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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44호]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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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책]완장 찬 사람이 문제인가, 채워준 사람이 문제인가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pcsun21@daum.net

다수결로 운용되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폭정’으로 흐르기 쉽다. 그래서 다수결의 굴레를 벗어나 정의(justice)를 수호하는 사법 시스템을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법무부(Ministry of Justice)가 앞장서서 그 보루를 뒤흔들고 있다. 특히 책임자들의 기고만장한 모습이 가관이다. 그들은 자리가 주는 마력에 흠뻑 취해 있다.
   
   이럴 때 저절로 눈길이 가는 고색창연한 소설이 있다. 바로 윤흥길의 ‘완장’(1983)이다. 이 소설은 완장이 사람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한다. 특히 ‘흠결 있는’ 사람일수록 완장을 차면 더욱 열정적이다. 악역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자는 의도적으로 그런 사람을 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장의 과도한 열정은 가끔 역풍을 불러온다. 작가는 이런 인간의 복잡한 욕망을 한바탕 에피소드 속에 질펀하게 녹여낸다.
   
   무대는 어느 시골 마을의 커다란 저수지다. 농사꾼이던 최 사장은 공단이 들어서는 바람에 농토를 처분하여 한밑천을 잡는다. 그 돈으로 집장사, 운수업 등을 벌여 졸부가 된다. 그는 관청에 줄을 대어 마을의 저수지 사용권을 따낸다. 마을의 이장 익삼은 최 사장의 조카다. 최 사장은 저수지 감시인을 세우기 위해 조카를 찾아와 한껏 거드름을 피운다.
   
   그동안 저수지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재산과도 같았다. 그런데 최 사장이 사용권을 확보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그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치어를 풀어 넣었다. 곧 유료 낚시터를 개장할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익삼에게 관리를 맡겼지만, 마음이 무르고 마을 이장인 그가 감시 역할을 제대로 하기는 버거운 노릇이다. 이제야말로 깐깐한 감시인이 필요한 것이다.
   
   마침 마을에는 종술이라는 서른쯤 되는 망나니가 있다. 그는 객지를 떠돌다 마을로 돌아와 주변에 갖은 행패를 부리며 살고 있다. 특히 아무리 말려도 저수지에서 막무가내로 낚시질을 하며 익삼과 충돌한다. 최 사장은 익삼으로부터 종술의 내력과 행태를 듣고 나서는 무릎을 쳤다. “내가 찾던 놈이 바로 그런 놈이다. 가서 당장에 그놈을 데려오라.”
   
   종술은 처음에는 시큰둥한 척하다가, 완장을 채워준다는 말에 흥분한다. 그는 월급 5만원의 감시원 자리를 넙죽 수락하고 “하얀 바탕에 ‘감시’라고 붉은 글씨가 박힌 비닐 완장”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더욱 강렬한 완장을 원한다. 그래서 면소재지에 나가 “노랑 바탕에 파란 글씨로 새긴 ‘감독’을 세 개의 빨간 가로줄이 좌우에서 받들고 있는 비닐 완장”을 맞춘다.
   
   그는 새로 만든 완장을 차고 으스댄다. 특히 옷핀으로 왼팔에 고정해 놓은 완장을 습관적으로 괜히 한번 추스르는 동작을 하곤 한다. 면소재지 실비집 작부 부월이와 주모를 찾아가서도 완장을 들이민다. 부월이는 화류계를 전전하다가 급기야 이런 외진 시골까지 흘러들어왔다. 종술과 부월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삶에 대해 애잔한 연민을 품는다.
   
   종술은 그동안 익삼을 들이받았으나, 이제는 몸을 최대한 굽힌다. 그에게 완장을 부여한 두 최씨에게는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안다. 반면 두 최씨만 제외하고는 “내 저수지에 얼씬거리는 놈은 누구든지 가만 안 둔다”고 다짐한다. 어느 틈엔가 저수지는 ‘내 저수지’가 되었다. 그로서는 난생처음 가져 보는 내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은 왕국인 셈이다.
   
