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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44호]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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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절벽 위 철옹성 지은 아르메니아인들의 디아스포라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silkroad100@gmail.com

▲ 터키 레반틴 바닷가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세운 일란칼레성. photo 유민호
‘여행=자신과의 대화’. 성인이라면 대부분이 동의할 여행관이다. 평소 잊고 있던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 여행이다. 기본적으로 옳은 얘기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다른 관점도 눈에 들어온다. 개인적 체험에 따른 것이지만, 세상의 유혹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는 불혹(不惑), 즉 대략 40대부터는 ‘여행=역사와의 대화’라는 관점도 들어온다. 한반도는 물론 지구 전체를 지키고 이어온 문화·문명에 빠져들게 된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 즉 50대부터는 어떻게 될까? ‘여행=신과의 대화’로 진화한다. 신이 만든 자연도 대화의 중심에 선다. 저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나타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삶이 두려우면 철학을, 죽음이 두려우면 신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던가. 60대의 여행부터는 누구와의 대화가 이어질까?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에 어떤 대화 상대가 등장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에 어울리는 멋있는 상대가 나타날 것이란 점이다.
   
   
   예루살렘 ‘거룩한 무덤 성당’을 지키는 6개 종파
   
   ‘거룩한 무덤 성당(Holy Sepulchre)’은 신과의 대화에 눈을 떴던 7년 전 여행지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 기독교인이라면 평생 한 번은 가봐야 할 성지순례 영순위에 해당하는 곳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로 부활 이후 제자들과 만난 뒤 하늘로 승천한 곳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체류 당시 예수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 길(Via Crucis)’에 매일 들렀다. 예수는 같은 유대인의 손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다. 고문과 조롱 속에서 14개 피의 흔적을 ‘십자가 길’에 남긴다. ‘거룩한 무덤의 성당’은 신의 아들이 피를 뿌리며 걸어갔던 ‘십자가 길’의 종착점이다.
   
   이스라엘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숨이 끊어질 듯한 긴장이 나라 전체에 표류한다. 풀도 나무도 없는 삭막한 자연 풍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체재 중 곳곳에서 총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땅으로 느껴진다. 다시 말해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땅이다. 결국 체류 하루하루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종교만이 아닌 역사·문화·문명이란 관점에서 ‘거룩한 무덤 성당’과 십자가 길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2000년 전의 환경이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도시겠지만 그래도 상상력을 동원해 예루살렘의 역사·문화·문명, 그리고 인간에 대해 살펴봤다.
   
   기억에 남고 새겨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지만 전혀 몰랐던 ‘신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이스라엘 여행 중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는데, 신세계의 주인공은 아르메니아였다. 역사책에서나 가끔씩 비치던 아르메니아가 ‘거룩한 무덤 성당’과 주변 답사를 통해 뇌리에 깊이 새겨지게 됐다. 당시 가장 놀랐던 것은 ‘아르메니아=고대도시 예루살렘의 수호신’이란 점이다. 일단 성지순례 영순위인 ‘거룩한 무덤 성당’을 관리하는 6개 종파 가운데 하나가 아르메니아라는 점이 인상 깊다. 그리스정교, 가톨릭, 시리아정교, 콥트, 에티오피아정교와 더불어 아르메니아가 예루살렘 최고의 성전을 지키는 주인공이다. ‘거룩한 무덤 성당’만 놓고 보면 개신교는 예루살렘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변방의 종파에 불과할지 모른다.
   
   
▲ 오스만제국 당시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지은 이스탄불의 쉴레마니예 모스크. photo 뉴시스

