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바로 직전의 깔딱 계단을 오르는 등산객들. ⓒphoto 최홍섭
지리산 천왕봉 바로 직전의 깔딱 계단을 오르는 등산객들. ⓒphoto 최홍섭

“숨이 턱턱 막혀 온다. 심장이 너무 뛰어 토할 것 같다. 정상이 코앞인데 죽어도 포기할 순 없지. 마지막 파이팅을 외쳤다.”

마치 히말라야 정상을 눈앞에 둔 알피니스트의 외침 같다. 하지만 사실은 2011년 3월 26일 서울 청계산 매봉(582m)에 처음 올랐을 때 일기다. 누구에게는 산책로 수준이겠지만, 업무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망가지는 저질체력에게 청계산 정상은 히말라야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8년 4월 12일. 저질체력은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리산 천왕봉(1915m)에 처음 올랐다. 멀리 남해 바다까지 내려다보는 남한 땅의 제왕. 평생 한 번 오를 수 있을까 꿈꾸던 장소였다.

이후 지금까지 지리산 천왕봉을 9회 올랐고, 라이벌 격인 설악산 대청봉(1708m)도 8번 등정했다. ‘악산’이라는 치악산(1288m), 월악산(1097m), 월출산(809m)도 거뜬히 다녀왔다. 육산 쪽인 소백산(1439m)은 24번, 태백산(1567m)은 10여회 올랐다. 북한산(836m)이나 수락산(637m) 같은 바위 산도 즐겨 찾는다.

그간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저질체력이 극적으로 변했을까. 물론 체지방률이 2011년에 비해 7년 뒤엔 1.5%포인트 내려갔고, 물렁물렁 허벅지는 근섬유 줄이 엮어져 탄력 있게 변했다. 하지만 큰 변화는 아니다. 등산 외에는 숨쉬기 말고 다른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톨로지 등이 쓴 ‘이것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운동이다’란 책에는 ‘저질체력 극복을 위한 하루 10분 맨몸운동’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하루 10분 꾸준히 운동한다면 저질체력에서 벗어나겠지만, 운동은 죽어도 싫고 먹는 것만 좋아하는 저질체력은 그마저도 거부한다. 기저질환이나 게으름 때문이다. 그래서 등산과 같이 정상에 오르는 기쁨과 거기서 경치를 즐긴다는 목표로 동기부여를 하는 게 중요하다.

대한체육회는 등산의 다양한 효과를 소개한다.

유산소운동인 등산을 하면 심폐기능이 강화된다. 건장한 성인은 160 정도로 심박수를 올렸을 때 체지방 분해 효과가 탁월하다. 허리 주변 근육인 척추 기립근을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 또 ‘행복 호르몬’이라는 엔도르핀과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도록 해준다.

이런 효과에다 코로나19까지 겹쳐 등산은 국민운동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20대 남녀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 서울 인왕산, 청계산, 관악산 같은 곳은 20대 비율이 50대 이상 세대와 맞먹기 시작했다.

서울대 재학생 성예연씨는 “내 친구들도 요즘 등산 가자고 많이 하던데, 등산이 새로운 트렌드”라며 “세대를 초월한 취미가 되었다”고 말했다.

동네 뒷산도 좋으니 작은 성공 경험 늘려야

유튜브에도 인기몰이 중이다. 젊은 부부가 진행하는 ‘헬로트레킹’, 배우 이시영씨가 직접 등산하는 ‘이시영의 땀티’, 목소리 좋은 남성의 ‘싼타TV’ 등을 즐겨 본다.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히 표현해줘 저질체력의 공감을 얻는다. 분명 어려운데 쉽게 올랐다는 유튜브를 보고 무모하게 그 산에 갔다가 원망스러운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등산 전문가 중에는 천왕봉 관련 기록도 많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이재구씨는 첫 등정 33개월 만에 100번 올랐고, 쌀가게를 운영하는 60대 중반 김요섭씨는 하루에만 3~4회 천왕봉을 왕복하는 괴물급 진기록을 갖고 있다. 백두벡터라는 블로거는 지난 2월 11일 무려 383번째 올랐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평생 한 번만이라도 천왕봉을 오르고 싶은 저질체력에겐 꿈 같은 스토리다. ‘韓國人(한국인)의 氣像(기상) 여기서 發源(발원)되다’라고 적힌 천왕봉 정상석에서 인증 샷을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인은 정상 정복에 등산의 목적을 두는 게 문제”라는 비판이 있다. 대신 곳곳에 조성된 둘레길로 가라고 한다. 허리나 무릎에 부담이 많다면 둘레길이 맞다. 하지만 낮은 산이라도 억지로 정상에 오르면 묘한 성취감과 멋진 경치를 누릴 수 있다. 동기부여가 된다.

