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황등제’라는 큰 저수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물을 빼고 논으로 만들었다.
익산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황등제’라는 큰 저수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물을 빼고 논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오래된 사찰 가운데는 늪지대를 메우고 여기에다 절을 지은 경우가 있다. 늪지대에다가 사찰을 짓는다는 것은 요즘 상식으로는 의외이다. 보통 좌청룡 우백호가 잘 자리 잡고 있는 명당 터에 절을 짓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늪지대는 풍수적 관점에서 볼 때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여기에다 지었을까?

그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용(龍)이 살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동양의 신화에서 용은 물에서 사는 동물로 생각하였다. 서양의 신화에서 용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룡(飛龍)이 주를 이룬다. 커다란 날개를 펴고 입에서는 불을 뿜는다. 서양에서 용은 불을 뿜고 사람과 가축에게 손상을 입히는 괴수로 묘사된다. 몇 년 전에 유행하였던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가장 압권은 용이었다. 여기에 등장하였던 용은 불을 뿜으면서 도시 하나를 파괴시켜 버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서양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여 왔던 용의 이미지가 전형적으로 드러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의 용은 물이다.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등장한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데, 이때 그 대상이 용신(龍神)이다. 용은 비를 내려주는 신이었다. 비(雨)가 문제였다. 서양은 배를 타고 해상무역을 하며 살아온 전통이 강하지만, 동양은 농경사회였다. 농경사회에서 최대 문제는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다. 흉년이 들면 다 굶어 죽는다. ‘靈(령)’ 자를 뜯어 보면 샤먼(巫)이 입(口)으로 주문을 외우면 비(雨)가 내리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신령함의 본질은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비를 관장하는 신이 용신이고, 이 용신은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기 이전까지 농경사회를 지배하던 가장 강력한 신이자 토템이었다. 이런 용들이 사는 곳은 물과 관련이 있다. 바다에도 있고, 강에도 있고, 호수에도 있고, 폭포 밑에도 있고, 아니면 늪지대에도 있었다. 물이 있는 장소 중에서 흙으로 메워서 절을 지을 수 있는 장소는 늪지대이다. 바다, 강, 호수는 메우기가 어렵다. 늪지대는 인력을 동원하면 메우는 작업이 가능하다.

늪지대에 지은 절들

양산의 통도사, 경주의 황룡사, 김제 금산사, 고창 선운사, 치악산의 구룡사 터는 모두 용과 관련이 있는 터이다. 원래 이 터에는 용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용을 내쫓거나 아니면 용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터이다. 거기에다 절을 지은 것이다. 용이 살았다는 것은 이러한 터에 물이 있었거나 늪지대였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익산의 미륵사지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물이 질퍽하던 늪지대였다. 백제 무왕대에 이곳을 메우고 절을 지은 것이다. 절을 짓게 된 계기는 이 터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출현한 사건이다. 가운데 미륵불과 왼쪽에 있는 법화림보살, 오른쪽의 대묘상보살을 가리켜 미륵삼존이라고 한다.

이걸 해석해 보면 미륵삼존은 용이 세 마리 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고대 한국어에서 용은 ‘미르’라고 불렸다. 미르와 미륵은 그 발음이 유사하다. ‘미르’를 ‘미륵’으로 대체하였지 않나 싶다. 토착신앙의 대상인 미르가 미륵으로 변화한 셈이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미르’를 ‘미륵’으로 대체시킨 것이다. 불교의 미륵신앙이 전래되면서 용이 아니라 미륵이 비를 내려주는 신격으로 전환하였다. 미륵삼존이 출현했다는 것은 세 마리의 미르가 출현한 사건이었다. 이는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의 전형적인 결합방식에 해당한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면서 이제까지 믿어 왔던 토착신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유대민족의 ‘야훼’를 한민족이 전통적으로 써 왔던 신의 이름인 ‘하느님’으로 번역한 것처럼 말이다.

신라를 대표하던 국찰인 황룡사에도 용이 등장하고, 백제를 대표하던 국찰인 미륵사지에도 용이 등장한다. 이 둘 중에서 백제 지역이 미륵신앙의 뿌리가 더 강하게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백제 지역이 논농사를 많이 짓던 지역이었다는 점도 관련된다. 신라보다 이쪽이 평야가 많고, 평야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필요하고,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용신앙의 전통이 더 강하게 작동하였던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 미륵신앙은 논농사와 관련 있다는 이야기이다. 익산 미륵사지도 그 주변이 황등, 함열의 널따란 평야지대이다. 여기에서부터 논산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이 거의 곡창, 평야지대이다. 미륵신앙의 토양이 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

미륵불은 새로운 시대의 메시아

전라북도에서 미륵신앙으로 유명한 사찰이 고창 선운사와 김제 금산사이다. 여기도 역시 평야지대의 한가운데에 있는 미륵신앙 사찰들이다. 흥미롭게도 이 세 군데의 사찰 옆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금산사에는 벽골제(碧骨堤)라는 저수지가, 고창 선운사 옆에도 눌제(訥堤)라고 하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익산 미륵사지는 어떤가.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황등제(黃登堤)라고 하는 둘레 70리(27.5㎞)의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이 황등제는 일제강점기에 가둬 놓은 물을 빼고 논으로 전환해서 지금은 사라진 저수지이다. 그래서 백제 무왕 당대에는 미륵사지에 접근할 때 배를 타고 황등제를 건너야 절에 도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충남 부여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따라 내려와 짧은 거리의 육지를 통과하면 다시 황등제가 나타난다. 짧은 거리의 육지 이름이 ‘왕너머’이다. 이 좁은 구간은 사람들이 배를 어깨에 메고 통과하였다는 증거이다. 다시 황등제의 물을 만나 배를 띄워서 노를 저으면 얼마 안 있어 미륵사 정문 바로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바로 이 황등제가 주변의 광활한 농토에 물을 대던 저수지였음은 물론이다. 미륵신앙 사찰 옆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커다란 저수지가 모두 있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러한 호수들의 존재는 용이 살고 있다고 믿기 좋은 여건이었다. 백제가 망하고 난 뒤에는 미륵신앙의 성격이 변화된다. 혁명적 성격이 내포된다는 점이다. 미륵불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메시아로 인식되었다. 미륵이 나타나면 압제에서 풀려 해방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해방불(解放佛)이 바로 미륵불로 신앙되었다. 신라는 미륵신앙이 미륵상생(彌勒上生) 신앙, 즉 하늘에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쪽으로 발전되었다면, 백제는 미륵하생(彌勒下生) 신앙이었다. 미륵이 이 땅에 인간 육신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이 미륵하생이다. 사회변혁 세력의 아이콘이 미륵이었다. 김제 금산사, 고창 선운사가 고려, 조선조에 내려오면서 각종 변혁사상의 근원지가 된 배경이다. 익산 미륵사는 일찍부터 폐사되었지만, 아마도 폐사가 되지 않았다면 금산사나 선운사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혁명세력의 근거지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비를 내리던 용이 미륵으로 변하고, 이 미륵이 양반, 상놈 철폐하는 혁명사상으로 진화한 셈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