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천이 감고 도는 서울 서대문구 옥천암에는 높이 6m 통바위에 백불이 새겨져 있다.
홍제천이 감고 도는 서울 서대문구 옥천암에는 높이 6m 통바위에 백불이 새겨져 있다.

풍수적 관점에서 서울의 환경을 평가하자면 A급이다. 산과 강물이 서울만큼 균형을 이루고 있는 대도시가 드물기 때문이다. 우선 물을 봐야 한다. 물이 있어야 도시에 수기(水氣)를 공급하고, 수기가 있어야만 대도시에 사는 수백만~수천만 명이 정서적인 윤기를 유지한다. 마치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건조함을 보강하기 위하여 가습기가 필요한 이치와 같다.

도시를 둘러싸거나 관통하는 큰 강물이 없으면 도시가 건조해진다. 특히 현대문명이 불의 화기를 에너지로 쓰는 문명이기 때문에 물의 보충이 절실하다. 중국의 베이징이 큰 강물이 없는 도시로 손꼽을 수 있다. 런던, 파리, 로마, 뉴욕, 도쿄 모두 강물과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 베이징에 가면 웬지 건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기를 보강하기 위하여 청나라 말기 서태후 때 이화원에다 커다란 인공호수를 조성하였지만 이걸로는 턱도 없다. 서울은 한강이 도시를 관통한다. 대단히 아름답고 유리한 풍수적 조건이다.

물 다음에는 산이다. 런던, 파리, 뉴욕, 도쿄에 가 보면 주변에 산이 별로 없다. 그러나 서울은 불, 수, 사, 도, 북이 둘러싸고 있다.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이 그것이다. 이 산들도 200~300m의 야산이 아니다. 대개 500m가 넘어가는 높이의 중량급 산들이다. 특히 이 산들은 흙으로 덮인 육산이 아니고 바위가 노출된 골산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서울의 산세를 높이 평가한다. 바위가 노출된 골산에서 기가 세게 나오기 때문이다.

기가 세게 나오면 뭐가 유리한가? 창의력, 영감, 활력이 나온다. 서울을 둘러싼 바위 골산에서 이러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도쿄에 가보면 이런 바위산이 없다. 파리에 가도 없다. 런던에 가도 없다. 그런데 서울에 와 보면 이런 600~800m 바위산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다. 이건 풍수적으로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결코 간단한 인물들이 아닌 것이다. 그 터가 입증해 주고 있다.

다만 그동안은 이런 기를 받은 인물들이 나왔지만 천시(天時)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후천개벽의 시대가 왔기 때문에 창의력과 영감을 마음껏 펼칠 수가 있다. 한강이 가진 수기운과 바위산들이 가진 불기운이 서로 뒤섞여 있는 곳이 서울이다. 물대포와 불대포가 터지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이름하여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캐피털이다. 이런 대도시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서울의 풍수 조건과 비견할 수 있는 도시를 꼽는다면 터키의 이스탄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탄불은 동로마의 수도로, 비잔틴제국의 중심으로 1000년간 영화를 누렸기 때문에 그 기운을 상당수 뽑아 먹었다. 서울은 제국의 수도가 된 적이 없었으므로 그 기운을 뽑아 먹은 적이 없다. 아직 본전이 남아 있는 대도시라고 여겨진다.

