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의 고대도시 셀게의 흔적. 스파르타인들이 산꼭대기에 세운 도시로 지금은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photo 유민호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의 고대도시 셀게의 흔적. 스파르타인들이 산꼭대기에 세운 도시로 지금은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photo 유민호

‘고대 로마에서 온 관광객들은 스파르타인이 벌이는 쇼에 참가했다. 고대 스파르타 당시 벌어진 폭력적이고도 현란한 종교의식과 군사훈련 프로그램이 쇼의 주된 내용이다. 쇼의 구성원은 집안의 장남을 제외한 스파르타의 모든 청장년층이었다. 그러나 벌어진 쇼의 내용은 서기 1세기에 ‘재창조’된 스파르타 교육에 불과했다. (로마 관광객처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파르타에 관한 환상을 만족시켜주려는 가짜 쇼에 그쳤다.’

옥스퍼드대학 고대사 교수 피터 소니만(Peter Thonemann)의 저서, ‘고대 유럽의 탄생(The Birth of Classical Europe)’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리스 전체가 로마 치하에 들어갔던 1세기 당시 스파르타의 상황을 설명하는 글이다.

2007년 잭 스나이더 감독이 만든 영화 ‘300’이 생각난다. 영화에서 보듯, 스파르타는 서양 유럽이 자랑하는 역사상 최강의 정예 군대다. 불과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가 전제정치로 얼룩진 아시아의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맞서 싸운다. 페르시아나 이슬람권이 보면 황당한 얘기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전설이자 신화로 이어져 내려온 역사다. 그러나 옥스퍼드대학 교수가 그리는 로마 치하의 스파르타 모습은 찬란한 무용담과 너무도 다르다. 거친 표현이지만, 매춘부로 추락한 공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믿기 어려운 얘기겠지만, 로마는 자신의 점령지를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관광투어를 개발한 나라다. 인생을 즐기면서 살기로 작정을 한 대제국이 로마다. 라틴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로마의 속성을 대변하는 최적의 모토다. ‘오늘을 꼭 잡아라,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다. 내일의 영광이나 미래를 걱정하며 살기보다, 지금 당장 눈앞의 인생을 즐기자는 자세다. 식민지 관광투어는 그 같은 세계관의 반영물이다.

물론 당시 관광객들은 권력자나 부자들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로마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 관광 명소다. 스파르타가 로마의 완전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기원전 146년부터다. 전쟁에서 패한 뒤 로마를 측면 지지하는 2등 국가로 추락했다. 로마는 피로 단련된 스파르타 파워의 실체가 궁금했다. 무(武)를 숭상하는 로마의 풍조로 볼 때 스파르타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호기심은 있지만, 존경과는 거리가 먼 나라가 스파르타였다.

로마 관광객들이 즐긴 ‘스파르타 쇼’

로마 지배하의 스파르타는 어제의 무용담이나, 잔인한 훈련과정을 연출해내는 엔터테인먼트 무대로 전락한다. 마치 진기명기 서커스나 동물원같이 변한 곳이 서기 1세기 스파르타였다. 손님이 모이면서 특별 무대도 신설 확장된다. 지금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지만, 신전이자 쇼 무대로 활용된 ‘아르테미스 오르시아 사원(Temple of Artemis Orthia)’이 스파르타 곳곳에 있었다. 로마 시대 이곳은 인기 절정의 이벤트 공간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수십 명의 어린이를 세워둔 채 채찍으로 때리는 리얼리티 쇼다. 진짜 용사는 채찍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스파르타의 신념이었다. 채찍에 의해 피범벅이 된 채 죽어나간 어린이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살아남은 어린 용사도 있었다고 한다. 로마 관광객들은 이들 생존자에게 음식과 돈을 던져주고, 흥행사에게도 막대한 보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터 소니만 교수는 그 같은 쇼는 가공의 상상력에 불과한 ‘환상’이었다고 말한다. 로마인이 머릿속에서나 상상하던 스파르타의 모습에 맞장구를 치는 과정에서 창작된 ‘억지 퍼포먼스’였다는 학설이다. 과거 스파르타의 현실과는 무관한, 과장되고 분칠을 한 ‘피의 쇼’였다고 말한다. 50대 이상 장년이라면 기억하겠지만, 19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Spaghetti Western)’ 영화 열풍이 일었다. 지난해 작고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주로 깔리는 서부영화다. 아메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한 개척시대 영화지만, 촬영 장소나 감독은 아메리카와 무관한 ‘메이드 인 이탈리아’다. 미국인이 상상하는 서부 개척시대의 환상을 이탈리아가 만들면서 창작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별명이 ‘스파게티 웨스턴’이다. 로마 관광객을 위한 스파르타 이벤트 쇼야말로 20세기 ‘스파게티 웨스턴’의 원조였다고 볼 수 있다. 무적 300인 신화를 만들어낸 나라지만, 로마 치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손님이 원한다면 뭐든지 제공하는’ 상상의 무대로 전락한다.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을 숭상하고 예술을 천시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스파르타 군인 동상. ⓒphoto HISTORY.COM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을 숭상하고 예술을 천시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스파르타 군인 동상. ⓒphoto HISTORY.COM

