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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8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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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천연가스 바다 앞 철옹성에서 ‘토사구팽’을 떠올리다

바그라스(터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2021-05-18 오전 10:51:53

▲ 십자군의 핵심이었던 템플기사단이 거점으로 활용한 터키 바그라스의 성. 해발 452m에 들어선 철옹성이다. photo 유민호
지중해 동쪽 끝 바다 레반트(Levant)가 글로벌 뉴스 메이커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북쪽의 터키와 남쪽의 그리스로 지배권이 나뉜 사이프러스(Cyprus)섬 주변 바다가 레반트다. 발단은 천연가스다. 바다 곳곳에서 천연가스가 발견되면서 소유권 다툼이 일고 있다. 터키, 그리스, 레바논 북부 사이프러스(터키권), 남부 사이프러스(그리스권), 시리아, 이스라엘, 요르단 등 무려 10여개 나라가 이해당사자들이다. 현재 실질적으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나라는 터키다. 레반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레반트 가스전 확보를 위해 독자 채굴에 나선 상태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초 이곳에서 대규모 가스원을 찾아냈다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현재 주목할 나라는 프랑스다. 터키 채굴을 불법이라 주장하며 레반트에 수시로 전함을 파견하고 있다. 터키가 국제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채굴에 나서서 자국 소유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 프랑스는 레반트와 무관하다. 그런데 유독 터키의 독자적 행동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나라가 프랑스다. 그리스와 남부 사이프러스도 프랑스를 끌어들여 터키의 일방통행 저지에 나서고 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를 거들면서 터키 견제에 나서고 있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항공모함 파견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 프랑스 정부의 입장이다.
   
   사실 프랑스의 레반트 관여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무려 1000년 전부터 시작된 역사 그 자체다. 출발점은 십자군(Crusade)전쟁이다. 레반트는 십자군전쟁의 주된 무대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1096년부터 1303년까지 8차에 걸친 십자군전쟁의 주력부대였다. 십자군전쟁은 기독교 중심 서방이 벌인 성전(聖戰)의 대명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십자군이란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한참 뒤인 15세기부터다. 이슬람 원정이 이뤄지던 중세 당시에는 ‘성지순례(Pilgrimage)’ ‘장기 여행(Journey)’이란 표현만이 존재했다. 전쟁이 아니라 순례 여행에 나선 가톨릭 신자 보호가 무력 사용의 근거였다. 군대를 통한 현지 점령이 아니라 현지에 간 기독교도 보호가 십자군 원정의 명분이었다. 17~18세기 행해진 유럽 식민지 확장 당시의 군대 파견 명분과 똑같다. 십자군이란 표현은 후세 역사가들이 붙인 고상한 장식어인 셈이다. 따라서 이슬람 측도 십자군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1차 십자군전쟁이 터진 즉시 ‘프랑크스(Franks)’ 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해왔다. 프랑스군과의 전쟁이란 의미다. 당시 레반트는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 전쟁의 주 무대였다. 어느 날 프랑스 군대가 밀려들자 대제국 비잔틴을 돕기 위해 파견된 용병 정도로 해석했다. 무려 207년간이나 계속될 유럽 연합군에 의한 전쟁이 아닌, 용병 프랑스군에 의한 단기 전쟁으로 이해한 것이다. 지금도 통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을 ‘프랑크스’라 부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십자군전쟁은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루바노 2세(Pope Urban Ⅱ)의 예루살렘 탈환 촉구 설교에서 시작됐다.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에 의해 파괴되고 기독교도들이 살해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유럽인 모두에게 성지 탈환을 요구한다. 곧바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다. 11세기 말 유럽의 모든 생활은 교회로 직결돼 있었다. 시계가 없던 당시, 교회 종소리가 인생 전체의 나침반이었다.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에 따른 교회 율법 준수가 모두의 의무이자 믿음이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교회 종소리에 맞춰진 노예 같은 삶이 중세 유럽인의 현실이었다.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르는 이유다. 아침 기상, 기도, 식사, 노동, 심지어 부부관계도 종소리에 맞춰졌다. 불기름 지옥 속에서의 죄인을 그린 단테의 ‘신곡(神曲)’은 아직 나오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날 경우 천벌이 따를 것이란 믿음이 100% 지배하던 시대다.
   
   
▲ 멀리서 바라본 바그라스 성.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작은 벽돌을 콘크리트로 이어붙인 비잔틴 건축 방식으로 지어졌다.

