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부의 2단계 사회정상화 방침으로 카페 테라스 개방이 허용되자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다. 사진은 툴루즈 생조르주 광장 카페 테라스의 2단계 조치 비포(왼쪽) 앤 애프터.
프랑스 정부의 2단계 사회정상화 방침으로 카페 테라스 개방이 허용되자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다. 사진은 툴루즈 생조르주 광장 카페 테라스의 2단계 조치 비포(왼쪽) 앤 애프터.

프랑스 어학연수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대면 수업이 가능한가였다. 작년 페루에서의 스페인어 연수는 팬데믹으로 인한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어학원이 폐쇄되어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프랑스어 연수는 대면 수업이 불가능하다면 선뜻 나설 수 없는 일이었다. 온라인 수업이 아무리 장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학 공부의 특성상 대면 수업이 주는 현장감과 효율성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툴루즈 현지 어학원에서는 대면 수업을 진행한다고 공지를 한 상태였으나 프랑스의 코로나19 상황이 악화일로였기 때문에 언제 어학원 폐쇄를 동반한 사회적 재격리령이 내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올 초부터 매일같이 인터넷으로 상황을 점검하면서 프랑스 정부가 어떻게든 전면적인 재격리령만은 피하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반대 입장이었다. 그는 내년 선거에서 반드시 재선에 성공하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이미 여러 차례 피력한 상태였다. 최근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극우정당의 마린 르펜이 압박해 오는 상황에서 재격리령만은 피하자는 것이 마크롱의 입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 덕분인지 현지에 가보니 다행히 모든 수업은 대면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지난 4월 29일에는 대통령 발표로 4단계 사회정상화 방침이 공표되기도 했다. 1단계(5월 3일부터)는 주거지에서 10㎞ 이상 이동제한 해제와 중·고등학교 수업 재개를 담고 있고, 2단계(5월 19일부터)는 통행금지 시작 시간을 기존 저녁 7시에서 9시로 늦추고 비필수 상업시설, 식당 및 카페의 야외 좌석, 미술관, 박물관, 극장, 공연장, 스타디움 등을 오픈(수용인원을 축소한다는 단서)한다는 내용이다. 이어 3단계(6월 9일부터)는 통행금지 시작 시간을 저녁 11시로 하고 식당 및 카페의 실내 좌석 및 실내 체육시설을 오픈한다는 것이 골자다. 마지막 4단계(6월 30일부터)는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동시에 모든 시설의 수용인원을 정상화한다는 계획이다.

1단계가 시행되자 프랑스 국민들의 반응은 덤덤해 보였다. 그런데 2단계로 식당 및 카페의 야외 좌석 개방이 임박하자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TV에서 연일 나오는 관련 뉴스를 보면서 프랑스인들의 일상에서 테라스가 얼마나 중요한 문화 요소인가를 절감했다. 툴루즈도 마찬가지였다. 툴루즈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카피톨 광장에서는 테라스 허용 전날 이를 축하하기 위해 광장 바닥에 새겨진 옥시타니 십자가를 꽃으로 장식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드디어 2단계 개시일인 5월 19일, 누구보다 마크롱 대통령이 먼저 움직였다. 마크롱이 한 카페를 방문해 테라스에서 장 카스텍스 총리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TV로 생방송됐다. 필자도 변화의 기록을 간직하기 위해 카피톨 광장과 생조르주 광장의 테라스 두 곳을 골라 비포 앤 애프터를 사진으로 남겼다. 쏟아져나온 사람들을 보니 무려 7개월 가까이 테라스의 여유를 즐기지 못해 어떻게 살았을까 싶었다.

카페 테라스 첫날 마크롱 대통령이 테라스에서 카스텍스 총리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TV로 생방송됐다.
카페 테라스 첫날 마크롱 대통령이 테라스에서 카스텍스 총리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TV로 생방송됐다.

