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산리우르파의 하란 유적지. 아나톨리아 동부의 산리우르파는 과거 에데사로 불리던 유서 깊은 도시다. ⓒphoto 셔터스톡
터키 산리우르파의 하란 유적지. 아나톨리아 동부의 산리우르파는 과거 에데사로 불리던 유서 깊은 도시다. ⓒphoto 셔터스톡

끝이 안 보이는 팬데믹이다. 한층 더 강력해진 변이 바이러스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자화자찬으로 무장한 K방역의 오만과 허세도 원인 중 하나일지 모른다.

글로벌 팬데믹 현황을 동과 서로 나눠 보면 흥미로운 차이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최고지도자와 바이러스 감염과의 상관관계다. 유럽,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지도자의 경우 바이러스 감염자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미국, 영국과 같은 앵글로색슨 국가의 지도자는 전 세계 바이러스 감염 위험군의 선두에 서 있다.

지난해 3월 중환자실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서방에서 확인된 최초의 코로나19 감염 지도자였다. 존슨 감염 직전에는 영국 왕실의 찰스 왕세자도 바이러스에 굴복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는 대통령선거를 한 달여 앞둔 지난해 10월 감염됐다. 입원 3일 만에 복귀했지만, 인공호흡기를 사용할 정도의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다고 한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의 감염 소식은 트럼프 회복 뉴스 이후 터져 나왔다. 지난해 12월 중순으로, 2020년 유럽의 성탄절을 우울하고도 불안하게 만든 사건으로 기록됐다.

민주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 ‘프린켑스’

서방 선진국 지도자들의 전염병 감염 소식이 이어지는 동안 동양에서의 상황은 어땠을까? 자화자찬 K방역, 중국의 일사불란 C방역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바이러스에 걸린 최고지도자가 전무하다.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만이 아니라 주변 가족이나 고위 정치가의 감염 소식도 극히 드물다. 모두 조심하고, 전 세계가 부러워한다는 선진 방역 덕분일지 모르겠다. 서방은 마스크도 안 쓰고, 해수욕장에도 멋대로 가기 때문에 지도자조차 예외 없이 전염병에 노출됐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우익 인종차별주의자로 명명된 트럼프의 경우 자업자득이란 식으로 몰아세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과 배경을 전부 감안한다 해도 뭔가 이상하다. 선진 문명, 문화를 대표하는 미국·영국·프랑스 3국의 지도자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반면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동양 지도자는 코로나19 감염과 ‘전혀’ 무관하다. 왜일까?

단견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 수준이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방역 수준에 따른 ‘동양의 승리, 서방의 KO패’라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민주주의 높낮이의 결과가 동서 지도자의 바이러스 감염 차이점을 설명해주는 핵심이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 수준이 높을수록 전염병에 노출되기 쉽다. 반대로 민주주의 정도가 낮을수록 지도자가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민주주의 수준이나 정도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북한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 외치는 판에 혼란스러울 수 있겠지만, 고대 로마 공화정 때 등장한 ‘프린켑스(Princeps)’라는 라틴어가 분석의 키워드로 활용될 수 있다. 프린켑스는 21세기 서방 민주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 중 하나다. ‘왕자(Prince)’로 직역되는 말이지만, 로마 공화정 당시의 해석으로는 ‘평등한 사람들 중 한 명(The first among equals)’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프린켑스는 로마 공화정 지도자는 물론, 제정(帝政) 이후 로마 황제가 보유한 타이틀 중 하나다.

이 개념에 따르면 존슨, 트럼프, 마크롱 역시 평등한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다. 평등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과정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 수많은 국민들과 자유롭게 만나는 과정에서 전염병에 노출된 것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즉시 구중심처(九重深處)에 꼭꼭 숨거나, 몇몇 참모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동양 지도자들과 다른 면모다. 팬데믹 시대 상식이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바이러스’라는 식으로 풀이될 수 있다. 사람이 넘치는 곳이 바로 전염병의 현장이다. 사람 모이는 곳을 피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정치가는 다르다. 팬데믹일수록 사람들과 접하면서 현장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해야만 한다. 현장성에 기초한 정치가 지도자의 의무이자 책임인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의 쇼가 아니라, 평소의 일상이 보여주는 현장성이다. 전염병이 돈다고 해서 그 같은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로마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군대와 페르시아 샤푸르 1세 군대가 맞붙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원. 이 평원의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생포돼 포로가 됐다. ⓒphoto 유민호
로마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군대와 페르시아 샤푸르 1세 군대가 맞붙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원. 이 평원의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생포돼 포로가 됐다. ⓒphoto 유민호

전염병에 쓰러진 민주 지도자 페리클레스

역사학자 모두가 동의하지만, 기원전 457년부터 429년 사이의 30여년간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최고 절정기로 통한다. 장군 출신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문을 연 아테네 최고 번영기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의 수명은 한순간 꺾이게 된다.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 하락세에 들어간다. 그리스 민주주의 상징을 무너뜨린 것은 당시 아테네에 횡행하던 전염병이었다. 프린켑스 지도자, 즉 평등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페리클레스도 전염병에 신음하던 아테네 최전선을 지키는 과정에서 쓰러졌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를 ‘아테네의 제1시민’이라 극찬했다. 2500여년 전 페리클레스 교훈에서 알 수 있듯이 존슨, 트럼프, 마크롱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은 민주주의 나라라면 당연히 치를 의식이자 의무일지 모르겠다. 바이러스 안전지대에 꼭꼭 숨어, 보여주기 이벤트와 자화자찬으로 살아가는 동양 지도자들과는 격이 다르다.

