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무주 적상산의 해발 1000m에 위치한 안국사. ⓒphoto 안국사
전북 무주 적상산의 해발 1000m에 위치한 안국사. ⓒphoto 안국사

북극의 얼음도 녹고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도 녹는 온난화의 시대다. 19세기 중반에 이를 예언한 인물이 일부(一夫) 김항 선생이다. 일부 선생은 한평생을 바쳐서 연구한 끝에 ‘정역(正易)’을 썼다. ‘정역’의 요지는 후천개벽이다. 선천 5만년의 시대가 끝나고 후천 5만년의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게 뭔소리인가 했더니 후천 5만년은 온난화의 시대가 온다는 말이었다.

온난화는 극지의 얼음이 녹는 사태로 다가왔다. ‘정역’에서는 ‘水汐北地 水潮南天(수석북지 수조남천)’이라고 얼음 녹는 사태를 표현하였다. ‘북극의 물이 빠져서 남쪽 하늘로 흘러가는구나.’ 극지의 얼음이 녹으면 바닷물이 넘친다. 탄허 스님이 예언한 ‘앞으로 일본열도는 물에 잠기게 된다’는 내용은 ‘정역’의 이 대목에서 추론한 것이다. 후천개벽이 되어서 여자가 득세하고 일본열도가 물에 잠기는 일보다 우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여름의 더위이다. 35도가 넘어가는 더위를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이 더위의 시대에 명당을 구한다면 높은 데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고지대로 올라가야 한다. 적어도 해발 700m는 넘어선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1000m까지다. 700~1000m까지가 후천개벽 온난화 시대에 인간이 살 만한 곳이 아닌가 싶다.

전북 무주 안국사는 해발 1000m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같으면 일반인은 살기 어려웠던 지점이다. 안국사는 무주 적상산(赤裳山) 정상 부근에 있다. 아파트로 가득 찬 도시와는 온도가 거의 10도 차이가 난다. 삼복더위는 없다는 이야기다. 안국사 들어서는 일주문 위에는 ‘國中第一淨土道場(국중제일정토도장)’이라는 현판 글씨가 써 있다. 무학대사가 적상산의 안국사 터를 가리켜 ‘國中第一吉地(국중제일길지)’라고 평가한 코멘트에서 유래한 현판 제목이다. 또 무학대사는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고도 하였다.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안전한 터라고 예견한 것이다. 그만큼 높고 외진 데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주사고(史庫)의 ‘실록’ 피신 작전

안국사가 무주라고 하는 내륙 깊숙한 지점에, 그리고 해발이 높은 데에 자리 잡게 된 연유가 있다. 바로 사고(史庫) 때문이다. 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창고를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정신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왕조실록을 훼손해 버리면 조선의 정신과 역사가 사라진다고 여기고 보존에 아주 신경을 썼다. 조선 전체에서 가장 안전한 지대에 보관하고자 하였다. 삼재(三災, 전쟁·전염병·흉년)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다 보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주로 절터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사고는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조선 초기에는 4대 사고(史庫)가 있었다. 우선 서울에 내사고(內史庫)가 있었다. 궁궐의 춘추관에다 실록각(實錄閣)을 짓고 보관하였다. 외사고(外史庫)는 처음에 충주에 두었다. 충주사고이다. 그러다가 경상도 성주에다 하나 더 지었다. 다시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추가로 지었다. 이렇게 4군데에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문제가 생겼다.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불타버렸다.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전북 정읍 내장산의 바위굴로 피신시키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여기도 스토리가 있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난리가 나니까 태조의 초상화와 ‘실록’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13대 동안의 임금 기록인 805권 614책 분량이 많아서 말 20여필과 인부 수십 명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인근의 명망 있던 선비 손홍록의 도움을 받았다. 손홍록은 친구, 조카, 하인 등 30여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사고를 옮기는 작업을 필사적으로 진행하였다. 전주에서 정읍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겼다. 내장산 은봉암도 산속 깊숙한 지점에 있는 암자였다. 하루 뒤에 다시 더 깊숙한 지점에 있는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겼다. 용굴암 터도 아주 비상한 지점이었다. 내장산의 최고봉이 신성봉인데 신성봉 아래 절벽에 뚫려 있는 바위굴이 있고 이 바위굴 옆의 암자가 용굴이다. 여기에 보관한 덕택에 전주사고의 실록은 보존될 수 있었다. 조선 초기 4대 사고 중에 3대 사고는 불타버리고 전주사고만 내장산으로 옮겨서 보존한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임란 후에 전주사고 내용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왕조실록’이 복사되었음은 물론이다.

