광화문광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의문이다. 광장 중심에 들어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조형물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든다. 여러 가지 궁금증이 있지만 ‘의자에 앉은’ 세종대왕의 모습이 핵심이다. 형이상학적, 형이하학적 나름대로의 ‘심오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접해본 다른 나라의 통치자나 영웅 조형물과 비교하면 뭔가 다르다. 노파심이지만 ‘감히’ 조각가를 비하하거나, 요즘 유행하는 과거 행적 일부분을 꼬투리로 잡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앉아 있는 왕을 표현한 조각가의 심중이 궁금할 뿐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세종대왕을 통해 ‘안정·평화·번영’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서방세계의 경우 의자에 앉아 있는 왕의 조형물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뭔가 호령하는 자세로 서 있거나, 말이나 전차를 탄 자세로 전진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은 책을 펴고 오른손을 든 채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하려는 자세로 표현돼 있다. 필자의 유럽 탐사에 입각한 결론이지만, 보통 의자에 앉은 통치자 조형물은 여성이다. 재위기간 64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무려 16명의 자식을 낳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대표적이다. 고령에다가 여성이란 이유 때문이겠지만, 의자에 앉아 있는 조형물이 각각 런던과 빈 한복판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제외하면, 여왕이라도 의자에 앉은 인물은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보통 서 있거나, 현재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처럼 말을 탄 모습의 조각상도 있다.

광화문광장은 대한민국의 핵(核)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세종대왕, 나아가 이순신 장군의 조형물은 그 같은 공간을 지키는 대한민국 국민의 혼(魂)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과 이순신을 통해 한국인이란 아이덴티티가 생기고, 광화문광장을 통해 한국이란 나라의 의미와 가치가 지구상에 새겨질 수 있다. 얘기를 확장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핵에 해당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당장 눈앞의 미국을 보면서 워싱턴DC라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보면 불과 250년 역사의 나라가 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사이에 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핵에 어울리는 공간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농업혁명이다. 1만2000년 전 농업을 통해 시작된 집단거주의 역사는 인류 문화·문명사의 첫 발자국에 해당한다. 지구 곳곳에서 순차적으로 벌어지지만, 메소포타미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농업혁명의 최초, 최대 발원지이다. 둘째는 문자의 발명이다. 메소포타미아 하류에 자리 잡은 수메르 지역의 문자가 대표적이다. 기원전 3500년 창조된 그 유명한 쐐기문자(cuneiform), 즉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이뤄진 언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농업과 문자가 일상화된 지역이 메소포타미아다. 농업과 문자 덕분에 메소포타미아 문화·문명사는 고대 그리스가 발흥한 기원전 4세기까지 계속된다. 21세기 눈으로만 본다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대략 1만여년간 인류의 맏형으로 전 세계 문화·문명의 선구자 역할을 한 곳이 메소포타미아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류의 핵, 즉 메소포타미아를 지지해온 혼은 무엇이었을까? 세종이나 이순신처럼, 메소포타미아 거주민의 정신적 지주로 지탱해온 혼은 무엇이었을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답이 나올 듯하다. 국가·민족·인종·이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딱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식이지만 아무리 복잡하게 보여도 원리를 안다면 답은 간단히 찾아낼 수 있다. 국가·민족·인종·이념과 무관한, ‘인간의 본능’이 원리의 단서다. 바로 어머니다. 개인 차원이 아닌, 집단 차원의 어머니가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가늠하는 혼으로 자리 잡았다. 바로 모신(母神)사상이다. 대지의 신, 출산의 신, 부활의 신, 창조의 신, 곡물의 신으로서의 모신이다. 문화인류학자 모두가 인정하지만, 모신사상의 출발점이 된 공간이 바로 메소포타미아다.

