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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52호]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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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지리산에서 가장 氣 센 도량에서 벌어진 전투

글·사진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화엄사 각황전의 홍매화.
정유재란 때 석주관(石柱關)전투가 있었다. 아주 치열했고 사상자가 엄청났던 전투다. 이 전투로 전라남도 구례의 성인 남자는 80% 이상 전멸했다고 전해진다. 석주관은 하동과 구례 사이에 있는 지점이다. 서출동류(西出東流)가 섬진강이다. 전라도에서 시작하여 경상도 쪽으로 흘러간다. 영호남을 배를 타고 왕래할 수 있도록 해준 강이 섬진강이라는 점에서 섬진강은 독특한 강이다. 또한 섬진강은 양쪽에 지리산과 광양의 백운산을 끼고 있다. 두 개의 거대한 산자락 사이를 흐른다.
   
   임진년에 전라도를 공략하지 못했던 왜군은 정유재란 때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박살내기 위해서 진격한다. 왜군이 지나는 길은 함양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코스가 있었고, 섬진강을 따라 하동에서 구례로 넘어와 남원으로 들어가는 코스가 있었다. 하동에서 구례로 몇만 명의 대부대 병력이 넘어가려면 조그만 배로는 어렵고 육로를 거쳐서 가야 한다. 화개를 지나서 구례 쪽으로 섬진강을 따라오다 보면 조그만 육로가 있었다. 지리산 쪽으로 붙은 산길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을 따라서 나 있는 조그만 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보부상이나 민초들이 왕래하였다.
   
   
   석주관전투의 힘
   
   구례 쪽으로 들어오면 석주관이라는 관문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돌로 된 큰 기둥이 서 있는 관문이었다. 옛날부터 산길에는 자연적으로 큰 바위가 양쪽에 서 있어서 관문처럼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 이런 돌기둥이 있는 지점은 특별히 주목하였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구분지어주는 징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쪽은 지리산 자락이요, 또 다른 쪽은 섬진강 물인데 그 사이에 난 작은 길이고 여기에 돌 관문이 있다면 이곳은 유사시에 방어하기에 좋은 조건이 된다.
   
   왜군이 별다른 장애물 없이 섬진강을 따라 구례 쪽으로 들어오다가 이 석주관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구례군민들과 지리산권의 승병들이 목숨을 걸고 왜군의 진입을 저지했던 것이다. 이 전투는 1597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일주일이나 열흘 하고 끝났던 전투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너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전투이다. 당시 일본군 병력이 적어도 1만명은 훨씬 넘었을 터인데 어떻게 정규군도 아니고 민간인들이 서너 달 동안이나 방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시 일본 정규군의 전투능력은 세계적 수준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본은 전국시대에 전국의 다이묘들끼리 백년 넘게 치고받으면서 전쟁 기술자 수준으로 전투력이 향상되어 있던 군대였다. 조총과 갑옷을 비롯한 전쟁 무기, 부대별로 꽉 짜인 지휘체계,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로 다듬어진 군대였다. 이에 비해 조선은 정규군도 없고 전투 경험도 없는 일반 농부들과 지리산의 이쪽저쪽 사찰에서 목탁이나 두드리다가 갑자기 소집된 승병들이었다. 이런 민병대가 어떻게 공수부대를 상대로, 거기에다가 수적으로도 우세한 왜군에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구례 사람들이 보여준 죽기 살기의 결사항전이 깔려 있었다. 당시 구례 남자들은 거의 다 죽었다고 전해지니 말이다.
   
   석주관이 무너지고 나서 구례는 사람이 거의 없는 텅 빈 고을이 되었다고 한다. 구례는 전통적으로 큰 부자가 있었다. 바로 왕씨(王氏) 집안이다. 조선시대는 물론 구한말까지도 ‘구례왕씨’들은 전국에서 소문난 부자였다. 석주관 전투에서 이 왕씨들이 앞장서서 싸웠다. 자신들이 가졌던 재물과 목숨을 다 내놓고 싸웠다. 전투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식량이다. 먹을 식량이 있어야 몇 달간 싸울 수 있다. 아마도 이 왕씨들이 몇 달간 수천 명의 군량을 지원하였던 것 같다. 왕씨들은 그만한 재력이 있었다.
   
   압도적인 왜군에 대항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배경은 승군(僧軍)이었다. 지리산은 가로 40㎞, 세로 30㎞의 큰 산이다. 1000m가 넘는 봉우리만 해도 40여개에 이른다. 여기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소위 템플 마운틴(Temple mountain)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이 봉우리 저 봉우리에 불교 암자가 없는 곳이 없다. 그리고 산속 깊이 박혀 있어서 외부인들은 어느 암자에 누가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치외법권 지대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들이 최후 저항지로 지리산을 택하여 군경의 압박 속에서도 3~4년을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지리산이 가진 요새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숨어 살 수 있는 입지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무기가 발전한 20세기에도 이처럼 빨치산이 버틸 수 있었던 산인데 16세기, 1597년에 벌어졌던 석주관전투에서는 지리산의 장점이 더욱 빛을 발하던 시점이었다. 수백 개의 사찰과 암자에 있던 적어도 수천 명의 승려가 이 석주관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추론이다.
   
   지리산은 당취(黨聚)들의 큰 거점이었다. 금강산과 함께 조선 당취(승려들의 비밀 결사조직)의 양대 거점이 지리산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만큼 지리산의 당취들이 대거 승군에 가담하였다고 보아야 하고, 이 당취 승병이 곳곳에서 게릴라 전투를 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석주관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왜군들의 후방을 급습하는 게릴라 전술을 펴기에도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지리산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왜군의 후방을 때리는 전술 말이다. 자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짐작건대 석주관전투는 지리산 당취가 모두 가담한 게릴라 전투였다고 보인다.
   
