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현대 창작물에서 자주 활용되는 두 가지에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고전을 큰 고민 없이 리메이크하거나, 고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무의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고전을 현대로 가져올 때는 ‘이 이야기가 왜 하필 지금 이 시기에 다시 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창작물로서 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자칫 원작마저 훼손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영화의 말미에 ‘영화보다 더 큰 문장’을 삽입하는 것이다. 영화가 말하는 바에 비해 너무 큰 의미를 가지는 문장-주로 고전에서 따온다-이 스크린에 등장하면 관객은 그 즉시 혼란에 빠진다. ‘내가 이제까지 본 것이 이런 이야기였다고?’ 간혹 영화로 전혀 형상화되지 않은 것들을 그 한 문장으로 만회하려는 감독도 있다. 영화의 그럴듯한 마무리를 위해 문장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레 미제라블’의 레주 리 감독은 고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오는 것이 현재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 영화의 마지막에 거대한 한 문장을 넣는 것이 영화에 어떤 식으로 힘을 불어넣는지 제대로 증명해낸다.(심지어 제목도 ‘레미제라블’ 그대로 가져왔는데, 누구도 빅토르 위고가 견고하게 쌓은 성에 벽돌 한 장 더 올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구체제와 구체제에 대항하는 민중의 삶이라는 커다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레주 리의 ‘레 미제라블’은 경찰로 대변되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다. 영화에는 크게 네 부류의 인물이 나오는데, 주인공 ‘스테판’(다미앵 보나르)이 속한 경찰 집단, 시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아이들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들은 점차 복잡하게 얽히는데, 그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 무고해 보이는 시민들을 증거도 없이 핍박하는 공권력에 저항하는 핵심 인물이 바로 아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레주 리는 빅토르 위고와 갈라진다. ‘레 미제라블’은 권력 대 반(反)권력의 구도를 넘어,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어떤 비극을 형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주인공 스테판은 파리 외곽 도시인 몽페르메유에 있는 경찰서로 전근을 온다. 강력반 동료인 ‘크리스’(알렉시스 마넨티)와 ‘그와다’(지브릴 종가)는 몽페르메유를 범죄의 온상이라 부르고, 이 도시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사고뭉치 소년 ‘이사’(이사 페리카)는 서커스단의 아기 사자를 훔쳤다는 혐의로 경찰에 쫓긴다. 경찰은 수소문 끝에 이사를 찾지만 그는 혐의를 부인하고, 이사의 친구들이 몰려와 그를 체포하려는 경찰들을 막아선다. 그와다는 필사적으로 도망가려는 이사를 향해 고무탄을 발사한다. 때마침 그들의 머리 위로 드론 한 대가 날아간다. 이 모든 상황을 드론이 촬영한 것이다. 이때부터 크리스와 그와다는 이사를 병원으로 데려갈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드론 주인을 찾는 것에만 골몰한다.

그와다가 고무탄으로 이사를 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경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시장 무리는 이 일을 계기로 경찰을 몰아내려고 한다. 이들은 경찰보다 먼저 드론의 주인을 찾아내려 애쓴다.

이제부터 드러나는 것은 얽히고설키는 어른들의 욕망이다. 경찰 집단은 자신들이 더 큰 힘을 가져야만 범죄자들로부터 도시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한 줌 권력에 불과해 보인다. “내가 곧 법”이라고 말하는 크리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서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시장은 시장대로 동네의 노인과 약자, 빈자들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 자신의 영향력과 이익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인 이슬람교도 '살라'도 예외는 아니다. 드론의 주인 '뷔즈'는 고민 끝에 살라에게 메모리카드를 맡기지만, 살라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메모리카드를 경찰에게 넘겨준다.

더 이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는 이사와 친구들은 어른들이라는 이 거대한 권력에 맞서기로 한다. 비로소 복수와 응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몽페르메유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혁명의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오직 힘과 무기를 이용한 싸움이다.(감독은 영화 중간중간 이를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도 ‘어른들의 말’을 쓰는데, 함께 노는 동생에게 “네 인형 머리 뽑는다”며 윽박을 지르거나 친구들과 물총 싸움을 하면서 “쏴!” “집중 공격”과 같은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끝내 어른 무리를 건물 안으로 유인해 포위하고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어른들을 향해 무기를 꺼내든 아이들의 모습에서 관객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본다. 어쩌면 아이들이 그들의 혁명을 통해 폭력과 차별, 혐오와 구태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그러나 그들이 손에 쥔 것이 결국엔 ‘무기’라는 절망.

영화 바깥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희망과 절망은 여기에서도 공존하고 있다. 160년 전 위고가 말했던 결말(혁명의 승리)을 2020년대에 재현하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절망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실을 고발하는 카메라의 존재(영화 안에선 뷔즈의 드론, 영화 바깥에선 감독 자신의 카메라)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실제로 레주 리는 몽페르메유에서 자란 이민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어린 그에게 카메라는 부당한 것들에 저항하기 위한 도구이자 세상을 바꿀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그는 지금 ‘영화’를 통해 혁명을 말하고 있다.

영화의 엔딩 장면. 소설 ‘레미제라블’의 한 문장이 스크린을 메운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 영화의 의미는 이렇게 또 한 번 확장된다. 아이들을 핍박했던 어른들 역시 ‘나쁜 농부에 의해 길러진 풀’일 뿐이라는 걸. 그리고 모두가 힘을 합쳐 이런 현실을 바꾸지 않는 한 모두의 비참한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걸.

개봉 2021년 4월 15일

감독 레주 리

주연 다미앵 보나르, 알렉시스 마넨티, 지브릴 종가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국가 프랑스

러닝타임 104분

박수영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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