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7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영화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간담회에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주요 작품을 설명한 뒤 향후 계획을 밝히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7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영화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간담회에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주요 작품을 설명한 뒤 향후 계획을 밝히고 있다. ⓒphoto 뉴시스

‘점입가경’이다. 가칭 ‘이건희 미술관’을 서로 유치하겠다고 지자체들이 이런저런 연고를 대고 있지만, 마치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거름 지고 나서는’ 꼴이다. 처음으로 부산시가 이슈를 선점하는 듯 나섰다. 하지만 구체적인 어떤 대안도 없이 “왜 또, 서울이냐?”라는 다소 감성적인 방식으로 부산시민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이후 너도나도 우리 동네에, 우리 마을에 ‘이건희 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앞다투어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차마 웃지 못할 인연을 내세우면서 유치를 주장해 과연 진정한 유치 의사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지금 상황을 보면 마치 예전에 방영되었던 ‘봉숭아 학당’이란 TV프로그램과 그 주인공 ‘맹구’가 떠오른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소셜미디어에 ‘이건희 미술관, 부산에 오면 빛나는 명소가 됩니다’란 글을 올린 이후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고향인 경남 의령도 “이건희 회장의 선대 고향인 의령에 미술관을 유치해야 한다”고 나섰다. 창원시장은 “고 이건희 컬렉션은 국립현대미술관 창원관과의 접목”이라는 제안을 했고, 같은 날 진주시가 숟가락을 얹었다. 남부권의 중심이며 영호남권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조건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이 진주의 지수초등학교를 나왔다는 인연까지 강조했다.

지자체마다 ‘이건희’ 인연 주장

경기 용인시는 호암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고 삼성가 컬렉션을 집대성한 이병철 회장의 유택이 용인에 있다는 점과 에버랜드와의 인연을 내세우고 있다. 또 전남 여수는 유치위원회를 결성해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여수의 자연경관에 반해 부동산을 매입”했던 연을 내세운다. 삼성전자 본사가 있는 수원도 빠지면 서운할 터. 그래서 ‘산업관광의 최적지’를 내세우며 이건희 회장의 유택이 수원이란 점을 들어 수원 유치를 주장했다. 이건희 회장이 태어난 대구도 삼성의 발원지이자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와의 인연까지 내세워 ‘대구유치추진위’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나섰다.

세종시는 현재 국립미술관 부지를 확보한 상태라는 점을 들어 지금 당장이라도 ‘이건희 미술관’ 착공이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예향인 동시에 아시아문화의 전당과 연계해 미술 관련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놓았다. 새만금신도시는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건희의 기업가정신과 새만금의 잠재력이 맞아떨어진다는 주장과 함께 문화예술형 스마트도시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늦었지만 경기도도 경기북부에 위치한 미군 반환 기지를 활용하자고 나섰다. 경기도 내 수원과 용인에 이어 오산과 평택시도 삼성과의 인연, 지역의 균형발전론을 바탕으로 유치전을 위한 각개전투에 돌입했다. 인천은 송도가 최적지라는 주장과 함께 ‘이건희 미술관’의 유치를 주장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오산시가 ‘오산시의 교육·문화·관광 도시’로서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유치를 강력하게 희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유치 경쟁으로 아수라장이 되다시피한 가칭 ‘이건희 미술관’은 진짜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한번 질러보는 주장일까. 우선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매우 자의적이다. 구체적으로 1만3000점, 2만3000건의 삼성가 기증 문화재 예술품의 전모를 파악하고 하는 말일지 의심스럽다. 그 목록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일방적 주장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번 삼성가의 기증 문화재 예술품은 시대적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청동기시대 유물부터 전적류, 서지류, 회화, 도자, 석조, 목가구는 물론 서양근대미술, 한국근대미술,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약 2만5000년의 역사를 담은 방대한 양이다. 따라서 이를 한곳에 모아 박물관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물의 시대와 종류, 재질에 따라서 그에 맞는 수장시설을 갖추어야 하는 한편 다양한 수장품을 유형별로 다루고 연구할 학예연구원(Curator)과 보존수복전문가(Conservator), 이를 등록하고 관리할 레지스트라(Registrar) 등이 필요하다. 소장품의 장르와 유물의 재질이 다양할수록 그에 맞는 전문인력을 갖추어야 한다.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은 프랑스 정부가 오랫동안 유족을 설득하고 제도를 정비해 완성했다. ⓒphoto 뉴시스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은 프랑스 정부가 오랫동안 유족을 설득하고 제도를 정비해 완성했다. ⓒphoto 뉴시스