   
   화엄사는 승군 지휘본부
   
   전쟁 이전에 지리산 당취들의 본부는 바로 의신사(義神寺)였다. 화개 골짜기 입구에서 30리(12㎞)쯤 거슬러 올라가면 있다. 의신사 주변으로 포진된 사찰, 암자에서 튀어나온 승군들이 왜군을 향해 총공격을 하지 않았을까. 왜 이런 추론을 하는가 하면 이 근방의 암자들을 왜군이 철저하게 보복하였기 때문이다. 골짜기마다 왜병들이 쫓아가서 불을 질렀다고 전해진다. 일본도 불교를 믿었다. 왜 같은 불교 믿는 국가에서 부처님을 모셔놓은 암자들을 훼손한단 말인가. 조선 불교의 승군들이 그만큼 골치 아픈 존재였다는 방증이다.
   
   지리산 영신봉(靈神峰)은 이름 그대로 기도발이 가장 잘 받는 봉우리이다. 지금도 영신대(靈神臺)는 영험하기로 유명하다. 영신봉 해발은 1652m이다. 영신봉 아래의 고지에는 영신암(靈神庵)이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1000m 고지까지 올라와서 영신암에 불을 질렀다. 1000m 이상에 있는 암자까지 올라와 불을 질렀다는 것은 참 이례적이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의 전투 상황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왜병 측에서는 이런 암자들까지 불 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의신사 오른쪽 옆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영신봉이다. 영신암까지 왜병들이 불을 질렀다는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 일대의 어지간한 암자는 다 찾아가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도 된다.
   
   석주관전투에 참여했던 승군들이 모였던 집합 사찰은 구례 화엄사였다. 화엄사에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때 승병 2000여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화엄사에 지리산과 호남 일대의 승병들이 총집결했던 셈이다. 석주관전투의 사실상 지휘본부는 화엄사였던 것이다. 화엄사는 의신사와도 산 고갯길을 통해 연결된다. 의신사에서 내당재를 넘고 다시 외당재를 건넌 다음에 한 번 더 고갯길을 넘으면 화엄사에 도달한다. 아마도 당취 본부인 의신사와 현장 지휘본부인 화엄사가 양쪽에서 합동하여 치른 전투가 석주관전투 아니었나 싶다. 이 석주관전투에 참여하였던 승병의 총책임자는 누구였을까. 뇌묵처영(雷黙處英)이 아닌가 싶다. 당시 강원도에서 활동하였던 사명대사 밑에는 승병 900명이, 계룡산 갑사에 있었던 영규대사 밑에는 700명의 승병이 있었다. 그리고 김제 금산사를 중심으로 호남 일대를 커버하였던 뇌묵처영 밑에는 1100명이 있었다. 남원의 교룡산성을 정비하였던 뇌묵처영이니까 아마도 석주관전투의 주력 승병들도 뇌묵처영의 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화엄사는 위치도 특이하다. 지리산의 서쪽인 노고단의 기운이 그대로 내려오는 지점이다. 높이는 지리산 동쪽인 천왕봉이 더 높지만 기운은 서쪽 화엄사가 더 세다. 필자의 체험이 그렇다. 화엄사 템플스테이에 가서 한 이틀 잠을 자보면 그 기운을 느낀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땅바닥에서 쿨렁쿨렁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강력한 지기(地氣)는 척추뼈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온다. 이 지기를 받는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산천을 알려면 기의 맛을 보아야 한다. 기의 맛을 알면 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산이 나에게도 들어오고, 내가 산으로 들어간다. 산인불이(山人不二)다.
   
   
   화엄사에서 주먹 자랑 하지 마라
   
   진정한 산꾼은 산에서 올라오는 지기의 맛을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화엄사에서 2~3일 자고 나면 몸의 컨디션이 확실히 달라진다. 몸이 개운하고, 머릿속이 충만해지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면 주먹으로도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필자는 지리산 둘레의 여러 군데서 잠을 자보았지만 화엄사의 기운이 가장 센 것 같다. 물론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의 맛에 익숙한 선수들은 화엄사 경내에 진입하기 1㎞ 전부터 이 땅에서 올라오는 짱짱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화엄사 근방에 오면 정신이 번쩍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대로 화엄사 승려들의 주먹이 셌다. 이 도량에 살면 자연히 몸이 건강해지고 주먹이 세질 수밖에 없다. 강한 기운을 계율과 경전공부를 통해서 녹이면 고승이 되고, 녹이지 못하면 무술승(武術僧)이 된다. 무술승도 못 되면 주먹이 강해진다. 1960~1970년대에 술버릇이 고약한 남자들이 화엄사에 가서 술주정을 하고 행패를 부리면 화엄사 승려들이 조용하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처사님, 잠깐 대웅전 뒤로 가십시다.” 대웅전 뒤로 간 그 처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신이 번쩍 나도록 라이트 훅, 레프트 훅을 얻어맞았다. 과거에는 괜히 화엄사에 가서 술주정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다.
   
   이렇게 지리산 노고단의 기운이 용솟음치는 화엄사에서 공부한 승려들이 정유재란 때에도 승병으로 앞장섰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 기상이 대단한 절이다. 오늘날에도 화엄사의 각황전(覺皇殿)에 그 기운이 뭉쳐 있다. 얼마전에 가니 각황전 옆에 홍매가 피어 있다. 색깔이 진하고 위용이 당당하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승병들의 혼이 뭉쳐서 피어난 매화 색깔이다. 매년 초봄이면 전국에서 이 홍매 핀 모습을 보려고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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