저질체력이라면 낮은 산부터 도전해 보자. 300m 안팎의 안산, 아차산, 인왕산, 용마산, 우면산 등이 좋다. 일산에 산다면 고봉산도 좋다. 심장과 폐의 부담을 살짝 느껴 보는 단계다. 아차산의 한강 조망은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다.

이어서 청계산, 관악산, 수락산, 마니산 등 500m 안팎도 도전해 본다. 심호흡을 고르고 허벅지 근육의 진동을 느끼게 된다. 다음으로 657m인 하남 검단산을 거쳐, 836m인 북한산 백운대에 오르고 나면 본격적으로 1000m 이상에 도전해 본다.

1500m급 중에 소백산, 태백산, 함백산 등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흙길이 많으며 출발점 고도가 꽤 높아 저질체력이 도전하기에 좋다.

이승복 소년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침으로 유명한 계방산은 1579m로 남한에서 5번째 높은 산. 하지만 출발 지점인 운두령이 해발 1089m이니 정상과의 고저 차가 심하지 않다. 편도 4.1㎞의 등산로도 대체로 부드러워 저질체력이 도전해 볼 만한 코스다.

전남 영암에 있는 월출산 천황봉은 기암괴석으로 난이도가 높다. 중급 이상이라면 천황사 코스나 산성대 코스를 즐긴다. 저질체력은 대신 강진 쪽에서 올라가는 경포대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약수터를 지나 경포대능선삼거리까지 300m 정도 깔딱고개가 나오지만, 천황사나 산성대 코스에 비하면 약과다. 저질체력은 경포대 코스부터 정복한 뒤, 점차 어려운 코스에 도전하면 좋다.

수락산도 경사 70도에 30m 암벽을 타는 기차바위 같은 코스를 저질체력이 고집할 필요가 없다. 유원지에서 내면암과 수락산장을 거치는 코스로 오르면 정상에 비교적 쉽게 도착한다. 훗날 자신감이 붙으면 그때 기차바위에 도전해도 늦지 않다. 수락산과 친해지는 게 우선이다.

충남 청양 칠갑산의 경우 칠갑광장에서 출발하는 3.1㎞ 구간은 평탄한 트레킹 길이다. 등산을 하는 건지, 동네 평지를 걷는 건지 헷갈린다. 마지막 200m 깔딱 철계단만 오르면 정상에 도달한다. 블랙야크 100대 명산 중에서 가장 인심이 후한 코스다. 이렇게 각 산마다 비교적 쉽게 정상에 오르는 코스가 있다. 체면 구긴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다. 우선 쉬운 코스로 성취감을 느끼면서 체력을 강화하는 게 좋다.

지리산 천왕봉 등산로도 여럿이지만, 특이하게 경남 산청군 중산리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편도 2000원)가 있다. 원래 ‘중산리~3.4㎞~로타리대피소(법계사)~2㎞~천왕봉’ 코스는 국립공원공단 안내에도 ‘매우 어려움’으로 표기된다. 된비알을 제대로 경험한다. 하지만 ‘중산리~(셔틀버스)~순두류~2.8㎞~로타리대피소~2㎞~천왕봉’으로 바꿔 보면, 걷는 길이를 600m 줄이고 난이도도 조금 낮출 수 있다. ‘셔틀버스 타면 천왕봉 등정 인정을 안 해 준다’는 속설에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철쭉-억새-단풍, 산의 매력을 느껴라

저질체력에게는 동기부여가 매우 중요하다. 정상에서 펼쳐지는 진달래, 철쭉, 억새, 단풍의 퍼레이드를 목격하면 누가 말려도 자발적으로 찾게 된다.

3~5월이면 진달래로 소문난 강화도 고려산(376m)을 비롯, 철쭉으로 유명한 경남 황매산(1108m), 소백산 연화봉(1383m), 가평 연인산(1068m), 지리산 바래봉(1165m)에는 인파가 몰린다. 황매산은 정상 가까이 주차할 수 있어 저질체력에게는 환영받는 곳이다. 바래봉의 경우 고도는 높지만 임도를 따라 올라오므로 저질체력도 도전해 볼 만하다.

