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아피온의 우시장 풍경. ⓒphoto 유민호
터키 아피온의 우시장 풍경. ⓒphoto 유민호

2021년은 12지간으로 보면 소의 해, 신축년(辛丑年)이다. 일 년 내내 코로나19로 고생한 지난해는 쥐의 해 경자년(庚子年)이었다. 쥐는 페스트의 상징인 동물이다. 카뮈의 소설에서는 알제리의 오랑(Oran)이란 도시에 국한됐지만, 2020년의 경우 전 세계가 전염병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일으킨 바이러스 출발점이 쥐의 사촌 격인 박쥐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땅만이 아니라 하늘도 전염병의 무대라는 의미로 들린다. 숨거나 피할 공간이 없다.

12지간에 얽힌 달리기 설화에 따르면 원래 1등으로 도착할 수 있었던 동물은 소다. 스스로 늦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경주 하루 전날부터 뚜벅뚜벅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던 동물이 소다. 그러나 소의 머리에 올라타고 있던 쥐가 골인 직전 결승점에 뛰어내리면서 순위가 달라진다. 약삭빠른 쥐가 1위, 소는 2위다. 보통 한국인의 정서로 본다면 쥐를 퇴출시키고 소를 진짜 우승자로 받아들일 듯하다. 열심히 준비했고, 혼자서 최후의 목적지까지 부지런히 걸어간 소가 진짜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쥐도 1등이 될 수 있다. 남의 힘을 이용해 결승점에 들어서는 것이 불법이란 규정은 없다. 규정 속의 허점을 포착해 십분 활용한, 현명하고도 효율적인 행위라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12지간 소의 달리기 설화

12지간은 기원전 2세기 진(秦)나라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에서 탄생한 12지간은 중국인 유전자를 가늠하는 결정판이라 볼 수 있다. 우직한 소의 근면성을 이용한 쥐의 민첩한 행동이야말로 중국인이 선망하는 진짜 지혜다. 소에 대해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다. 1등을 제외한 2등 이하의 목소리는 어차피 패자의 잠꼬대에 불과하다. 21세기 중국의 민낯이지만 패권 경쟁이라면 물불을 안 가린다. 그동안 지켜온 질서나 관행은 처음부터 무시다. 역사 뒤집기도 식은 죽 먹기다. 2020년 전염병이 중국에서, 그것도 땅과 하늘을 오가며 양다리 걸치기로 살아가는 ‘규정 밖 동물’ 박쥐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12지간 달리기 설화에 나타난 소의 반응이다. 쥐의 간계로 1등을 놓친 소지만,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는다. 쥐에게 욕을 하기는커녕 남 탓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만약 비슷한 일이 호랑이나 용에게 닥쳤다면 어땠을까? 물어 죽이거나, 불에 태워 쥐를 아예 12지간 리스트에서 삭제했을지도 모르겠다.

2021년 1월 필자가 신년을 보내는 무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다. 정확히 터키 동부 아나톨리아 아피온(Afyon) 지방이다. 필연이라 생각하지만, 매일 아침과 저녁 소떼를 만난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호텔 3층 베란다에서 접하는 광경이다. 코로나19를 피해 터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결국 전염병에 걸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발견한 목가적 풍경이다. 얼마전 주간조선에 기고했지만, 필자는 코로나19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폐와 몸 구석구석 후유증은 남아 있다. 터키 정부는 아직도 필자를 감염 위험분자로 분류하고 있다. 비행기를 탈 수도, 어딘가 멀리 이동할 수도 없다. 긴 요양도 필요하고 분위기 일신도 겸해 서쪽에 있던 방을 동쪽 방향으로 옮겼다. 몰랐는데, 호텔 동쪽은 멀리 산 하나만 보일 뿐 끝없는 대지로 이어져 있다. 아침 8시 일출 때면 아나톨리아 옥토를 적시는 붉은 빛이 방 안까지 밀려든다.

로마 시대 소를 새긴 석조 유물.
로마 시대 소를 새긴 석조 유물.

아나톨리아 대지를 울리는 소떼 방울소리

소떼와의 만남은 방을 옮긴 다음 날 발견한 ‘신의 선물’이다. 출발점은 소리였다. 오전 9시쯤 심야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렸다. 밖을 내다보니 긴 행렬의 소떼가 눈에 들어왔다. 대략 50마리다. 소리의 진원지는 소의 목에 걸린 지름 20㎝ 정도의 청동제 벨이다. 50여마리 소떼의 목적지는 풀밭이다. 겨울이라 이미 바짝 말라들어 갔지만, 대지 곳곳에 풀밭이 아직 퍼져 있다. 소떼의 총사령관은 당나귀에 올라탄 70대 할아버지다. 목동(牧童)이 아니라 목옹(牧翁)이라 불릴 만한 연령대다. 손을 흔들며 크게 인사를 했다. 필자의 습관이지만, 어디를 가다 방목 중인 소, 양, 염소 떼를 만나면 반드시 내려 인사를 한다. 양치기나 목동은 물론 소, 양, 염소를 지키는 개들과 함께 사진도 찍는다. 인생의 축복이자 행복의 절정이라 믿는 순간들이다. 인사를 하면 100% 모두가 반갑게 맞아준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동물들을 지키며 이동하는 것이 양치기 목동들의 일과다. 그러나 성경의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 탄생을 가장 먼저 알아낸 인물은 바로 어린 양치기다.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가나 인간만사에 정통한 지식인이 아닌, 24시간 동물과 함께하는 가장 단순한 인물이 신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아챘다.