툴루즈 시내 표지판 낯선 언어의 정체

팬데믹 상황에서도 나를 낯선 프랑스의 도시로 이끈 프랑스어는 어떤 언어일까? 프랑스어는 17~18세기 절대군주의 상징과도 같은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 시절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유럽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외교 언어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이 강해지자 프랑스어 대신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어의 위상은 현저히 감소했지만 옛 영광의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 우선 프랑스어는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 아랍어와 함께 유엔의 6개 공식 실무언어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유네스코 등 수많은 국제기구의 공식 언어로 채택돼 있다.

현재 프랑스어를 국가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29개국이다. 이 중 프랑스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는 13개국, 다른 언어와 함께 국가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16개국에 이른다. 이외에도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 영향으로 프랑스어를 상용어로 하고 주요 외국어로 학습하고 있는 나라까지 합치면 57개국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참고로 국제 프랑코포니(프랑스어권) 기구의 공식 홈페이지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한국인 수는 5만여명인데 이 중 약 135개의 중·고등학교에서 2만8000명의 학생이 배우고 있다. 또 약 50개 대학교에서 프랑스어 전공 학생 수가 1만여명,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 수가 1만2000명이라고 한다.

툴루즈 시내를 걷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거리 표지판들을 발견하게 된다. 프랑스어와 별도로 다른 언어로 적혀 있는 표지판이 동시에 붙어 있다. 또 유적지나 공원 등 공공시설에서도 동일한 언어로 된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비단 툴루즈뿐만 아니라 근교 도시도 마찬가지다.

이 언어의 정체는 무엇일까? 잠시 역사 여행을 해보자. 로마가 인근 국가들을 차례차례 점령해나가자 국어인 라틴어도 자연스럽게 각 점령지로 퍼져나갔다. 라틴어는 각 지역의 토속어와 섞이면서 ‘통속 라틴어’의 형태로 변형되어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로마제국이 점점 쇠퇴하고 멸망하자 통속 라틴어들도 여러 갈래의 변화를 거친다. 그중 몇 개의 언어는 오늘날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와 같이 한 국가의 공식 언어가 되기도 하고 일부 언어들은 희미한 흔적만 남긴 채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프랑스어라고 부르는 언어는 중세까지만 해도 프랑스 전역에서 사용되는 공용 언어가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루아르강 북부에서 사용되던 ‘오일어(Langue d’oïl)’와 루아르강 남쪽, 즉 오늘의 옥시타니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던 ‘오크어(Langue d’oc)’의 두 가지 언어가 대표적으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남부의 종교 명소인 알비 대성당. 알비 십자군전쟁 직후 지어져 요새를 방불케 한다.
프랑스 남부의 종교 명소인 알비 대성당. 알비 십자군전쟁 직후 지어져 요새를 방불케 한다.

오일어와 오크어에 숨은 역사

아마 대부분 오크어라고 하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족의 언어를 떠올릴 것이다. 오일어는 ‘오일머니’에서의 오일과 연관 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흥미로운 명칭의 유래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Dante Alighieri·1265~1321)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yes’를 프랑스 북부인들은 ‘오일(oïl)’, 남부의 옥시타니 지역 주민들은 ‘오크(oc)’라고 말하는 데서 착안하여 두 언어를 오일어와 오크어로 구별하였다.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단테는 ‘토착어에 관하여(De vulgar eloquntia)’라는 그의 글에서 유럽 언어권을 그리스, 게르만-슬라브, 남유럽의 세 지역권으로 나누고 남유럽 언어들은 다시 ‘예’의 발음에 따라 오일어와 오크어, 그리고 이탈리아의 ‘시(si)어’로 분류했다.