로마가 우러러본 아테네와 대비

고대 그리스는 서양은 물론 전 세계 인류가 지향하는 품격 있는 문화의 출발점이다. 한반도에 기자조선이 들어섰던 2500년 전, 철학·미학·신학에 관한 논의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 구미 최고 대학을 장악한 지성의 절정은 그리스 역사에서부터 시작된다. 로마 역사가 그리스에서 이어진다고 하지만, 정신사적으로 보면 로마는 그리스의 아류에 불과하다. 그리스를 물리적으로 점령한 나라는 로마였지만 정신적으로 볼 때 철저히 그리스 지성에 점령당한 나라가 바로 로마였다.

그리스가 가진 특별한 의미와 위상을 논할 때 주목할 부분이 하나 있다. 무려 1000여개에 달했다는 수많은 그리스 내 도시국가, 즉 폴리스(Polis)에 대한 구별이다. 그리스는 크게 2개의 폴리스를 축으로 경쟁, 발전한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스파르타와 델로스 동맹의 아테네다. 로마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그리스는 아테네와 그 주변 델로스 동맹에 국한된다. 아테네의 경쟁자인 천하무적 스파르타는 로마에서 이벤트 쇼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반면 아테네는 호기심과 함께 존경의 대상으로 부상한 폴리스다. 같은 그리스권이지만, 로마가 둘을 대하는 자세가 천양지차다. 왜일까? 주먹으로 동네를 평정한 뒤 갖게 되는 골목대장의 관심사에 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왕년의 주먹왕이라 해도, 이미 자신의 부하로 들어온 이상 관심 밖이다. 주먹 세계를 완전 장악한 후에는 여성이나 주변에 어필할 수 있는 아름답고 품격 있는 세계로의 데뷔가 필요해진다. 음악이나 영화에 정통한 친구를 끌어들여 뭔가 고상하게 치장하자는 것이 골목대장의 차기 목표가 될 것이다.

같은 그리스 맹주지만, 인류사에 점철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행적은 180도 다르다. 스파르타는 서로마 쇠퇴기와 더불어 사실상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진다. 아테네는 다르다. 로마는 물론 이후 비잔틴, 르네상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까지 끊임없이 논의되고 추앙받는다. 그리스의 폴리스 역사만으로 보자면 아테네를 누르고 에게해의 왕자로 부상한 건 스파르타였다. 2차례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BC 431~BC 404)에서의 승리자도 스파르타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파워는 일순간에 그친다. 무력으로 아테네를 장악하고 그리스 폴리스 전체의 패자 자리에 오르지만 오래가질 못한다. 힘만 센 깡패로 받아들여질 뿐, 그 누구도 따르려 하지 않은 반(反)문명 점령국에 불과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에 대항하려는 또 다른 폴리스들이 곳곳에서 출현한다. 로마가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일 당시, 대부분의 폴리스는 외부에서 온 로마 편을 들었다.

스파르타인들이 산꼭대기에 세운 나라

최근 셀게(Selge)에 다시 들렀다. 2015년 이래 거의 매년 찾는 고대 도시다. 아나톨리아 지중해에 인접한 터키 최대 항구도시 안탈리아(Antalya)에서 북동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직 관광객은 물론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의 손조차 거의 닿지 않은 미개발 유적지다. 셀게로 들어가는 길 자체가 험하고, 특히 해발 1300m 오지(奧地)란 점에서 개발이나 도굴과도 무관하다. 갈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발굴,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가 아끼는 유적지 중 하나다. 셀게를 무려 6번이나 찾은 이유는 스파르타와의 관계 때문이다. 그리스 역사학자인 스트라보(Strabo)에 따르면 셀게는 스파르타인들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무력을 통해 패한 적이 극히 드물고, 스스로 나서 항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스파르타 유전자의 나라로 통한다. 펠로폰네소스의 스파르타에서 셀게까지는 직선으로 무려 1200㎞에 달한다.