백불 옆에 영험한 약수

서론이 좀 길었다. 서울의 8개 대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밖에 나가서 고갯길을 내려가다 보면 옥천암(玉泉庵)이 있다. 옥천암은 홍제천(弘濟川)이 감아돌아 나가는 바위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홍제천을 경계로 인왕산과 북한산이 갈라지는데, 옥천암은 북한산 줄기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삼각산의 끝자락에 있다. 풍수에서는 끝자락을 중시한다. 호박이 가지의 끝에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바위산의 끝자락에 에너지가 뭉쳐 있다고 본다. 결국(結局)이라는 표현도 풍수용어에 해당한다. 끝자락에 터를 형성하였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옥천암 앞으로 고가도로가 지나가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경관이 훼손되었지만 그러기 전에 이 터는 범상한 터가 아니었다. 서울이 지닌 골산의 정기가 뭉쳐 있는 절터였기 때문이다. 땅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가장 확실한 물증은 커다란 바위의 존재이다. 높이 6m 정도 되는 바윗덩어리가 돌출되어 서 있고, 이 통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해수관음, 백불(白佛), 암불(巖佛) 등이다. 북한산 향로봉의 끝자락이 뭉친 지점이고, 이 뭉친 지점 앞을 홍제천이 감아돌아 나가므로 이 마애불 터는 예로부터 영험한 기도터였을 것이다. 불교 이전부터 고대인들이 기도를 드리고 소원을 빌었던 바위절벽이나 선바위, 커다란 암석들이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 절터가 되거나 마애불이 새겨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이 옥천암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옥천암의 약수가 영험했다고 전해진다. 이 약수를 먹으면 여러 가지 병이 나았다고 한다. 위장병, 눈병, 바람병에 효과가 있었다. 바람병? 바람병은 바람 피우는 병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중풍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옥천암 앞에 줄을 서서 약수를 떠서 먹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약수를 많이 먹기 위해서 사전에 짠 음식을 몽땅 먹고 오는 게 좋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야 약수를 배가 부르도록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이 마실수록 효과가 좋다고 본 것이다.

옥천암의 또 다른 영험한 곳은 산신각이다. 커다란 바위에 산신을 새겨놓았다.
옥천암의 또 다른 영험한 곳은 산신각이다. 커다란 바위에 산신을 새겨놓았다.

구한말 미 선교사 눈에 기이한 광경이

옥천암 마애불은 얼굴과 몸 전체에 흰색 칠이 되어 있어서 일명 백불(白佛·White Buddha)로 불렸다. 특히 구한말에 선교사나 유럽인들이 이 옥천암 마애불을 보고 사진을 많이 찍어서 남겼다. 흰색 칠이 발라져 있으니까 눈에 금방 띄었을 것이다. 구한말 미국 선교사 월리엄 길모어(1858~?)가 펴낸 책에도 사진이 나와 있다. 미국의 여행가 버튼 홈스(1870~1958)가 1901년에 서울에 머물면서 찍은 서울 명물 사진에도 가장 특이한 광경으로 이 백불이 등장한다.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였던 카를로 로제티(1876~1948)의 사진에도 옥천암 마애불이 등장한다. 여행가 월리엄 채핀이라는 인물도 1910년 11월호 ‘내셔널지오그래픽’에다가 이 백불을 소개하였다. 하여간 구한말을 전후하여 서울에 왔던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이 옥천암과 백불이었던 것 같다.

옥천암 주지를 맡고 있는 원묵 스님에게 물었다. “마애불에 칠해져 있는 이 하얀색 칠은 이름이 뭡니까?” “호분(胡粉)이라고 합니다. 전해지기로는 대원군의 부인이 이 부처님을 아주 신봉했다고 합니다. 며느리인 명성황후도 이 백불이 들어선 누각건물, 즉 보도각(普渡閣)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에 왕실에서 이 호분을 발랐다고 보죠.” 호분(胡粉)은 오랑캐로부터 들어온 분말이니까, 서양에서 들어온 분말이라는 뜻이다. 조개껍데기를 빻아서 만든 분말이다. 흰색이 나온다.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이 호분을 많이 썼다. 대원군이면 개화기니까 당시 서양에서 이러한 호분들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옥천암은 구한말에 왕실의 안주인들이 신봉했던 왕실 사찰이었던 셈이다. 궁궐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후가 왕래하기에 적당한 사찰이고, 무엇보다도 영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영험이고 그 영험은 바위에서 나온다. 더군다나 고질병을 낫게 하는 약수가 백불 옆에서 샘솟고 있었으니 그 영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옥천암에서 또 하나 영험한 장소는 산신각이다. 백불이 있는 바위에서 좌측으로 좀 올라가면 언덕에 있다. 이 산신각 자리도 역시 커다란 바위에 산신 모습을 새겨놓았다. 백불을 새긴 바위보다는 작지만 산신을 새긴 바위도 역시 단독으로 돌출된 바위이다. 돌출된 바위에는 기돗발이 내장되어 있기 마련이다. 신도들은 이 산신각을 ‘산신의 집’으로 부르기도 한다. 원래 ‘山神之家(산신지가)’라고 한문으로 바위에 새겨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큰 바위에는 부처님을 새기고, 작은 바위에는 산신을 새겨 놓았다는 게 흥미롭다. 필자의 지론인 ‘모든 종교적 영험의 장소에는 반드시 바위가 있다’는 명제를 옥천암처럼 잘 보여주는 곳이 없다. 그것도 서울이라는 수도 중심지에 말이다.