이미 국립중앙·국립현대에 기증

그런데 이는 비용 대비 효율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렇게 백화점식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합쳐서 만들어진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저개발국가나 신생국가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현재 지방에서 요구하는 가칭 ‘이건희 미술관’의 경우 이 모든 기증 문화재 예술품을 모은 종합적인 박물관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술품만 모은 미술관 또는 문화재 등 유물만 다루는 박물관인지 그 최소한의 성격도 분명하지 않다.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영국의 경우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이 모든 것을 관장하지 않고 고대 유물을 중심으로 수집 관리한다. 예컨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이 공예미술품과 디자인을,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은 초기 르네상스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미술품을,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은 19세기 이후 20세기 미술을 주로 다룬다. 또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는 영국 미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18세기 이후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고, 20세기 이후 현대 디자인 공예의 경우는 다시 디자인미술관(Design Museum)이 다룬다. 이렇게 시대와 재료 등등에 따라 분류하고 전문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삼성가도 기증을 결심하면서 이런 점을 고려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각각 9000여점과 1400여점을 나누어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작품들을 대구와 광주, 전남도립, 양구와 서귀포에 분산해 기증했지만 작품의 성격이나 연고, 연대, 재질로 보아 적절하게 나누어 기증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삼성가는 이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겠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기증 유물이나 미술품들이 각각의 박물관, 미술관의 작품관리 대장에 등재된 상태다. 이를 다시 지방에 건립될 가칭 ‘이건희 미술관’에 보내려면 기증 철회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이미 장가간 장정이 사윗감으로 탐난다고 파혼시켜 내 사위로 들이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욕심이다. 또 이미 기증을 마친 삼성가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칭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에 뛰어든 각각의 지방자치단체들의 그간 문화예술 특히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보면 그들의 주장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유치를 주장하는 자치단체 산하의 박물관·미술관들의 운영 실태나 인적구성, 예산 등을 살펴보면 정말 열악하다 못해 껍데기, 즉 건물만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평소 자신들이 건립한 박물관·미술관을 잘 가꾸고 지켰더라면 이번에 기증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간 자신들이 설립·운영하던 박물관·미술관은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던 자치단체장들이 앞다투어 ‘이건희 박물관·미술관’ 유치를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다.

지난 4월 29일 원희룡 제주지사가 고 이건희 회장의 이중섭 원화 기증과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4월 29일 원희룡 제주지사가 고 이건희 회장의 이중섭 원화 기증과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비 새는 미술관 방치한 곳도