‘스파르타 부재(不在)’는 전 세계 그리스 관련 박물관들의 공통점이다. 스파르타 관련 유물·유적이 거의 없다. 그리스 관련 박물관들에 있는 전시품의 90% 이상이 아테네와 주변 동맹국들의 흔적이다. 스파르타는 조각, 그림, 음악, 건축 같은 예술적인 것들을 경멸한 나라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21세기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들의 생각과 비슷하다. 탈레반이 신을 염두에 둔 반문명·반문화주의자라고 한다면, 스파르타는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세계관 때문에 예술 영역을 무시하고 비판한다. 간단히 말해 ‘예술을 논할 시간에 적과 맞설 수 있는 군사능력을 키워라’라는 것이 스파르타의 생각이다. 예술이 없다는 말은 음악, 철학, 윤리학, 신학도 없다는 의미다. 바로 로마가 스파르타를 동네 힘자랑꾼 정도로 취급한 이유다. 셀게를 자주 찾은 것도 전쟁에 모든 것을 건 스파르타의 어제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펠로폰네소스 스파르타와 피를 나눈 나라인 이상 세상을 보는 눈도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셀게는 강과 계곡을 따라 들어간다. 물살도 빠르고 수량도 풍부한 비교적 큰 강이다. 래프팅 전문점이 수없이 들어서 있다. 한참 들어가니 로마 시대에 지어졌다는 초대형 다리 하나가 협곡에 걸쳐져 있다. 보는 순간 압도되는, 로마 건축사에 남을 걸작이다. 길이 20m의 돌로 만든 아치형 다리로, 바닥에 흐르는 시퍼런 강물로부터 무려 40m 위에 걸쳐져 있다. 공중에 뜬 협곡 사이의 빈 공간을 어떻게 돌로 연결했을까? 이 다리는 로마의 위업을 새삼 절감케 하는 증거다. 추정컨대, 인류 역사상 공적 목적의 다리를 가장 많이 만든 나라가 로마일지 모르겠다. 전혀 모르는 땅과 도시를 다리로 연결해 하나의 경제권·정치권·문화권으로 연결한 나라가 대제국 로마다. 유럽은 물론 소아시아 어디에 가도 ‘메이드 인 로마’ 다리가 들어서 있다.

셀게에 남아 있는 원형극장 유적. ⓒphoto 유민호
셀게에 남아 있는 원형극장 유적. ⓒphoto 유민호

예술을 천대시한 스파르타의 빈약한 유적들

깊은 산길을 달린 끝에 셀게에 도착했다. 곧바로 걸어서 셀게 최고봉 산으로 향했다. 보통 신전은 최고 높은 곳에 들어서 있다. 유적지라고 하지만,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진으로 인해 전부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다. 크고 작은 돌조각들이 널려 있는 것이 셀게의 스산한 풍경이다. 어떤 신을 모시는 신전인지, 어떤 양식의 건축물인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신전이었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공부를 통해 스스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판단해 보자면, 태양의 신 아폴로와 쌍둥이 여동생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최고봉의 주인인 듯하다. 쌍둥이 신전인 셈이다. 스파르타는 늘 두 명의 왕을 뒀다. 한 명의 왕은 늘 전쟁에 나가 싸우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셀게 돌무더기에서 신전의 흔적을 찾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지만, 건물의 하부 기반이 일직선 돌로 구성돼 있고 원반형의 초대형 기둥이 산재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출구가 동쪽이란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해발 1300m에 세워진 도시이기에 바로 앞에 눈(雪)으로 복면을 한 산들이 넘실댄다. 셀게는 전성기 때 2만명이 거주한 부자 나라로 알려져 있다.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목재, 와인, 오일, 지하자원으로 부를 축적한 나라다. ‘예술 부재(不在)’는 신전과 주변 곳곳을 살피면서 알게 된 셀게의 유전자다. 보통 신전 주변 건물은 갖가지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된다. 부서진 상태라고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인간의 손으로 장식된 문양이나 조각이 없다. 갑옷을 입은 상반신 평면 돌조각이 유일하게 발견한 예술의 흔적이다. 너무도 스파르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어로 새겨진 공덕비나 신전 지붕의 돌사자 장식도 없다. 예술·문화의 불모지인 셀게지만, 놀랍게도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유적 공간 하나를 갖고 있다. 바로 극장(Teatro)이다. 앞 무대는 무너졌지만, 다른 곳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평지에 세워진 2층 극장으로, 수용인원은 무려 1만5000명에 달한다. 대리석이 아니라 주변 산의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로마 관광객을 위한 극장은 지었지만, 아테네식 연극 극장은 없는 나라가 스파르타다. 셀게 극장은 평면 2층 건물이란 점에서 로마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의 경우 산중턱의 언덕을 낀 1층 극장이 주류다. 인구가 늘어난 로마 때부터 평지 2층 극장이 생겨난다.

로마 때 세워진 셀게 극장

아테네 문화권의 특징이지만, 어디에 가도 극장이 있다. 인구 5000명 정도의 작은 폴리스에도 웅장한 극장이 들어서 있다. 2만명 인구를 가진, 고대 당시 대도시 셀게는 극장 건설에 몰두한 아테네를 약한 여성에 빗대며 조롱했을 듯하다. 놀고 즐기기보다 7살 때부터 시작되는 땀과 피의 군사훈련만이 스파르타의 윤리이자 운명이다. 로마인이 창조해낸 ‘카르페 디엠’은 생존의 의미와 가치를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생존이 중요하지만, 인간인 이상 1년 365일 생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살 수는 없다. 계급에 기초한 군사강국 스파르타가 아닌, 먹고 마시고 토론하고 상상하면서 살아간 아테네가 인류의 모델로 추앙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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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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