옥천암 백불은 단군?

그런데 한 가지, 옥천암 백불의 형태가 약간 특이한 부분이 있다. 머리에 쓴 관(冠)의 모습이다. 관은 위엄, 권위, 신분, 벼슬을 상징한다. 이 백불은 관은 보통의 관음보살 관의 형태와는 다르다. 제왕의 관이라는 느낌이 온다. 불상을 연구한 전문가들 이야기로는 제석천(帝釋天)의 관이라고 한다. 제석천이라면 하늘에 있는 최고신이다. 불교에서는 제석천을 포섭하여 부처님 바로 밑에다가 포진시켰다. 제석천의 부하가 사천왕이다. 절 입구에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사천왕 밑에는 다시 팔부중이라고 하는 부하가 있다. 팔부중은 건달바, 비사자, 구반다, 피협타, 용, 부단나, 야차, 나찰이다. 말 안 듣는 놈들은 이 사천왕과 팔부중이 혼을 낸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이 제석천 신앙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옥천암 백불은 대략 고려 초기인 11~12세기에 걸쳐 조각한 불상이다. 한국의 전통 신앙에서 보자면 제석천은 환인(桓因)이다. 환인은 단군과도 연결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옥천암 백불은 우리 고대 신앙인 환인, 단군의 모습을 디자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홍제천(弘濟川), 그리고 인근의 중국 사신들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에 묵었던 숙박시설인 홍제원(弘濟院)에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홍(弘)’ 자가 들어간다. 옥천암 백불은 홍익인간의 단군신앙 자취가 불교적으로 흡수된 흔적일지도 모른다.

옥천암에는 노총각의 영험담이 전해온다. 조선 순조(1819) 때의 일이다. 고양군 신도면에 30살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나무꾼이 있었다. 나무꾼은 나무를 팔기 위하여 서울 사대문 안으로 들어와야만 하였다. 구파발에서 서대문으로 들어오는 길은 순탄했지만 업자들의 경쟁이 심해서 올 수 없었고, 홍제동에서 왼편으로 개천을 끼고 세검정으로 넘어다니는 코스가 나무를 팔기가 쉬웠다. 나무꾼이 오다 가다가 이 옥천암 부처님이 영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빌게 되었다. ‘장가들어서 자손을 보고 부자 되게 해서 나뭇꾼 신세 좀 면하게 해주십시오.’ 어느 날 꿈에 거룩하게 생긴 늙은 부인이 나타나서 계시를 주었다. ‘첫 새벽에 창의문(자하문) 밖에서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가 색시감이다.’ 과연 다음 날 첫 새벽에 창의문 밖에 나갔더니 시집갔으나 소박 맞아 놀고 있던 부잣집 딸을 만나게 되었다. 이 여자 역시 옥천암 백불이 꿈에 나타나 알려주었기 때문에 창의문 밖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많은 영험 설화들이 전해진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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