묘향산 거쳐 무주 적상산으로

전주사고의 ‘실록’은 임란 후에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왜병이 남쪽에서 올라왔으니까 북쪽이 안전하다고 여겨 북쪽에 있는 묘향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임란 때 서산대사가 승군을 총지휘했던 장소가 묘향산이다. 평양성까지는 왜군이 점령했지만 묘향산은 점령 못 했다. 전쟁의 피해가 없었던 산이다. 지리산의 장엄함과 금강산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었다고 서산대사가 평가한 산이 묘향산이다. 서산은 묘향산을 우리나라 최고의 산으로 평가하였다. 육산의 장중함과 골산의 날카로운 기세(壯亦秀)를 갖췄다는 것이다. 당대에는 묘향산이 그만큼 안전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묘향산 보현사에 보관되고 있었던 ‘실록’은 이후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옮겨진다. 정묘호란 직전이다. 북쪽에서 여진족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니까 오히려 북쪽의 묘향산이 위험하다고 여긴 것이다. 남쪽으로 옮기자! 남쪽 어디로? 무주 적상산이 적합하였다. 해발 1000m의 고지대인 데다가 내륙 깊숙한 지점이고, 적상산 자체가 요새 지형이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공격하기가 어려운 지형이었다. 거기에다가 적상산 정상 부근이 비교적 평탄한 평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적상산은 산성의 적합지로 주목받아왔다. 일찍이 고려 말의 최영 장군도 적상산에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다. 이렇게 해서 묘향산 보현사에 있던 사고는 적상산 사고로 정묘호란 직전에 옮겨졌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국에 5대 사고가 설치되었다. 서울 내사고는 춘추관이었고, 외사고는 강화도 정족산의 전등사, 무주 적상산의 안국사, 태백산의 각화사, 오대산의 월정사에 설치되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불교 사찰에서 보관한 셈이다. 불교 절에서 유생들이 기록한 조선 역사를 수호하였다. 조선 25대 왕 472년의 기록, 1893권 888책 분량인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왜정 때 서울로 옮겨졌다. 오대산 월정사 사고에 있던 ‘실록’은 일본인들이 도쿄로 가지고 갔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도쿄에 있던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학자들이 빌려갔던 몇 권을 빼놓고 거의 불타 버렸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도 ‘조선왕조실록’에 욕심을 냈다. 서울에 있던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북한 인민군이 이북으로 실어갔다. 현재 김일성대학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6·25 이후에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했는데, 그게 가능했던 바탕에는 안국사가 보존해 왔던 적상산 사고가 있었다. 무주 적상면 사람들은 우파정권이 들어서면 북한에 대고 ‘적상산 사고 돌려달라!’는 플래카드를 내건다. 김일성대학에 있는 ‘실록’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다. 좌파정권에서는 이북 눈치를 보기 때문에 이런 시위를 못 한다.

1980년대 양수발전소 개발로 안국사는 적상산 정상 부근으로 올라갔다. ⓒphoto 안국사
1980년대 양수발전소 개발로 안국사는 적상산 정상 부근으로 올라갔다. ⓒphoto 안국사

사고 관리 위해 중앙정부 인력 파견

안국사는 적상산 사고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사찰이었다. 적상산성 내에 적상산 사고와 안국사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적상산 사고를 보호하기 위해 2개의 사찰이 있었다. 적상산 꼭대기의 호국사, 그리고 호국사보다 해발 200m 아래에 있었던 안국사이다. 안국사는 큰 절이었고 호국사는 작은 절이었다. 1980년대에 적상산 7부 능선에 양수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안국사는 위치를 옮겼다. 위로 올라갔다. 호국사 터에 안국사를 옮긴 것이다. 현재의 안국사 터는 원래 호국사 터였다. 적상산성과 사고를 관리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인력 파견이 있었다. 참봉 2명, 승장 1명, 수복 12명, 군병 84명, 승도 115명 등이었다. 참봉은 조선시대 종9품이다. 최하급의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이 적상산성에서는 전권을 쥐고 있는 계엄사령관의 위치였다. 참봉 두 명은 매달 교대 근무를 하였다. 한 달 끝내고 산 아래의 집에 가 있다가 한 달 후에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오는 근무였다. 당시 참봉 월급은 얼마나 되었나? 쌀 18두, 콩 6두, 조기 9속, 젓갈 4승, 간장 1두, 된장 2승 등이었다. 두(斗)는 한 말, 두 말 할 때의 단위이다. 승(升)은 ‘되’이다. 젓갈은 4되이고 콩은 6말이었다. 참봉 다음에 승장(僧將)이 1명 배치되었다고 나온다.

임란 이후에 전국의 산성은 승려들이 상주하며 관리하였다. 임란 때 승군이 주력으로 싸웠던 전통이 남아서 이후 국방은 승려들이 책임졌다. 서울의 북한산성도 승려들이 쌓았다. 산비탈에 돌덩어리를 운반하여 성벽을 쌓는 고된 작업은 승려들의 몫이었다. 산성이 완성된 후에도 문제였다. 산속의 산성에 머물면서 지켜야 하는데 누가 지키겠는가. 이 지키는 책임 역시 승려들 몫이었다. 산속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지배계층 유생들은 다 어디로 가고 불살생을 계율로 하는 승려들이 국방을 책임지는 시스템이 조선시대였다.

승도도 115명이면 많은 수이다. 유사시 전투 병력이었다. 이 승려들이 거주하던 사찰이 안국사였다. 이름 붙이자면 ‘실록보호승군대(實錄保護僧軍隊)’였다. 여름에 안국사를 가면 시원해서 좋다. 불교는 청량(淸凉)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안국사에 가보면 이 청량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쾌적하다. 주변은 첩첩산중이다. 산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산 너울’의 풍광을 감상하기에는 최적이다. 그리고 정상 부근에는 수백 년 된 참나무 군락지가 있다. 참나무가 풍기는 단단한 기운이 있다. 안국사 주변의 적상산성은 더위의 시대에 산책 코스로는 최고이다. ‘조선왕조실록’과 한국 불교의 사연이 쌓여 있는 사찰이 안국사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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