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4의 도시 툴루즈의 젖줄 가론강을 배경으로 한 도시 전경.
프랑스 제4의 도시 툴루즈의 젖줄 가론강을 배경으로 한 도시 전경.

지난 4월 25일, 드디어 프랑스 남서부의 도시 툴루즈(Toulouse)에 도착했다. 작년 페루 리마에서의 스페인어 연수에 이은 ‘4개국 어학연수 대장정’의 시즌2이다. 코로나19와 함께 시작된 페루 연수는 국가비상사태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그 치열했던 과정은 주간조선의 귀한 지면을 통해 현지 소식으로 이미 소개된 바 있고, 이제 한 권의 책으로도 정리되어 곧 출간할 예정이다.

지난해 11월 페루에서 귀국 후 5개월여간의 재충전을 마치고 다시 프랑스어 연수에 도전했다. 그동안 고심 끝에 연수 계획을 약간 수정했다. 애초에 ‘3개월 연수 3개월 재충전’ 예정을 ‘6개월 연수 6개월 재충전’으로 늘렸다.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는 길어진 페루의 연수 기간과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프랑스어 연수를 3개월에 끝내본들 올해의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할 때 그다음 일정인 중국어나 일본어 연수를 이어가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세 번째는 페루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 나이(67)에도 6개월 스케줄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연수 기간을 늘리는 데 대한 부수적 절차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일단 체류 기간 3개월이 넘으면 반드시 어학연수를 위한 학생 비자를 발부받아야 했다. 페루 연수 때는 원래 3개월 예정이었기 때문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고, 이후 국가비상사태로 인한 체류 연장은 페루 정부 측에서 자동 연장을 해주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결국 어학연수를 위한 비자 발급은 이번이 처음으로, 과정이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혼자 수속을 하는 것보다 어학연수 준비에 더 시간을 쏟는 것이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원의 도움을 받았다.

툴루즈의 프랑스어 어학원 중상급반 학생들. 20~30대로 국적이 다양하다.
툴루즈의 프랑스어 어학원 중상급반 학생들. 20~30대로 국적이 다양하다.

왜 툴루즈인가

보통 유학원을 통해 어학연수 수속을 하는 경우 가장 중요한 상담 내용은 ‘어느 도시에서 어떤 어학원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그 밖에 숙소 및 관련 서류작업 대행도 유학원의 중요 업무다. 현지 어학원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프랑스 대도시는 물론이고 중소도시까지 어학원이 꽤 많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뜻도 되고 고르는 데 꽤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두에게 맞는 최적의 도시는 없다. 도시들마다 장단점이 있는 데다 각자 상황과 배경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훌륭한 장소가 누구에게는 최악의 곳이 될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어학원 선정에는 문제가 없었다. 페루-프랑스-중국-일본으로 이어지는 4개국 어학연수 계획을 세우면서 프랑스어 연수는 툴루즈로 결정해놓은 터였다. 일단 파리는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복잡하면서 주거비 등 생활비가 비싸 피하고 싶었고, 규모가 너무 작은 도시는 무료할 것 같았다. 프랑스 제4의 도시이자 남서부의 중심지인 툴루즈는 그런 점에서 최적지였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보잉사와 함께 세계 항공산업계를 양분하고 있는 에어버스 본사가 있는 도시로도 유명한 곳이다. 어학원은 네티즌 평판이 좋은 ‘랑그 옹즈(Langue Onze)’라는 사설 어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미리 등록 신청까지 마쳐놓은 터였다. ‘B2 level(중상 단계에 해당)’로 등록 신청을 하니 대뜸 레벨 확인을 위해 온라인 시험을 치르라는 요청이 왔다. 시험은 모두 작문으로 구성돼 있었다. 약간의 지문과 함께 5~6개 주제가 제시됐는데, 작문 빈칸들을 보니 막막했다. 오픈북 형식이지만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당황스러웠다.

사실 작문은 개인적으로 필요 없는 영역이었다. 프랑스 회사에 취직해 문서를 만들 것도 아니고 프랑스 사람과 사귀면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계획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험은 시험이었다. 간신히 구색을 맞추어 답안을 제출하니 곧 결과에 대한 연락을 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다행히 결과는 ‘B2 level’이었다. 수업 직전에 구두시험으로 다시 레벨을 확인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라고는 하나 ‘아무렴 작문만큼 힘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숙소.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숙소.

20~30대 세계 청년들이 학원 동기

유학원 측에 비자 서류 대행을 부탁하면서도 과거 랑그 옹즈 어학원과의 이메일 자료를 건네주면서 그대로 진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4월 시작으로 6개월 일정을 계획하고 수속에 들어갔는데 프랑스의 코로나19 상황이 요동을 쳤다. 프랑스는 지난해 12월 15일부터 전국적으로 야간 통행금지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올 1월 18일부터는 EU(유럽연합) 회원국 이외 국가에서의 입국자를 대상으로 출국 72시간 내에 실시한 PCR(유전자증폭) 검사 음성 결과를 제시할 것과 입국 후 7일간 자가격리 준수 서약, 7일 경과 후 PCR 검사 재실시 방침을 발표하였다.