호텔 창문을 통해 대지 곳곳에 흩어진 소들을 지켜봤다. 대략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마른풀을 뜯어 먹는다. 가끔 앉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서 있다. 하루 종일 먹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소들의 귀가는 해가 넘어가기 직전인 오후 5시에 시작된다. 느리게 움직이는 소들의 퇴근 행렬과, 한 박자 느린 듯한 벨 소리가 잘 어울린다. 흥미로운 것은 당나귀에 올라탄 할아버지의 위치다. 아침 출근길에는 앞장서서 소들을 인도하지만 저녁 퇴근길에는 소 행렬의 가장 뒤가 할아버지의 자리다. 해가 넘어가는데도 풀을 찾아 이러저리 돌아다니는 ‘불량’ 소들이 많다. 무려 8시간이나 배를 채웠지만, 그래도 모자라는 듯 풀을 뜯는다. 할아버지는 그런 소들을 전부 집으로 데려가야만 한다. 결국 소떼의 마지막 행렬을 지키며 귀가할 수밖에 없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침에는 소몰이 할아버지만 보고 따라가는 것이 소들의 습성이다. 그러나 일단 대지에 들어서 식사에 몰입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목적지에 온 이상 소몰이 할아버지가 필요 없어진다. 말도 잘 안 듣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안 한다. 터키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았지만, 소몰이 나아가 양치기의 진짜 역할은 일몰 직전 펼쳐지는 퇴근길에 있다고 한다. 방목지가 산이나 계곡일 경우, 모르고 몇 마리 남겨둔 채 귀가할 수도 있다. 무리를 벗어난 불량 소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소몰이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한다.

출근은 앞장서서, 퇴근은 뒤에서 하는 소몰이를 보면서 영웅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전백승을 자랑하는 정복자라고 하지만, 생전의 모습은 흉터투성이였다고 한다. 흉터는 정면대결로 승부를 내는 재래식 전쟁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경우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흉터의 위치가 전부 몸의 앞쪽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 벌어질 때 최전선에서 앞장서 싸우던 인물이 알렉산더다. 앞장서서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흉터가 전부 몸의 앞쪽에 쏠리게 됐다. 소떼와 함께 대지로 행할 때는 가장 먼저 나서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소떼의 뒤에 남아 모든 것을 챙기는 것이 소몰이 할아버지의 일과다. 적과 싸울 때는 가장 뒤에, 싸움이 끝난 뒤에는 가장 앞에 서서 자화자찬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21세기 한국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소몰이 할아버지가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농업혁명과 가축 소가 등장한 메소포타미아

필자의 전염병 망명지인 아피온 지방은 인류사에 등장한 소의 첫 데뷔 무대 같은 곳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소의 출발점이 아피온이 속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이기 때문이다. 약 1만년 전의 역사지만, 인류 최초로 소의 가축화가 이뤄진 곳이 바로 메소포타미아다. 농업혁명과 함께 부락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정주 생활이 시작되던 순간 야생 소의 가축화가 이뤄진다. 양, 염소, 말의 가축화도 비슷한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 시작된다. 가축화된 메소포타미아의 소는 이후 유럽과 인도, 아시아와 한반도까지 확산된다.

인간과 함께 생활한 소의 가장 큰 역할은 음식이다. 가죽은 옷으로 활용된다. 이후 바퀴 발명과 함께 마차를 움직이는 역할도 부가된다. 흥미롭게도 소가 농업 현장에 투입된 것은 2600여년 전에 불과하다. 소를 앞세운 쟁기나 써레를 이용한 농작법도 메소포타미아가 원조다. 소를 이용한 농작법으로 이후 농작물 생산량이 급성장한다.

필자가 호텔에서 매일 만나는 소떼에서 보듯, 소 방목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특유의 풍경 중 하나다. 염소나 양도 있지만, 메소포타미아 방목의 핵심은 역시 소다. 구대륙에 해당하는 유럽, 아랍 나아가 아프리카의 방목 가축은 대부분이 양이나 염소다. 메소포타미아 이외의 지역으로 소의 자연방목이 이뤄진 곳은 신대륙인 아메리카대륙뿐이다. 신대륙에 소를 처음으로 데려간 인물은 콜럼버스다. 15세기 말부터 유럽을 통해 소의 입식이 시작됐다.