   그는 번쩍거리는 비닐 완장을 차고 저수지 둘레를 순찰한다. 마을 사람들은 저수지에 얼씬도 못 하게 막는다. 또한 사정을 모른 채 낚시를 온 외지 사람들에게는 다짜고짜 매타작을 안긴다. 심지어 밤에 몰래 고기를 잡다 들킨 동창생을 그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그는 객지를 떠돌며 익힌 주먹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콧노래를 부른다.
   
   종술의 모친은 이런 아들을 바라보며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남편도 6·25전쟁 때 완장을 찼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아들에게서 남편의 그림자를 본다. 모친은 종술을 타일러도 보지만, 종술은 “이제 겨우 주변에서 사람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며 모친을 윽박지른다. 한편 그는 부월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완장을 번뜩이면서 실비집을 부쩍 자주 드나든다.
   
   어느 날 밤에 부월이는 저수지로 종술을 찾아온다. “우리 어디로 멀찌가니 떠나가서 살 수는 없을까?” 부월은 얼마간 모아둔 돈이 있고 또한 실비집 주모의 패물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말한다. 펄쩍 뛰는 종술에게 부월은 “완장이 밥 멕여 주냐?”고 핀잔을 준다. 둘은 자연스럽게 합체가 된다.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점점 공동운명체로 묶여간다.
   
   한편 완장에 대한 종술의 집착은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치고 만다. 그는 젊은 계집들을 데리고 저수지로 낚시질을 하러 놀러온 최 사장 일행을 가로막는다. 최 사장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종술은 “사장님이 본을 보여야 한다”며 막무가내다. 급기야 최 사장은 그를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감시인으로 세운다. 하지만 종술의 협박으로 모두들 꽁무니를 뺀다. 그는 여전히 완장을 차고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그에게 ‘완장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해 최악의 가뭄이 닥치자, 급기야 관청에서는 저수지의 완전 방류를 결정한다. 이로써 최 사장의 유료 낚시터 계획도 무산되고 만다. 그럼에도 종술은 완장을 찬 채 여전히 저수지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방류 전날, 경찰이 익삼을 앞세우고 종술을 찾아온다. 모친은 부월이를 찾아가 아들과 함께 달아나라고 간청한다. 그날 밤 부월은 저수지 모퉁이 은신처에 숨어 있던 종술을 찾아와 완장을 빼앗아 물에 던진다. 그 길로 둘은 줄행랑을 친다.
   
   이튿날 저수지 수문이 열리자 물이 쏟아져 나간다. 갑자기 사람들이 소리를 지른다. “완장이다!” 알록달록 빛깔도 요란한 완장이 물 위에 동동 떠 있다가, 수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종술의 모친도 그 광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저수지 바닥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건져내는 일꾼 패거리에 낀다. 그래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완장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을 풍자하고 조롱한다. 흔히 멀쩡한 사람도 완장을 차면 돌변한다고 한다. 그러니 ‘흠결 있는’ 사람이 완장을 차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아마 수많은 사회적 직책 가운데 공직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완장일 것이다. 그래서 공직의 임용절차는 민간직보다 까다롭다. 장관직 이상은 국회 인사청문까지 거쳐야 한다.
   
   특히 사법 관련 공직만큼 확실한 완장도 없다. 그 위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람이 추미애 법무장관이다. 여권 지지층 내에서 그의 정치적 아킬레스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가담이다. 그는 재임 중에 완장을 활용하며 극렬지지층에는 어필했지만, 정작 법치는 후퇴시켰다. 그의 과한 욕심은 역풍도 초래했다. 택시운전사 멱살을 잡은 차관은 양념이다.
   
   소설에서 표면적 주인공은 종술이지만 막후 주인공은 최 사장이다. 작가는 완장을 찬 종술을 별도로 징벌하지 않는다. 이미 심적 충격을 받은 그에게 되레 따뜻하게 숨통을 틔워준다. 반면 그에게 완장을 채워준 졸부에게는 이권 상실이라는 물적 타격을 안겨준다. 이처럼 작가는 죄는 미워해도 사람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풍자의 금도(襟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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