   예루살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
   
   두 번째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현황이다. 가로세로 1㎞에 달하는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긴장과 조화가 병존하는 기묘한 공간이다. 멀리는 고대 로마시대에서부터, 이후 7세기 이슬람의 이스라엘 정복, 11세기 십자군전쟁 원정 이래 전쟁과 평화의 흔적이 곳곳에 뒤엉켜 있다. 수많은 영웅과 야심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지만 21세기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시가지의 주인공은 크게 4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유대, 이슬람, 크리스천, 그리고 아르메니아 지역이다. 21세기 들어 서로의 영역이 무너지고 있기는 하지만 원칙대로 하자면 4개 지구에 4개의 서로 다른 종교와 교파, 민족이 공존해왔다. 4개 지역을 전부 돌아다니며 빠짐없이 관찰했지만 필자가 가장 주목한 공간은 역시 아르메니아 지역이다. 관찰법의 핵심은 현지 사람들의 대화에 있다. 기념품 가게와 거리, 석류즙 찻집과 식당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을 만났다. 직접 만나 얘기를 들으면서 아르메니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영원한 난민’이란 공식은 당시 현장에서 얻은 첫인상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기원전 2000년 즈음부터 등장한 나라가 아르메니아다. 흑해 바로 옆 코카서스 산악지대가 주된 거주지다. 고대의 부자 나라 상징은 지하자원에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청동기 주무대였던 이란고원과 철기의 히타이트를 지탱해온 자원 부국이다. 철·동·은과 같은 지하자원을 메소포타미아 주변 지역에 팔고 관련 도구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국제무역에 눈을 뜬다. 그러나 자원을 가진 부자로 인식되면서 주변 강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나라로 위태로워진다. 평원의 군대는 일사불란한 대규모 군대로 짜여 있다. 반면 아르메니아 같은 산악지대는 소규모 인원으로 구성된 무력이 전부다. 주변 대국들의 연이은 침입으로 나라 자체가 아예 사라지거나 분단·분리된 것이 아르메니아의 지난 역사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난민으로 유럽과 이슬람 국가, 나아가 전 세계로 흩어진다.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경험한 민족 이산, 즉 디아스포라(Diaspora)에 준하는 시련이 아르메니아에 밀려든다. 오스만제국에 의해 자행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르메니아 학살은 수많은 역사적 시련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000년 이상 지속된 나라 잃은 설움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전 세계 최초의 나라다. 서기 301년으로, 당시 로마와 국경을 접하던 시기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3세(Tiridates Ⅲ)가 기독교를 국교로 도입한다. 로마에 비해 12년이나 앞섰다. 무역에 능한 만큼 당시의 국제 정세에 밝은 나라가 아르메니아였다. 기독교의 의미와 영향력을 누구보다 일찍 이해했기에 국교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국교화는 이후 아르메니아의 운명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기본적인 유전자로 되새겨진다. 아르메니아는 이후 큰 아버지 격인 비잔틴제국 등장과 함께 기독교 나라로 발전한다. 그러나 7세기 이슬람의 출현, 13세기 몽골과 나아가 오스만제국의 등장 이후 나라가 갈라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20세기 구소련 체제하에서도 나라 없는 설움은 계속된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메니아가 완전 독립한 것은 불과 30년 전인 1991년 12월이다.
   
   수천 년에 걸친 시련과 더불어 아르메니아 난민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그 결과 현재 300만 인구가 모국 땅에 머무는 데 반해 인구의 3배 정도인 800만은 외국에 거주한다. 가장 많은 곳은 러시아로 100만명이 살고 있다. 이어 미국과 프랑스에 각각 50만명씩 거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결집력과 개개인의 탁월한 능력은 300만 소국 아르메니아를 선민(選民)의 나라로 느끼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신의 특별한 은총이 내려진 나라라는 의미다.
   
   21세기 전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글로벌 유명 인사는 의외로 많다.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아르메니아 파워를 느낄 수 있다.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어렵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프랑스 가수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과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미국은 프랑스와 함께 아르메니아인의 활약이 두드러진 곳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대중들에게 익숙한 인물로 육체파 연예인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과 가수 셰어(Cher), 테니스 선수 안드레 애거시(Andre Agassi)가 있다. 뉴욕타임스 기자로 천안문사건 당시 자전거로 현지에 달려가 특종을 한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경찰국가 미국이 사라진 국제체제를 G-제로(0) 시대라 묘사한 이안 브레머도 아르메니아 후손이다. 정치 무대를 보면 비록 50만 인구에 불과하지만 장관과 수많은 정치가를 배출한 데 이어 현역 하원의원 두 명도 배출했다.
   
   
▲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나라였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수장인 가톨리코스 카레킨 2세. photo 뉴시스

   서구에서 활약하는 아르메니아 파워
   
   아르메니아인이 가진 특별한 파워는 필자가 머물고 있는 터키 메소포타미아 지방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여름부터 발견한 사실이지만,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의 서쪽이자 터키 동쪽 아나톨리아와, 지중해 동쪽 끝 레반틴 (Levantine) 바닷가가 아르메니아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디아스포라의 나라인 아르메니아가 새긴 1000년 이상의 역사가 곳곳에 배어 있는 공간이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현재 안타키아(Antakya)라 불리는 고대도시 안티오크(Antioch)에서 접한 아르메니아의 흔적이다. 11세기 말 시작된 이래 200여년 이상 지속된 십자군전쟁 당시 이슬람 축출의 일등 공신이 바로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아르메니아는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난공불락의 안티오크성(城)을 여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이후 예루살렘 공략과 십자군 보급, 나아가 군 병력 제공까지 십자군과 전방위 동맹으로 나선다.
   