   십자군전쟁의 주 무대 레반트
   
   주목할 부분은 우르바노 2세가 외친 성전 탈환 설교의 무대다.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이었다. 성지 탈환에 나서는 기독교 신자는 전부 천국에 갈 것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범죄자도 신의 용서와 함께 천국행이 보장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행해진 성전 설교 덕분인지 곧바로 프랑스인들의 예루살렘 원정군이 조직된다. 금시초문으로 들릴 듯하지만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이뤄지기 직전 이미 성전 결사대가 조직돼 현지로 출발했다. 프랑스 농민을 주축으로 한 흙수저들이다. 뜨거운 열정을 기반으로 마치 소풍 가는 기분으로 간단한 식량을 들고 이스라엘 현지로 걸어갔다. 1만~2만명으로 추산되지만 대부분 성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다.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닌 기아와 질병이 주된 이유였다. 보급품과 군대를 기반으로 한 1차 십자군 원정은 설교 1년 뒤인 1096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프랑스에 흩어진 수많은 성(城)의 금수저 자식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왕자들의 전쟁(Princes’ Crusad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성지 탈환 역사와 상황을 이해한다면 ‘십자군=프랑스군’으로 인식하는 이슬람의 시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십자군전쟁은 이후 8차에 걸쳐 진행되면서 기독교 유럽 전체를 하나로 통합해 나간다. 그러나 중심은 여전히 프랑스군이었다. 십자군전쟁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아무런 내실도 없는 소문만 무성한 화려한 전쟁이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8차 원정 가운데 성공한 것은 제1차 십자군전쟁 단 한 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 상태에 있던 이슬람을 기습공격한 제1차 전쟁만이 십자군 승리사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지리멸렬 오합지졸로서의 십자군에 불과하다. 1차 십자군운동을 주도한 프랑스는 무방비 레반트 해안가 도시를 하나씩 점령한 끝에 1099년 7월 15일 대망의 예루살렘 성지 탈환에 성공한다. 프랑스군에 의한 성지 점령인 셈이다. 계속된 십자군 원정에 영국,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제국도 참가하지만 십자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프랑스군이다.
   
   
▲ 흰 천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템플기사단의 옷을 입은 아이들.

   ‘솔로몬의 군대’ 템플기사단의 탄생
   
   십자군전쟁의 주인공인 프랑스군 가운데는 ‘특별한’ 조직이 있었다. 대부분 금수저 왕자들의 종교적 열정하에 이뤄진 성전이었지만 흙수저들이 중심이 된 특수 프랑스군이다. 솔로몬의 군대로 명명된 ‘템플기사단(Knights Templar)’이다. 1119년 예루살렘에서 9명의 흙수저 프랑스인에 의해 창설된 독립 군대다. 군인만이 아닌 교회 수도사도 창설멤버다. 기독교 군대를 수도원 체계로 묶어 활동하는 성(聖)·군(軍) 합일체 조직이다. 창설과 함께 곧바로 급성장한다. 프랑스인이 주축이지만 유럽 전체 기독교도가 흠모하는 조직으로 변신한다. 1139년 교황이 자신의 직속군대로 인정하면서 ‘신의 군대’로 비상한다. 그 결과 전성기 때 템플기사단의 규모는 무려 2만명에 달했다. 레반트 곳곳에 흩어진 그 어떤 국가 지방 단위의 십자군보다 큰 규모다. 당연하지만, 템플기사단은 십자군전쟁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교황 군대라는 명예와 함께 흙수저 특유의 헝그리정신을 통해 십자군 스타로 떠오른다. 템플기사단은 성전을 통한 천국행에 매달리던 흙수저 소외층의 꿈과 희망이 된다.
   
   흥미롭게도 비즈니스 영역이 흙수저 템플기사단이 주목한 분야다. 신의 군대인 동시에, 비즈니스맨으로서의 템플기사단이다. 상품은 예수 관련 유물들이다.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나무, 로마군에 조롱당할 당시 쓴 가시면류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성배(聖杯), 십자가 처형 뒤 시신을 감싼 천 등 모든 것들이 고가로 유럽 교회나 금수저에게 팔려나갔다. 신의 군대에 대한 신뢰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반드시 템플기사단의 사인이 들어간 물건만이 고가로 팔려나갔다. 유럽 교회나 귀족의 성에 가보면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예수 유물이나, 초기 기독교 관련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직간접적으로 템플기사단의 손길이 미친 물건이었다고 보면 된다. 예루살렘발 성구(聖具)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면서 템플기사단은 유럽 초유의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다. 유럽 주요 도시에 지부를 둔 뒤 기사단 후보자 발굴과 예루살렘 성구 판매망으로 활용한다. 유럽 일부 역사가는 13세기 절정기 당시 템플기사단의 경제적 위상이 유럽 최고 수준이었을 것으로 본다. 왕과 교황의 재력을 훨씬 더 능가한 당대 최고의 부자가 템플기사단이다.
   