터키 미다스시티에 있는 키벨레 사원. ⓒphoto 유민호
터키 미다스시티에 있는 키벨레 사원. ⓒphoto 유민호

독일서 발견된 인류 최초의 비너스

고고학이나 메소포타미아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도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접했을 입체 조각상 하나가 있다. 엄청난 가슴, 둔부, 다리를 자랑하는 모신 조각상이다. 대부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주간조선 2625호에서 다뤘지만,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의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에서 발견된 기원전 6000년의 여신상이 대표적이다. 메소포타미아 모신사상을 증명하는 최고(最古)의 본보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역사지만, 모신사상은 메소포타미아 흥망사와 거의 일치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선진 문화·문명은 고대 그리스, 나아가 고대 로마 발흥과 함께 빛을 잃어간다. 시대정신이라고나 할까? 인류의 발전 동력(動力)이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메소포타미아 모신사상의 불꽃도 천천히 꺼져간다. 결정적인 순간은 예수의 탄생이다. 일신교로서의 남신(男神)의 출발점이 바로 기독교다. 원래 남성 일신교의 출발점은 이스라엘 유대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기독교는 로마의 힘과 더불어, 유럽과 메소포타미아 나아가 아프리카 북부 전체를 아우르면서 지구 전체로 확산된다. 모신사상은 유일신 체계와 무관하다. 대지의 신, 창조의 신 이외의 다른 신도 믿을 수 있다. 기독교는 다르다. 4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모신사상도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키벨레(Cybele)는 메소포타미아 모신사상의 압축판이자 종교적 차원의 아이콘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신이지만, 흥미롭게도 최대의 인기를 끈 지역은 로마다. 키벨레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무려 700여년간 로마를 대표한 신이었다. 괴베클리 테페에서 접한, 기원전 6000년의 아나톨리아 여신상을 뒤이은 아이콘으로, 대략 기원전 2000년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현재 아나톨리아 한복판 프리지아(Phrygia) 지역이 키벨레 탄생지다.

사실 모신사상의 출발점이 된, 풍만한 가슴, 둔부, 다리로 표현된 조각상은 이미 기원전 3만5000년에 등장했다. 2009년 5월 고고학·인류학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독일 남서부 동굴 홀레펠스(Hohle Fels)에서 발견된 상아 조각상이다. 6㎝ 크기의 작은 조각상 두 개로, 현재 ‘인류 최초의 비너스’로 명명된 ‘인류 최초의 조각상’이다. 기원전 3만5000년에는 집단 정주지도 없고, 농업이나 문자와도 무관했던 시대다. 인류 최초의 비너스가 신으로 추앙됐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다. 신은 문자와 의식을 필요로 한다. 문자와 의식을 통해 신의 파워와 권위, 나아가 효험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 체계화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키벨레는 농업과 정주사회, 그리고 문자의 산물이기도 하다. 신이 있다는 말은 농업, 문자, 정주사회가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했다는 의미다.

키벨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여년 전부터다. 이탈리아 박물관 어디에 가도 접할 수 있는 조각상이기도 하지만, 로마 바티칸 건물이 들어선 땅의 원래 신전 주인이 키벨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주목하게 됐다. 키벨레 사원 위에 바티칸이 들어선 셈이다. 해석하기 달렸겠지만, 남성 유일신이 본능에 기초한 여성 모신을 말살, 점령했다는 식으로 이해됐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여신은 정주사회와 농업문화의 산물이자 상징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남신은 이동문화와 수렵문화의 산물이자 상징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단으로 사냥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육체적 의미의 파워를 필요로 한다. 한군데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여자가, 돌아다닐 경우에는 남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치와 똑같다.

대제국의 성격이 그러하듯, 로마는 결코 한군데 머물지 않았다. 세계 구석구석을 점령, 발전시켜 나가면서 로마의 파워와 부를 확대해 나갔다. 여신보다 남신이 득세할 수 있는 환경이다. 따라서 키벨레는 원래 대제국 로마와 무관한 신이었다. 로마의 최대 장점이지만, 자신이 무식하고 모자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만이나 편견 없이 모르면 배우고 수입한 나라가 로마다. 로마의 파워와 부에 도움이 될 존재로, 정식 수입된 신이 바로 키벨레다.

키벨레는 로마에서 ‘마그나 마터(Magna Mater)’, 즉 위대한 어머니로 불린 신이다. 기원전 205년 공화정 로마의 결의에 따라 정식으로 수입된 신이 마그나 마터다. 당시 로마는 한니발을 앞세운 카르타고와 전쟁 중이었다. 아나톨리아의 모신 키벨레를 수입할 경우 전쟁에서의 승리는 물론 로마를 무적 철옹성으로 만들 것이란 예언이 로마에 퍼져나간다. 아나톨리아에 있던 키벨레 조각상과 사원을 지키던 ‘검은돌’이 통째로 로마에 수입된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중심에 들어선 ‘검은돌’ 신화는 원래 키벨레 사원에서 유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키벨레는 이후 로마 전체로 퍼져나간다. 특히 서기 2세기 로마 최고 번성기를 맞아, 이민족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키벨레 신자도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바티칸을 비롯해 로마 곳곳에 키벨레 신전이 들어선다.

미다스시티 키벨레 사원에 새겨진 거세 의식 조각.
미다스시티 키벨레 사원에 새겨진 거세 의식 조각.