가을에는 억새와 단풍이 손짓한다. 국내 최대 억새 단지인 영남알프스도 저질체력을 부른다. 사슴농장에서 출발하여 5.9㎞의 완만한 도로를 1시간30분 정도 걷다 보면 어느새 해발 900m 간월재에 도착한다. 억새군락지에서 펼쳐지는 황금빛 물결을 보고 나면 매년 다시 찾는다고 한다.

저질체력이라면 단풍 산행도 권할 만하다. 특히 10월 중순 설악산 소공원에서 양폭대피소까지 6.5㎞의 천불동계곡(소공원~비선대~귀면암~양폭대피소)에는 형형색색 절경이 펼쳐진다. 오련폭포 부근의 단풍은 캐나다의 메이플로드가 부럽지 않을 정도. 천불동계곡은 완만한 오르막 지형이라 저질체력도 쉬엄쉬엄 올라갈 수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보면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출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준비운동으로 신체를 예열하면 순발력을 높이고 부상 위험은 줄인다. 최소 10분 이상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권투로도 유명한 여배우 이시영씨는 늘 “등산 직전에 스쿼트(Squat) 자세로 준비운동을 하라”고 조언한다. 허벅지 신경이 활성화되면서 무릎을 보호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마라톤에서 사용하는 러너스하이(Runner’s High)는 등산에도 적용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A. J. 맨델이 처음 사용한 용어인데, 달리기 애호가들이 느끼는 행복감이나 도취감을 말한다. 보통 1분에 120회 이상의 심박수로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러너스하이를 느낀다고 한다.

등산도 초반 20~30분의 고통만 잘 넘기면 몸이 탄력을 받아 가볍게 산을 오를 수 있다. 물론 미리 준비운동을 잘했을 경우다. 저질체력은 본격적인 등산을 하기 전에 운동부하검사를 받아 보는 것도 좋다.

앞서 쉬고 먼저 먹고 천천히 올라가라

산을 오를 때는 발바닥 전체가 땅에 닿도록 하고, 내리막에는 뒤꿈치부터 발이 닿도록 해 무릎에 오는 충격을 줄이며, 스틱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기온 변화를 대비해 저체온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저질체력이라면 산에서 먼저 쉬고 미리 먹는 것도 중요하다. 지리산 치밭목 산장지기를 30년 했던 민병태씨는 “등산할 때 배가 고프다고 느끼면 이미 에너지가 많이 고갈됐다는 것”이라며 “계속 먹어 가면서 허기가 들지 않도록 해야 성공적인 산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저질체력은 초콜릿과 양갱 등 움직이면서 먹을 수 있는 행동식(行動食)을 갖고 다녀야 한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전에 자주 쉬어야 한다. 다만 풀썩 앉지 말고 선 채로 쉬는 것이 허벅지 근육을 계속 생생하게 만든다. 빠른 속도로 올랐다가 오랫동안 쉬는 것은 피로를 더하기 때문에 휴식 시간은 짧게 짧게 자주 갖는 것이 좋다.

국립공원공단에서는 주요 등산로에 표준시간을 정해 두었다. 저질체력이라면 표준시간에서 30~50% 더 책정해도 된다. 그러자면 이른 시간에 등산을 시작해야 한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정상을 원점회귀 왕복하자면 늦어도 오전 8시 이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설악산에서 가장 힘든 ‘오색~설악폭포~대청봉’ 구간은 5㎞에 4시간으로 적혀 있지만, 필자는 1차 등정 때만 표준시간 내에 들었을 뿐 나머지 7번은 모두 초과했다. 국내 최고의 급경사 길에서 10분 걷고 3분 쉬는 식으로 페이스를 조절했는데, 숨이 덜 가쁘고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등산 가는 날에는 심장 기능을 강화하는 코엔자임큐텐(CoQ10)이나 무릎 관절에 도움되는 MSM(식이유황) 등의 영양제를 꼭 먹는데,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 효과는 천차만별이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노력을 통해 천왕봉 준비를 해보자. 막상 지리산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거대하고 기온 변화도 심하다. 저질체력은 꼼꼼히 천왕봉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있다. 천왕봉 가본 사람과 못 가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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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섭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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