   
▲ ‘솔로몬의 군대’로 명명됐던 템플기사단의 기사를 그린 그림. photo 위키피디아

   예수 유물로 채워졌을 바그라스 성의 창고
   
   철옹성 바그라스(Bagras)는 템플기사단의 흔적을 살피던 중 발견한 곳이다. 유명한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Issus) 전쟁터에서 남동쪽으로 30㎞ 떨어진 유서 깊은 성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책에도 나오지만 현재와 같은 철옹성으로 무장한 것은 템플기사단이 오면서부터다. 십자군전쟁 절정기이던 1153년 프랑스 기사 가스통(Gaston)이 이끌던 템플기사단이 거점으로 활용한 곳으로 엄청난 자금력을 통해 급조된 성이다. 레반트에서 당시 십자군의 주요 거점인 안티오크(Antioch·현재 지명 안타키아)으로 이어지는 중간 기착지로 활용됐다. 해발 452m 산꼭대기에 들어선, 주변을 압도하는 성이다. 올라가는 길이 경주 불국사행과 비슷한 꼬불꼬불 지형이다. 성은 작은 벽돌을 콘크리트로 이어 붙인 비잔틴 건축 방식으로 지어졌다. 콘크리트는 로마시대 발명된 마법의 건축재료다. 화산재를 섞은 접착제로 로마 멸망 이후 유럽에서는 사라지지만 동로마 비잔틴 건축법에는 남는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높이 30m 정도의 벽돌 콘크리트가 지키고 있다. 들어가는 길은 절벽 등산코스에 필적할 정도로 험난하다. 전쟁터가 아니라 안전한 성에 들어가는 도중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듯하다. 안으로 들어가자 허물어진 성곽이 눈에 띈다. 아치형 기초를 통해 위로 겹겹이 올리는 식의 건축법이다. 완전무장 기사 1000명과 말 500마리 동시수용이 가능했다고 한다.
   
   지중해 어디에 가도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성 꼭대기의 풍경은 평화스럽다. 바람에 파묻힌 적막과 함께 360도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멀리 레반트에서 안티오크로 향하는 좁은 길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가 서린 곳일까? 기독교 신자라면 순례지로 통하겠지만, 성인 바울(Paul)이 세운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들어선 곳이 안티오크다. 바그라스에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창고시설이다. 예상했던 대로 크고 작은 창고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창고의 특징은 단 하나의 좁은 입구를 가진 공간이란 점에 있다. 햇빛 하나 볼 수 없는 깜깜한 감옥 같은 곳이 창고다. 십자군 당시의 성은 군인과 전쟁물자 처리만이 아닌 거래물품 보관소이자 귀중품 보관용 은행 역할도 했다. 유럽 최고 부자로도 통했던 템플기사단의 비즈니스 내역을 고려하면 창고 대부분은 예수나 예루살렘 유물들로 채워졌을 듯하다. 일단 이스라엘에서 파낸 물건들을 바그라스로 옮긴 뒤 배나 육지를 통해 유럽에 넘기는 식이다. 당시 물품의 대금은 현금으로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필요에 의해 오늘날의 수표 제도가 탄생, 발달하게 된다. 예수 관련 유물을 팔면, 일단 수표로 거래한 뒤 나중에 유럽 현지에서 물건이나 돈으로 바꾸는 제도다. 흙수저 집단 템플기사단이 바로 수표 제도 도입과 정착의 원조인 셈이다. 따라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바그라스=뉴욕 월스트리트’로 해석할 수 있다.
   
   
   템플기사단의 비참한 최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은 곧 한국 신문·방송에 등장할 단골 키워드가 될 것이다. 9개월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버리고 버려지는’ 막장 정치가 본격화할 것이다. 이미 곳곳에서 시작됐지만 누가 타깃이 될지 궁금하다. 템플기사단의 최후 역시 토사구팽이다.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한 템플기사단의 영광은 1187년 10월 끝난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Saladin)이 예루살렘을 무혈 점령하면서 십자군의 역사도 저문다. 템플기사단은 이후 패전을 거듭하다가 프랑스로 완전 철수한다. 다시 재기를 노리며 십자군전쟁을 계획하지만 성전의 열기는 이미 바닥으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템플기사단 자체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프랑스 왕 입장에서 보면, 무용지물만이 아닌 방해물로 해석됐다. 프랑스 왕이 아닌, 바티칸 교황 명령체계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도 안 내고 프랑스 주권을 무시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물론 템플기사단이 갖고 있는 막대한 재산은 왕의 마음을 뒤흔든 진짜 이유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Ⅳ)가 템플기사단 총본부 공격에 나선다. 최고사령관을 비롯해 3000여명의 핵심 기사들을 체포한다. ‘13일의 금요일 학살’의 명분은 신성모독, 동성애, 수간(獸姦) 등이다. 엄청난 고문을 통해 자백서를 전부 받아낸다. 나중에 교황이 개입해 사실 여부를 확인했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십자군전쟁 당시 최대 스타는 신성모독이란 불명예와 함께 토사구팽의 첫 번째 타깃으로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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