터키에 남아 있는 키벨레의 흔적

키벨레가 과연 어떤 신이었는지 알기 위해 찾아간 곳은 페시누스(Pessinus)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진 고대 유적지다. 로마에 공식 수입된 키벨레 신전의 검은돌이 있던, 아나톨리아 키벨레 신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좁은 길을 따라 찾아갔지만, 키벨레의 흔적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원인 듯한 초대형 건물이 퇴적토사물과 함께 보이지만 십자가 문양만 남아 있을 뿐 모신이 남긴 그 어떤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4세기부터 비잔틴대제국의 영역에 들어가면서 기독교도에 의한 철저한 말살이 이뤄졌기 때문일 듯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해도, 7세기 이후 이슬람이 페시누스 지역을 장악하면서 키벨레는 물론 기독교의 그림자도 초토화된다. 페시누스 유적지 바로 앞에 들어선 이슬람 모스크는 그 역사를 지키는 최후의 증인처럼 느껴진다.

모신에 대한 관심, 아니 본능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집착 때문이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키벨레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장소는 미다스시티(Midas City)로 알려진, 페시누스에서 서쪽으로 100㎞ 떨어진 고대 유적지다. 주간조선 2516호를 통해 선보인, 황금의 손 미다스의 영광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초대형 비석이 들어선 공간이다. 당시는 몰랐지만, 미다스시티 뒤쪽의 서쪽 언덕이 키벨레 신전의 원형이란 사실을 최근 알게 됐다.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깊이 파고들어가면 답이 없어진다. 연구자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관련 자료나 해석이 드물어진다. 결론은 스스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미다스시티 뒤쪽의 키벨레사원도 마찬가지다. 직접 찾아가서 기원전 2000년의 역사를 발굴, 해석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터키 아나톨리아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기원전 6000년의 여신상. ⓒphoto 유민호
터키 아나톨리아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기원전 6000년의 여신상. ⓒphoto 유민호

미다스시티의 키벨레 동굴

미다스시티의 키벨레 사원은 인간의 손으로 파낸, 원시 신앙사회의 결정체다. 언덕에 들어선 돌을 전부 간단한 도구로 파낸 뒤 인간의 생로병사 문제를 신에게 귀의시킨 곳이기 때문이다. 키벨레 신앙은 특별한 의식에 기초한 종교다. 한 번만 경험해도 기억에 평생 남을 신성한, 그러나 섬뜩한 의식이 행해진다. 피를 통한 의식이다. 소를 죽인 뒤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통해 탄생과 구원을 약속받는다. 대리인으로 신전의 신관이 나선다.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도 전해지지만, 스스로 남성임을 부정하는 환관의 거세 문화도 이들 키벨레 신관이 남긴 흔적이다. 모신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신관이 되기 전에 스스로 거세에 나선 것이다. 신관만이 아니라 의식에 참여한 남성도 거세에 나섰다고 한다. 뜨거운 소의 피를 온몸에 적신 신관이 탄생,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한 성스러운 의식이 바로 거세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볼 수 있는, 왕 주변의 ‘기쁨조 여성’을 지키기 위한 불륜 방지용 거세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피를 통한 ‘섬뜩한’ 의식에 나섰을까? 어머니의 출산이 답이다. 피를 뒤집어쓴 채 출발하는 출산 장면을, 소의 피를 통해 재현한 것이 키벨레 의식의 핵심이다. 미다스시티 언덕에는 깊이 20m 정도의 돌로 된 동굴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전부 단단한 돌로 이뤄진 동굴로, 부실한 도구를 통해 필사적으로 파내려간 고대의 흔적이다. 고대 우물로 오해하기 쉽지만, 어머니의 자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공간이다. 피투성이 신관과 함께 지하 동굴에 들어가 생명의 부활(Reborn)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활이다. 키벨레는 어머니의 사랑으로서의 모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명의 출발점으로서의 출산 의식에 기초한, 피를 통한 생로병사로부터의 부활이 키벨레의 진짜 의미다.

거세로 출산을 경배하며 부활을 약속받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키벨레 조각상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보통 두 마리 사자가 키벨레의 발밑에 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키벨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유일한 여신이다. 세종대왕 조형물에서 보듯 의자에 앉은 모습은 ‘안정·평화·번영’을 의미한다. 더불어 세속적 의미의 절대권력자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키벨레의 파워와 권위는 이후 의자에 앉은 남신 제우스로 대체된다. 그리스 12신 가운데 유일하게 앉아 있는 신이 제우스다. 이후 남성 유일신에 기초한 기독교 시대를 맞아 제우스도 사라진다. 예수와 하늘의 신만이 의자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여성에게도 부분적으로 허용된다.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좌상이다. 마지막 남은 키벨레의 흔적이라고나 할까?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특징 중 하나가 여성 각료의 대거 등용이라고 한다. 종교적 의미로서의 키벨레의 부활은 멀고 먼 얘기일 듯하다. 그러나 정치적·권력적 차원의 의자에 앉은 여성들의 모습은 21세기 시대정신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어머니의 의미와 가치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물론 어머니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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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퍽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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