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아티스트들의 그림이 반스의 운동화로 만들어졌다. 세상의 편견을 깨는 특별한 작업은 반스 강남점에서 전시로 볼 수 있다. ⓒphoto 반스
시각장애 아티스트들의 그림이 반스의 운동화로 만들어졌다. 세상의 편견을 깨는 특별한 작업은 반스 강남점에서 전시로 볼 수 있다. ⓒphoto 반스

시각장애인 신현빈씨가 보는 세상은 다르다. 형태도 색도 단순화돼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흐릿한 형체로 존재하고 비슷한 색은 한 덩어리로 보인다. 선천성 신경아교종으로 잃어버린 시력과 함께 신씨에게는 가능한 일보다 불가능한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가능한 일은 미술이었다. 더구나 화가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현재 대구대 조형예술대학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최근 신씨가 작업한 그림이 글로벌 패션브랜드 반스(Vans)의 운동화로 만들어졌다. 그의 작품이 운동화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활보한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그림을 그려요?”

“그려도 볼 수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런 질문이 당연한 사람들에게 신씨는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술은 무엇인지’,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신씨에게 미술은 수업시간에 점토를 만지거나 종이접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맹학교인 충주성모학교 2학년 때였다. 그는 미술 시간에 시각장애인들의 미술 교육을 지원하는 비영리법인 ‘우리들의 눈(Another way of Seeing·디렉터 엄정순)’을 만나고 불가능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의 꿈을 이끌어준 것은 ‘코끼리’였다.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에게는 상상 속 동물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코끼리’와 비슷한 크기의 그림 그리기 수업에서 신씨는 3층 높이의 큰 체육관을 그렸다. 그런 코끼리를 직접 만나고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리들의 눈’은 매년 맹학교 학생들과 함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코끼리 캠프를 찾아가 코끼리를 직접 만지고 느끼고 냄새를 맡은 후 각자의 ‘눈’으로 만난 코끼리를 작품으로 전시하는 1년짜리 프로젝트이다. 전국 맹학교를 대상으로 2009년부터 시작해 10년간 8개 학교와 함께 했다.

왜 코끼리일까?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우화가 있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서 자기가 본 것만 주장하는 우매한 인간을 이른다.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유쾌한 도발이었다. 아이들이 각자 코끼리를 만지고 느끼고 돌아와 만든 작품은 상상을 초월했다. 코만 있는 코끼리도 있고 귀만 거대한 코끼리도 있었다. 코끼리의 특징이 극대화돼 있었다. 눈 밝은 이들이 똑같이 그리고 만든 코끼리보다 어쩌면 이들이 본 코끼리는 코끼리의 본질에 가까웠다.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은 아이들에게 미지의 세계였고 두려움의 존재였다. 태국에까지 가서 끝내 코끼리를 만지지 못하고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경험은 놀랍도록 아이들을 성장시켰다. 신씨도 코끼리를 만나고 ‘미술’이라는 꿈을 꿀 수 있었다. 신씨는 “처음엔 두렵고 어떻게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우리들의 눈’을 만나고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미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미술은 눈이 아닌 오감의 예술이다. 나만의 방법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눈’은 작가인 엄정순 디렉터가 1996년 설립하고 25년간 이끌어왔다. ‘우리들의 눈’을 만든 것은 ‘본다는 것은 뭘까’라는 작가의 개인적인 질문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 보다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의문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했다. 맹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였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 시각장애 학생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자신을 안내하는 것을 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도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다는 것’은 사전적 정의대로 눈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일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본다’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본다’의 또 다른 방식일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눈’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모두 ‘우리들의 눈’이고 미술을 통해 서로가 보는 방식을 배우자는 취지였다.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우리들의 눈

‘우리들의 눈’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는 ‘시각장애인 미술대 보내기’이다. 신현빈씨는 그 프로젝트의 두 번째 주인공이다. 학원비 등 물심양면 지원을 받고 미대에 진학했다. 신씨는 “여전히 사람들의 편견이 가장 힘들다. 우리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엄정순 작가는 “예술의 역할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현빈이의 도전은 그 자체가 질문이다. 본다는 게 뭐지? 이 질문은 사실 추상적이지만 현빈이 같은 구체적인 사례는 훨씬 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라고 했다. ‘우리들의 눈’의 작업은 맹학교 미술교육을 시작으로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시각장애인 미술대 보내기, 전시, 책, 다큐, 테드,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미술교사 양성, 아트상품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발전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들어갔다.

‘우리들의 눈’의 뜻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반스도 그중 하나다. 신현빈씨가 참여한 작업은 반스와 ‘우리들의 눈’이 함께한 ‘커스텀메이드 by 우리들의 눈’이라는 캠페인이다. 1966년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스케이트보드화 전문으로 출발한 반스는 미국에서 매년 1000만켤레 이상을 판매하고 있다. 반스는 전 세계 97개국에 진출, 각 나라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협업하는 캠페인을 끊임없이 진행해 왔다. 이번 캠페인은 시각장애인 아티스트가 디자인한 신발을 선보이고 판매 수익금 일부는 ‘우리들의 눈’ 후원금으로 사용한다. 신현빈씨 등 시각장애인 3명과 일반 아티스트 3명이 2인 1조가 되어 아트 워크숍, 뮤직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떠오른 영감을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작업은 시각장애 아티스트가 주축이 됐다. 세 작품은 반스의 세 가지 모델의 운동화로 만들어져 한정 판매된다. 신씨의 그림은 황금색 구름 모양이다. 신씨는 “햇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따뜻한 햇빛을 머금은 구름을 생각했다. 구름이 무조건 흰색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고정관념을 깨고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반스도 시각장애 아티스트와의 작업은 우리 사회의 견고한 벽 하나를 깨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반스 강남점에서는 이번 캠페인의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5월 말까지 전시한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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