   십자군전쟁 당시 아르메니아의 행적과 관련해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축성(築成)이다. 십자군전쟁은 배를 타고 단숨에 예루살렘 탈환에 나서는 식의 군사작전이 아니었다. 보급선을 고려하면서,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중간 기착지를 곳곳에 건설했다. 레반틴 바닷가나 주변 산에 세워진 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럽에서 이슬람 땅으로 넘어오던 중 쉬기도 하고, 전쟁 물자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수십 군데의 성이 세워진다. 십자군의 현지 안내인 역할을 한 아르메니아는 축성에 남다른 능력을 가진 민족이다. 기독교 국가로서 비잔틴교회를 건설해 본 경험이 축성 기술의 기반이 된다. 철옹성으로 불릴 만한 돌로 쌓은 단단한 성이 십자군 보급선을 따라 줄줄이 건설된다. 성의 설계, 축성 재료 공급, 축성, 수로 확보, 보급품 관리가 전부 아르메니아인의 손에 의해 운영된다.
   
   일란칼레(Yılankale)는 아르메니아의 축성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최고의 모델이다. 지중해 동쪽 끝의 레반틴 바다에 인접한 고대 유적지로, ‘뱀 머리 성’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14세기 이슬람에 의해 점령된 이후 폐허로 남아 있지만, 필자가 지금까지 접해본 그 어떤 성보다도 인상 깊고 아름답다. 비록 대부분 파괴됐지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애착이 간다. 성을 에워싼 주변 절경도 탁월하다. 성 위에서 보면 40㎞ 떨어진 레반틴 바닷가가 눈에 들어온다. 아르메니아인이 12세기에 개척해 100여년간 활용한 절벽 위 철옹성이다. 일단 성 앞의 수직 절벽을 보는 순간 압도된다. 약 100m 높이의 깎아지른 암반 절벽이 버티고 있다. 출입구는 동쪽의 좁은 길이 전부다. 급경사 암반길로 노년층은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고대 성은 비상시에만 사람들이 몰려들 뿐, 평상시 상주인구는 많아야 수백 명에 그친다.
   
   
   축성의 귀재, 십자군에 지어준 성들
   
   아르메니아 성은 보통 3단 구조로 이뤄져 있다. 일란칼레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상업활동도 하는 1차 성곽이 바깥쪽에 형성돼 있다. 1차 성곽을 지나면 또 다른 높은 성이 바위 위에 올라서 있다. 2차 성곽이다. 높이 약 5m의 돌벽이 가로막고 있어 곧장 올라갈 수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에서 내려 주는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한다. 적들이 공격한다 해도 2차 성곽 앞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십자군 보급물자를 어떻게 옮겼는지 궁금하다. 2차 성곽은 암반 위 일란칼레의 꼭대기 땅으로 연결된다. 평평한 땅이 아니라 크고 작은 바위와 함께 울퉁불퉁 굴곡이 심한 공간이다. 둥글게 에워싼 성벽 안쪽에 붙은 돌길만이 평평하게 연결돼 있다. 3차 성곽은 2차 성곽을 내려다보는 큰 건물로 이뤄져 있다. 창문 하나만 보이는 건물로 10m 높이의 45도 급경사 좁은 계단이 유일한 통로다. 건물 크기를 보면 100명 정도 수용할 듯하다. 적이 2차 성곽을 뚫고 들어온다 해도 다시 3차 성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폭 20㎝ 정도의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성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만한 구조다. 당연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지혜와 지식이 겸비된 철옹성은 공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십자군이 엄청난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수십 개의 난공불락 성들이 들어설 수 있었다. 덕분에 아르메니아는 십자군전쟁을 통해 한순간 부자 나라로 변신한다.
   
   아르메니아의 번영과 영광은 14세기부터 급추락한다. 십자군 특수가 끝났기 때문이다. 아버지 격인 비잔틴제국의 운명도 15세기 말에 끝난다. 이후 1991년 독립할 때까지 아르메니아의 수난사는 계속된다. 그러나 나라가 아닌 민족으로서의 아르메니아인의 활약상은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1557년 완성된 이스탄불의 쉴레마니예 모스크(Süleymaniye Mosque)가 그 증거다. 오스만제국의 비잔틴 점령 후 만들어진 당대 최대 규모의 모스크로 현재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 있다. 비잔틴시대 그리스정교의 총본부이자 최대 교회인 아야 소피아(Hagia Sophia)에 필적할 만한, 오스만제국이 자랑하는 최대 최상의 건축물이 쉴레마니예 모스크다. 모스크를 만든 인물은 오스만제국의 미켈란젤로로 불리는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이란 인물이다. 놀랍게도 이 인물 역시 원래 아르메니아인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오스만제국 술탄 전용 건축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간단히 말해, 오스만제국이 자랑하는 모든 건축물이 미마르 시난이나 그의 제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터키 각지에 흩어진 약 300개의 초대형 모스크와 공공 건물이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립됐다. 지난해 말 휴전에 들어갔지만 이슬람 국가에 둘러싸인 아르메니아의 수난사는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과 결집력은 결코 식지 않을 것이다. 시련이 강해질수록 신의 은총과 사랑을 전 세계에 발휘하는 것이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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