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문재인 대통령 취임사) 이런 다짐을 하고도 문재인 정권은 곳곳에서 과정의 공정을 훼손했다. 사회적 분노가 들끓었고, 공정이 시대적 화두로 떠올랐다. 그래서 차기 대선 후보들도 앞다퉈 공정을 외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작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파격적 실험이다. 그는 일방적 지명이 아니라, 토론 배틀을 통한 당 대변인단(4명) 선발 방침을 밀어붙였다. 이에 호응하여 무려 5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이처럼 오로지 능력만 보고 사람을 뽑아 쓰겠다는 것이 능력주의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런 평가 방식을 심정적으로 지지해 왔다.

그런데 이에 관한 우리의 상식을 뒤흔들며, 그 부작용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문제작이 있다. 바로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2020)이다. 저자는 과도한 능력주의는 공감, 연대, 시민의식 등 공동선(common good)을 파괴하여 공동체 전반을 황폐화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말 제목은 ‘공정하다는 착각’(2021)이다. 조금 엉뚱하긴 해도 ‘능력주의가 실제로는 공정하지도 않다’라는 다소 부정적 함의를 반영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나의 성공은 내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반면 실패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내 자신의 잘못’이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떳떳한 자격이 있다.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자신의 운명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그들 사이에 어떤 공동체 의식도 없다. 그렇게 능력주의는 현실을 정당화하며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킨다.

성공에는 노력 이외에도 우연이나 운이 작용한다. 출신 계층은 물론, 재능도 우연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성공한 엘리트에게 겸손을 제거해 버린다. 반면 패자들에게는 상처를 주고 존엄까지 잃게 만든다. 즉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심어주고, 패자에게 굴욕을 안겨준다. 사회적 상승을 허용하는 사회, 더구나 그런 상승을 찬양하는 사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능력주의는 그 속성상 더 많은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약속한다. 그것은 서로 먼저 사다리를 오르려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공정함을 추구한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멀리 벌어져 있는지는 문제되지 않는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지 않은 채, 도리어 사다리의 단과 단을 더욱 넓히기조차 한다.

미국의 경우 상위 1%가 하위 50%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한 중위소득이 40년 동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공감을 받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강요된다. 그런 능력주의적 오만의 가장 고약한 측면이 바로 학력주의다.

오늘날 대학들은 현대사회의 기회 배분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다. 그래서 특히 명문대 입시는 극도로 과열되고 있다. 실제로 대학 졸업 여부가 가장 커다란 사회적 균열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심지어 학력은 정당의 계급성까지 대체한 나머지, 고학력자는 좌파 정당에 투표하고 저학력자는 우파 정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굳어졌다.(주간조선 제2580호 본란 참조)

실제로 대학은 사회적 상승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한다. 특히 명문대는 거의 특권층 출신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대학은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주기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 이런 와중에 입시경쟁은 물론, 입학 후에도 성적 경쟁이 치열하다. 이로 인해 패자도 상심이 깊지만, 승자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대학생 자살률은 점점 증가 추세다.

저자는 최고의 성적과 스펙을 요구하는 현행 대학 선발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런 무한경쟁은 현실적으로 특권층에 유리하여, 대학을 그들의 전유물로 전락시킨다. 그 대안으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학생들을 상대로 추첨으로 신입생을 선발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방식이 과도한 경쟁을 막으며 대학을 좀 더 폭넓은 계층에 개방하게 한다.

한편 미국에서 40년 전보다 1인당 국민소득은 85% 늘어났지만, 비대졸자 백인 남성의 실질소득은 오히려 낮아졌다. 그들이 불행감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능력주의 시대는 수많은 중하층 노동자에게 소득 감소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마저 깎아내렸다. 최근 이들 사이에 마약, 약물 과용, 알코올 중독 등이 늘어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은 단순히 소비를 위한 생존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다. 나아가 우리는 일을 통해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잡화상 계산원, 배달원, 의료 보조원, 청소원, 그 밖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이제는 ‘효율성 중심’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시장 조성’으로 정책적 초점을 옮길 때다. 예를 들어 실업 보험금보다 일자리 유지 보조금을 주는 것이 더 낫다. 또한 근로소득세를 줄이거나 없애는 대신에, 금융관련세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카지노처럼 사회적 기여는 적고 수익이 많은 분야에 ‘죄악세’를 부과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배운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능력주의가 엮어낸 관념론이다. 그 환상이 깨진 것이 2016년 트럼프의 당선이다. 그가 재선에 실패했어도 트럼피즘은 여전히 견고하다. 그것이 능력주의가 이대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의 평등’이 중요하다. 그것은 각자의 일을 서로 존중하고,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함께 공적 문제를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능력주의는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자수성가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사회구조 자체가 그 원칙을 뒤흔들고 있다. 또한 과정이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능력주의는 성패를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돌려, 사회적 연대와 시민적 덕성을 해친다. 이처럼 능력주의는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사회 전반에 ‘폭정’을 휘두른다.

이 책은 미국 사회에 관한 비판적 분석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현 정권이 공정을 훼손한 나머지, 요즘 청년들 사이에 ‘과정에 공정하게 끼워라도 달라’는 열망이 크다. 그것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능력주의가 주목받는 이유다. 하지만 저자가 우려하듯이 능력 만능주의로 흐르는 것도 문제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이처럼 정책은 일도양단이 아니라 유기적 결합이 핵심이다. 더구나 공정은 능력주의 논란을 뛰어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오로지 선의만 앞세우는 섣부른 공정론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이제 대선 주자들이 어떤 기발한(?) 공정론을 들고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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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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