메소포타미아 소 방목의 특징 중 하나로 100% 자연방목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소 사육은 대부분 대자연이 아닌 좁은 우리나 작은 목장에서 이뤄진다. 공간 확보도 어렵지만, 메소포타미아처럼 드넓은 풀밭이 드물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대지에서 자란 무공해 자연방목 소는 그림의 떡으로 비칠 수 있다. 식용 고기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질기기 때문이다. 가축이라고 하지만, 거의 야생동물 같은 원시적인 냄새도 배어 있다. 케밥은 터키나 중동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고기를 얇게 썰어 포갠 뒤 수직으로 세워 바깥쪽부터 조금씩 익혀가면서 썰어 먹는 음식이다. 토핑으로 양파나 강한 향신료가 반드시 들어간다. 질긴 육질과 강한 냄새를 피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음식이 바로 케밥이다. 목장이나 좁은 우리에서 사료만으로 길러진 소고기에 익숙하다면, 입에 대기조차 어려운 것이 메소포타미아 소다.

아피온 우시장은 호텔 근처 시장에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드물게 낙타도 보이고 엄청나게 많은 트럭이 몰려 있어 터키의 명물인 낙타 싸움이 벌어지는가 싶어 들렀다. 가까이 가는 순간, 귀에 익숙한 방울소리와 울음소리가 진동을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우시장이다. 적어도 수천 마리에 달하는 엄청난 소가 우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막 태어난 어린 소부터 초대형 육우와 젖소, 수정을 위한 우람한 몸매의 수소도 눈에 띄었다. 소를 사고파는 것뿐만 아니라, 교환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릴 때 기억이지만, 우시장이 있는 시골이 필자의 고향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100여마리 정도의 소를 모아 사고파는 곳이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섬뜩한 기억이 하나 있다. 살인강도사건이다. 이미 반세기 전의 얘기지만, 당시 소 거래는 전부 현금으로 이뤄졌다. 은행이나 수표는 별천지 도시의 문명일 뿐이었다. 소를 판 사람의 현금을 노리는 강도사건이 거의 매달 터졌다. 소를 판 사람은 반드시 친구 서너 명과 함께 귀가하라는 식의 표어들이 우시장 곳곳에 걸려 있었다.

소를 제물로 바치며 키벨레 여신을 위한 의식을 치르던 메소포타미아 석조 유물. ⓒphoto 유민호
소를 제물로 바치며 키벨레 여신을 위한 의식을 치르던 메소포타미아 석조 유물. ⓒphoto 유민호

이슬람 세계로 퍼져나간 소고기 축제

아피온 우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영어가 가능한 터키인을 만났다. 전염병 탓에 멀리 떨어진 채 아우성을 치듯 대화를 나눴다. 왜 이렇게 소가 많은지 물어봤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소들이 주변에 넘쳤기 때문에 지금도 많다는 흥미로운 답이 돌아왔다. 아피온 지방 곳곳에 대규모 우시장이 있다고 한다. 이슬람의 종교행사 중 하나지만, ‘이드 알 아하드(Eid al-Ahad)’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소고기가 이슬람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매년 7월 말이나 8월 초에 열리는 이드 알 아하드는 영어로 표현하면 ‘희생의 축제(Feast of the Sacrifice)’로 풀이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자 이삭을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희생하려 했던 것을 재현하는 의식이다. 아브라함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이슬람도 인정하는 선지자 중 한 명이다. 보통 이슬람 신자들은 이삭을 대신해 양을 희생의 축제 제물로 사용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양보다 소를 희생의 제물로 바친다고 한다. 지난해 7월 31일 열린 이드 알 아하드는 메소포타미아 소가 이슬람 세계 전체에 전파된 기념비적 행사라고 한다. 전쟁 중인 시리아에서부터 멀리는 아프가니스탄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부 26개국에 100만달러 상당의 소고기가 전달됐다고 한다. 이슬람 형제국에 대한 작은 자선운동이지만, 메소포타미아 소고기를 직접 공수해 보낸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받는 순간 너무도 성스럽게 느껴질 만한 자선품이다.

메소포타미아는 로마 대제국 당시 풍미했던 여신 키벨레(Cybele)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8세기부터 본격화한 키벨레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육신의 부활에 있다. 소의 피를 통한 세례가 육신 부활을 위한 의식으로 활용됐다. 인간 탄생이 피범벅이 된 자궁 속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를 되살린 원시적인 세례다.

이후 기독교에서 물을 통한 세례로 변해가지만, 키벨레 신앙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부활론의 뿌리 중 하나에 해당한다. 주목할 부분은 고대 로마인의 영혼을 사로잡은 키벨레 신앙의 출발지가 아피온 우시장 근처라는 점이다. 정확히 북서쪽으로 약 100㎞ 정도 떨어진, 아이자노이(Aizanoi)라는 곳이다. 소의 가축화와 소의 농업 활용, 소의 신앙화를 통한 부활론과 이슬람 세계에 제공된 자선운동으로서의 소…. 전부 아피온을 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됐다. 문화문명사적으로 볼 때 소가 부정적으로 묘사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소는 농경민족인 한국인뿐만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특별하고도 귀중한 존재로 각인돼 왔다. 동물 전체를 통틀어 소만큼 인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도 드물다. 소의 모든 부분, 심지어 담석조차도 우황(牛黄)이란 이름의 구급비상약으로 활용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그 모든 역사와 현실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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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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