상당히 번거로운 절차가 추가된 데다 제3차 격리령(reconfinement) 가능성도 현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결국 1월 30일 3차 격리령이 발표됐다. EU 비회원국 및 프랑스 간 모든 입국·출국을 금지(불가피한 경우 제외)한다는 것과 모든 입국 시 PCR 테스트 음성 결과 제출 의무화를 골자로 한 내용이었다. 특히 외국인 입국은 준국경봉쇄령으로 불릴 수도 있을 만큼 대폭 강화됐다. EU 국가에서 프랑스로 들어올 때도 PCR 검사를 하겠다는 것과 EU 비회원국에서는 긴박한 동기(motif imperieux)를 제외하고는 아예 입·출국을 금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학연수 비자 발부는 ‘긴박한 동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2월이 지날 때까지 프랑스의 일일 발생 환자수는 2만~3만명 사이에서 더 이상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불안정한 정체 상태를 보였다. 더 이상 비자 발급을 미룰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툴루즈 어학원에 5월부터 20주간의 등록비 지불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비자 수속에 들어갔다. 자가격리 기간까지 고려해 어학원 입학 1주일 전 도착 예정으로 항공편도 예약했다.

남은 문제는 숙소였다. 학생비자 발급을 받기 위해서는 어학연수 지역에서 적어도 3개월 이상의 주거증명서가 필요했다. 주거증명서는 집주인이 해주어야 하는데 당연히 미리 돈을 내야 했다. 유학원에서 추천해 준 숙소는 학생용 1인 스튜디오였지만 나이를 생각해 비싸더라도 넓고 안정된 곳을 찾고 싶었다. 사용 후기를 통해 컨디션 확인이 가능한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침실과 거실이 따로 있는 빌트인 집을 구했다. 어학원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위치였다.

다음은 학생비자 수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국도 시국인 데다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프랑스대사관의 담당 부서인 교육진흥원(Campus France) 홈페이지에서 회원 등록을 한 다음 관련 서류들을 제출하고 나니 면접관과 화상면접 일정이 잡혔다. 면접은 한국어로 어학연수 동기 등에 대해 물은 후 프랑스어 수준을 확인했다. 3개월 거주증명서를 포함한 학생비자 신청 서류 등을 최종적으로 제출하고 2주 반쯤 후에 비자가 택배로 집에 도착함으로써 1차 관문을 통과했다. 비자 속의 ‘Etudiant(학생)’이란 단어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출발 전 두 번째의 관문은 출발 72시간 내의 코로나19 바이러스 검사(RT-PCR) 음성 결과지였다. 검사에 대한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하철도 탔고 헬스클럽에 가서 열심히 운동도 했다. 페루에서 귀국 후에 이런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접촉한 사람만 해도 수를 셀 수 있겠는가! 특히 최근 국내 상황을 감안하면 이른바 무증상 감염의 확률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다. 검사 결과가 양성이 나온다면 애써 짜놓은 출국과 어학연수 계획은 엉망이 되고 정신적·금전적 손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주위 사람들에 대한 피해다. 가족은 물론이고 나의 동선에 무심코 얽힌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일시에 민폐 덩어리가 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다행히 음성이 나왔고 지난 4월 24일 인천공항을 떠나 파리를 경유하여 4월 25일 툴루즈에 무사히 도착했다. 현재 프랑스는 인도,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남아공 등 일부 고위험 국가들을 제외한 국가군의 입국자들에게는 일주일 동안 자율적으로 자가격리를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입국할 때 격리에 대한 어떤 언급이나 주의사항도 없었고 실제로도 아무런 감시 절차가 없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규정으로 보였다. 그렇더라도 일주일간 자가격리를 하고 어학원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떳떳하다 싶었다. 비행기 시간도 거기에 맞췄다.

드디어 5월 3일 첫 수업을 위해 어학원에 갔다. 학원은 전형적인 프랑스풍의 고즈넉한 골목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필자가 속한 중상급반에는 10명 가까운 수강생이 있었는데, 멕시코·에콰도르·브라질 등 남미국가 출신과 베트남 2명, 이란 출신 등 다양했다. 나이는 모두 20~30대로 대부분 현지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까지는 필자처럼 순수하게 어학연수를 위해 온 경우는 제한적으로 보였다.

어쨌든 이 학원에서 6개월 남짓 치열하게 공부에 매진할 것이다. 주위 학생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금 필자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수 성과를 거두려는 의지로 불타고 있다. 그 과정을 주간조선의 귀중한 지면을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것이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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