이 중 오크어는 11~12세기 무렵 남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음유시인들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그들은 옥시타니 지역을 중심으로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며 오크어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큰 인기를 얻었는데, 덩달아 오크어도 옥시타니 지역을 떠나 다른 유럽 지역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늘날 지형학적으로 보면 오크어를 구사하던 옥시타니 지역은 프랑스 북부와 스페인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최근 독립운동 움직임이 거센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어는 오크어의 방언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사성이 높다. 다만 오크어는 프랑스어에 더 가깝고 카탈루냐어는 스페인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세까지 팽팽하게 프랑스 남북을 사이좋게(?) 나누면서 오일어와 함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오크어는 어느 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결국 북부의 오일어가 오늘날의 프랑스어로 자리 잡게 된다.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중세까지 옥시타니 지역은 툴루즈의 백작령 등 영주들이 지배했다. 사실상 프랑스 북부의 왕권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1209년 북쪽이 지배권을 잡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카타리(Cathari)파의 그리스도교 이단 사건이었다. 프랑스어로 ‘카타리슴므(Catharisme)’라고 불리던 ‘카타리파’는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툴루즈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남부에서 크게 번성했던 기독교의 한 교파였다. 1176년 툴루즈에서 북동쪽으로 65㎞ 떨어진 알비(Albi)라는 작은 도시 성당에서 처음으로 대중에 알려졌기 때문에 ‘알비파’라고도 불렸다.

툴루즈와 근교 도시의 거리 표지판과 공공시설 설명문에는 프랑스어와 함께 오크어 안내가 있다.
툴루즈와 근교 도시의 거리 표지판과 공공시설 설명문에는 프랑스어와 함께 오크어 안내가 있다.

툴루즈 시청에 프랑스 국기와 함께 옥시타니 십자가 문양을 한 주기가 걸려 있다.
툴루즈 시청에 프랑스 국기와 함께 옥시타니 십자가 문양을 한 주기가 걸려 있다.

옥시타니의 흔적

카타리파의 교리는 자료가 드물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 두 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하나는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선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악한 신이었다. 그들은 악한 신인 ‘물질’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고 금욕생활을 했다. 극렬 신자는 결혼도 아기도 거부했다. 그들은 가톨릭의 물질주의를 맹비난했다. 그들은 상류 귀족들의 언어였던 라틴어 대신 토속 지역어로 대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카타리파는 남부 옥시타니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장했다. 귀족들의 비호는 물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싫어했던 지역 주교들의 동조까지 얻었다.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간주한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Ⅲ)는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협상차 보낸 특사가 살해당하자 교황은 1209년 옥시타니 지역에 대한 십자군 출정을 명령하는 칙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을 성지 수복을 위한 십자군전쟁과 동일시한 것이었다. 당시 칙서에는 이단의 근원인 지역 주민들을 모두 살해하라는 내용까지 있었다고 한다. 로마 교황청의 증오가 얼마나 심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교황의 요구는 프랑스 남부의 지배권을 자신의 왕권 아래 두고 싶어했던 북부 왕조의 필리프 2세와 귀족들의 야심과 맞아떨어졌다. 결국 알비 십자군 원정은 카타리파 신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낳았다. 십자군전쟁은 20년 후인 1229년 툴루즈 백작이 완전히 항복하면서 끝을 맺게 된다. 그 후 툴루즈와 옥시타니 지역은 프랑스 왕실 영토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옥시타니의 패퇴는 오크어의 쇠퇴로 이어지고 프랑스의 공용어로 오일어가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539년에는 프랑스 왕의 칙령으로 공식 사법·행정 용어로 라틴어 대신 오일어, 즉 현대 프랑스어의 사용 방침이 발표됐다. 프랑스혁명 이후 1880년대에 들어서는 더욱 강력한 통일언어 정책으로 강화되었다. 1차 대전 중에는 군대를 통해 현대 프랑스어 보급이 가속화하기도 했다. 1950년에 이르러서는 지역 방언들이 거의 소멸 위기에 처했다가 최근 들어 지역 방언 활성화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재고되고 있다.

옥시타니 지역의 중심인 툴루즈의 경우 거리 표지판이나 유적지·공공시설의 설명문 등을 제외하고는 오크어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어학원 선생님에 따르면 아직도 일부 학교에서는 프랑스어와 오크어를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옥시타니에는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오크어 이해 및 구사 가능 주민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80년대 전후로 옥시타니 문화와 오크어 부흥 운동이 반짝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시내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옛 옥시타니 십자가를 모티브로 한 주기(州旗)의 문양들을 보면 그들의 정서 속에 오크어의 흔적이 어렴풋이나마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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