실제로 유치를 주장하는 어느 지역 도립미술관은 십수 년째 작품 구입 예산이 단 1원도 배정된 적이 없다. 또 어느 지방 미술관은 전문직 관장조차 없이 20여년을 넘겼고, 어느 미술관은 비가 오면 색색의 양동이가 설치작품처럼 전시장에 놓이는 실정이다. 또 지방 박물관·미술관의 경우 전문직이라 할 학예연구직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한 사람이 레지스트라, 교육담당(Educator) 등 일인 다역을 수행하고 있다. 또 보존수복전문가와 시설을 확보하고 있는 미술관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이번에 삼성가 미술품을 기증받은 지방 미술관에도 보존수복전문가와 레지스트라가 없다. 미술관이 작품을 인계인수하면서 작품 상태보고서(Condition Report)를 제대로 작성하고, 최소한의 훈증 등 소독을 거쳐 수장고에 넣었는지, 그리고 누가 관리·감독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열악한 실정을 방치하다가 삼성가에서 문화재와 예술품을 몇몇 지방 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하니 너도나도 나서 우리 동네에도 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을 보면 참으로 ‘후안무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처럼 삼성가 소장 기증 문화재나 예술품이 공짜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미술관 유치를 외치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그간 외면했던 문화예술에 대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뒷북치는 듯한 태도에서 진정성이 결여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정말 ‘이건희 미술관’ 또는 ‘이건희 박물관’ 유치에 관심이 있었다면 최소 지난 2월 중순 삼성가에서 상속받은 문화재·예술품의 감정을 의뢰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은밀하게 위대하게’ 움직였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증이 성사되었을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유치 활동을 전개할 때 우리는 이미 이런 노력을 했노라고 기득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상속세나 증여세를 문화재나 예술품으로 낼 수 있는 물납제(AiL·Acceptance in Lieu)를 언급할 때 늘 예로 드는 파리의 피카소미술관(Musée Picasso Paris)의 경우 피카소의 유족들로부터 물납을 받아 미술관을 설립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일단 1973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정부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물납제에서 제외되어 있던 미술품까지 피카소 유족이 물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상속인, 또는 합법적인 상속지분을 가진 이는 예술적 또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예술 작품, 서적, 수집품 또는 문서를 상속세로 지불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해 피카소 그림으로 상속세를 낼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또 프랑스 정부는 물납을 유도하고자 파리시가 소유한 호텔 살레(Hôtel Salé)를 피카소미술관으로 사용하겠다고 유족들에게 알렸다. 파리의 문화예술지구라 할 수 있는 마레지구(Le Marais)에 있는 피카소미술관은 당초 호텔 살레였다. 금융인이었던 피에르 오베르트(Pierre Aubert·1584~1668)가 1630~1640년대에 막대한 부를 이룬 후 젊은 건축가였던 장 드 불리에(Jean de Boullier)에게 의뢰해 지은 건물이었다. 1975년 프랑스 정부가 시 소유의 이 건물을 피카소미술관으로 사용하도록 의결한 후 4인의 건축가를 참여시켜 건물복원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이때 건축가 롤랑 시무네(Roland Simounet·1927~1996)의 안이 선정되어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약 6년여에 걸쳐 개조공사가 이뤄졌다. 이 기간 동안 상속받은 문화재·미술품의 분류와 목록화(Inventory)를 마쳤고, 1979년 상속분쟁을 합의로 마무리한 상속인들이 물납을 완성해 미술관이 개관했다.

이렇게 미술관 하나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지난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인데 이런 과정은커녕 기증인들의 뜻도 묻지 않은 채 ‘지역 발전’ ‘볼 권리’를 외치면서 서로 유치하겠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주장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염치가 없다. 진정으로 유치하려고 하기보다는 ‘네가 나서니 나도 나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길 없다. 특히 지역민들의 표를 의식해 ‘나도 이만큼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정치공학적 태도로 읽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도 희망고문만

게다가 정치인들의 이런 태도로 공연히 주민들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유치를 주장하는 일부 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은 삼성의 문화재·예술품 수집과 관련해 불법차명재산이나 불법자금세탁의 방편으로 사용했다는 비난을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미 2008년 삼성특검에서 이건희 회장의 개인 자산으로 소장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펴고 있고 이에 대해 사과한 이도 없는 것 같다. 그런 처지에 유치를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

이번에 기증된 삼성가 작품들은 분류와 조사 연구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되고 공유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3개의 분관을 통해 지역민들에게도 좋은 감상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지방분관과 지방의 공립미술관과의 협업을 통해 전시해나갈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 전시를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조사, 작품 점검 등등의 절차가 필요한데, 어서 빨리 보여 달라는 일반의 요구에 수증받은 미술관들이 너무 발 빠르고 경망스럽게 접근하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니다. 특히 지방 순회전시를 위해서는 지방 미술관들의 시설 확충, 특히 항온·항습 시스템의 완비와 조명, 보안 등등이 필요하다. 이런 시설 보완과 더불어 작품 수복보존전문가 등 전시기간 중 최소한 작품의 상태를 점검하고 진찰할 수 있는 인력의 확보 등도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기본 조건을 갖춘다면 우리 모두 안복을 누릴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또 지역의 공립미술관들을 확충하고 가꾸면 향후 비슷한 기증이 쇄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또 물납제가 도입된다면 제대로 기능하는 박물관·미술관에 더 많은 기증이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 버스를 다시 불러 세워 돌아오게 한 다음 모두 탈 수 있다는 희망고문은 이제 그만하고 기본을 갖추는 일에 매진하자. 유치를 부르짖는 지자체장이든, 이미 기증받은 박물관·미술관이든 ‘이건희 마케팅’이 너무 과하다. 제발 예의 좀 차리자.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