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正初) 덕담에 빠지지 않는 말이 돈, 건강, 행복이다. 그중에 돈이나 건강은 행복의 조건일 따름이다. 그러니 우리 삶의 으뜸 목표는 단연 행복이다. 하지만 막상 행복이 무엇인가는 애매하다. 어떻게 추구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실제로 성취하기란 더욱 어렵다.

이로 인해 우리는 행복을 통해 삶의 스트레스를 없애기는커녕 도리어 행복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이런 현실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올바른 대안을 모색한 인상적인 담론이 있다. 바로 철학자 탁석산의 ‘행복 스트레스’(2013)다. 이 책은 그 본질을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리고 과연 우리에게 바람직한 삶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탐색해 본다.

흔히 행복이란 ‘즐거운 마음 상태’쯤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수많은 행복 전문가는 마음을 조금만 닦으면 당장이라도 행복해진다고 떠들어댄다. 억지로라도 웃으라든지 ‘아프니까 청춘’이라든지 ‘멈추면 보인다’든지 하는 기상천외한 비법(?)을 앞다퉈 내놓는다. 그들은 행복의 복잡한 개인적·사회적 조건들을 외면하고, 그것을 철저히 개인의 마음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런 속삭임들은 일시적으로 위로가 될지언정 결국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행복(해피니스·happiness)’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불과 200여년 전에 공리주의가 제기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그 기원이다. ‘해피니스’는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행복’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이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그런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행복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을 논한 적이 있다. 거기서 행복이란, 사람이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잘 발휘하는 활동 또는 그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에우다이모니아는 ‘행복한’ 삶이라기보다 ‘좋은’ 또는 ‘훌륭한(good)’ 삶을 의미한다. 그것이 부득이 행복이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오늘날 해피니스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이처럼 ‘행복’은 절대적 개념이라기보다 역사적 산물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18~19세기 공리주의의 직접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즉각적인 쾌락(pleasure)을 가리킨다. 하지만 쾌락이 행복의 전부인가. 더구나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행복은 희생되어도 무방한가. 공리주의는 종교적 윤리관을 타파한 획기적 테제였지만, 그 안에 숱한 논쟁을 담고 있다.

이러한 행복관은 때맞춰 등장한 민주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와 만나면서 그 문제점을 제대로 해소하지 않은 채 마치 무조건 추구해야만 하는 일종의 세속종교로 변질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고취시켜 누구나 즉각적인 성공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바야흐로 행복이란 곧 성공과 쾌락으로 굳어졌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는 자유, 평등, 정의, 인권, 행복 등 일반개념들이 넘쳐난다. 그런 추상명사들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 행복만큼 매력적인 개념도 없다. 그것은 일반개념인 동시에, 다른 일반개념들과는 달리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행복에 집착하게 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고리로 개인주의를 강화했다. 거기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개인적이다. 그런 노력은 대부분 이기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사회적인 존재다. 개인적인 노력이 약간은 효과가 있지만 곧 벽에 부딪히고 만다. 요즘은 그런 벽을 외면하고 ‘소확행’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행복은 여전히 개인이 홀로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민주주의, 개인주의와 더불어 행복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시장주의다. 시장은 모든 것을, 심지어 인간의 노동마저 상품화하여 화폐로 표시한다. 이처럼 숫자로 추상화되는 사회에는 절제나 한계가 없다. 옛날에는 만석꾼이면 거의 궁극적 부자였다. 그러나 요즘은 부(富)도 단지 숫자로 표시되어 무감각하다. 도대체 얼마가 있어야 부자인지조차 애매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빈자는 물론 부자 역시 만족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시장주의를 벗어나기란 현재로서는 까마득해 보인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제안처럼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는 체념이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굴복하자는 체념이 아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철저한 절망을 통해 오히려 용기와 힘을 얻어 개선에 나서자는 것이다.

이처럼 공리주의의 ‘쾌락’에 뿌리를 둔 행복은 마침 등장한 민주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와 맞물려 누구나 개인적으로 손쉽게 성취할 수 있고, 아울러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행복을 얻기 위한 사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 누구나 ‘이런’ 행복을 온전히 실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래서 저자는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예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종교나 행복 전문가들이 주장하듯이 ‘마음 닦음’이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를 제대로 읽고, 문제점과 원인을 따져 보고, 거기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이런 성찰과 노력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향상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주변과 사회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가 필요하다. 주변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 평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족 간 갈등, 사회적 갑을 갈등 등 모든 갈등이 다 마찬가지다. 따라서 상대가 역할만 다를 뿐, 평등한 존재라는 자각과 그에 입각한 실천이 절실하다. 아울러 무너진 예의와 공중도덕을 바르게 세우는 일도 필요하다.

나아가 무한정 사적인 소유로 치닫는 시장주의의 폐해를 개선하여 ‘공동의 부’를 향유하는 사회 건설도 절실하다. 구체적인 예로, 국민건강보험 강화, 토지의 공적인 활용, 임대주택 확대 등이 있다. 설사 개천에서 용이 나더라도 그저 이기적인 성공에 머문다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 사회의 근본적인 개선이 없다면 어떠한 행복도 보장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개인과 주변(이웃)과 사회가 한데 어우러져 변해야, 아니 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저자는 그 각각에 우리의 관심과 노력을 3분의 1씩 배분하라고 권한다. 이런 제안을 들으면 우리는 “그게 무슨 행복인가?” 라는 반감(?)이 든다. 우리에게 행복은 쾌락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저자의 통찰이 숨어 있다. 즐거운 순간은 있을지언정 삶 자체의 행복은 환상이다. 행복이란 개념은 그 탄생부터 문제덩어리였다. 따라서 저자는 ‘행복한(happy)’ 삶에 집착하기보다 차라리 ‘좋은(good)’ 삶을 추구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개인, 이웃, 사회에 두루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며, 우리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조금씩 개선해 나가려는 자세다.

그런 ‘좋은’ 삶을 새해 목표로 삼아 본다면, 아마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좋은 개인, 좋은 이웃, 좋은 사회가 함께 만드는 ‘좋은’ 삶을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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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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