전염병 감염자인 존슨, 트럼프, 마크롱을 생각할 때 겹쳐지는 로마 황제가 한 명 있다. 유럽의 치욕인 동시에 역사의 교훈으로 자리 잡은,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다. 포로로 생포된 채 노예로 살다가 죽어간, 로마 역사상 ‘유일한’ 황제가 발레리아누스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에 접어든 253년부터 260년까지 7년간 황제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로마 역사는 로마 황제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된 제정 로마(서로마 기준)에서는 전부 70명의 황제가 있었다. 기원전 27년부터 서로마가 망한 서기 476년까지 503년에 걸친 황제의 역사다. 이 중 제명대로 살다가 죽은, 자연사(自然死)한 황제가 극히 드물다. ‘암살, 독살, 자살’이 로마 황제의 일상이자 상식이다.

적에게 생포된 발레리아누스는 70명 황제 가운데 최악의 케이스로 통하는 인물이다. 생포는 암살, 독살, 전사, 자살과도 다른 성격의 비극이다. 같은 피인 로마인에 의해 로마 영토에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이 노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최후였다. 로마 황제를 생포한 뒤 평생 노예로 부린 나라는 페르시아, 즉 현재의 이란이다. 서기 260년 봄에 벌어진 ‘에데사 전투(Battle of Edessa)’가 수난의 현장이다.

당시 페르시아 왕은 사산(Sasanian)제국을 이끈 샤푸르 1세(Shapur I)였다. 현재의 터키 아나톨리아 동부의 유서 깊은 도시 에데사(현재 지명 산리우르파)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로, 7만명의 로마군이 페르시아 공격에 맞서 싸웠다. 결과는 로마군 6만명의 몰살과 황제와 참모들의 생포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평정을 위해 발레리아누스가 직접 참전했지만, 약체로 봤던 페르시아에 당한 것이다.

전쟁에 참가하다 생포된 로마 황제

황제의 전투 참가는 로마 역사의 매력인 동시에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한반도 역사를 보면 외세에 맞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다 전사한 지도자가 드물다. 밀려온 적에게 수모를 당한 왕은 많지만, 직접 나가 싸우다 수모를 당한 인물은 전무하다. 대신 적이 몰려오기 전에 먼저 도망가는 지도자들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로마는 다르다. 로마 황제가 가진 최대의 권위는 전쟁 능력에 있다. 영토를 넓히거나 변방이 소란스러우면 황제가 제일 먼저 달려간다. 현지 군인들과 함께 음식과 숙소를 나누면서 생활하는, 야전군 황제가 로마 최고지도자의 권위이자 의무였다. 발레리아누스의 생포는 그 같은 로마 황제의 위상과 전통을 지켜나가던 중 발생한 비극이다.

황제 발레리아누스에 대한 관심은 11세기 십자군 흔적을 더듬던 중 갖게 된 부수적 결과다. 에데사는 십자군이 최초로 점령한 자치도시다. 교황 우르반 2세의 예루살렘 성지 탈환 설교를 계기로 1096년 제1차 십자군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한 십자군은 무방비 상태의 이슬람 지역을 유린하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기독교 자치도시를 건설했다. 최후 목적지인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보급로이자 안전지대가 자치도시였다. 에데사는 제1차 십자군전쟁 당시 프랑스의 보드앵(Baldwin I) 장군이 가장 먼저 점령한 기독교 자치도시다. 지도상으로 보면 에데사는 내륙 도시에 속한다. 예루살렘으로 연결되는 동부 지중해에 인접한 도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상하다. 왜 내륙 깊숙이 들어간 에데사를 최초의 기독교 자치도시로 삼았을까?

전략적·지정학적 이유가 있겠지만,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둘러싼 어제의 역사에 대한 설욕이란 점도 이유 중 하나일 듯하다. 로마 황제가 수모를 당한 지역을 기독교 해방구로 만들면서, 이슬람 전체에 대해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격이다.

페르시아에 붙잡혀가 ‘인간 계단’으로 굴욕적인 삶을 산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묘사한 부조. ⓒphoto 유민호
페르시아에 붙잡혀가 ‘인간 계단’으로 굴욕적인 삶을 산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묘사한 부조. ⓒphoto 유민호

십자군이 최초의 자치도시로 삼은 에데사

중세 유럽인에게 있어서 발레리아누스 생포는 정신적·심리적 트라우마로 새겨져왔다. 생포 자체만이 아니라, 생포 이후의 삶이 너무도 비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생포 이후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왕을 위한 ‘인간 계단’으로 평생 살아갔다고 한다. 페르시아 왕이 말에 오를 때 몸을 굽혀 등을 들이대는 식의 인간 계단이다. 발레리아누스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망연도도 생포 직후인 260년부터 4년 뒤인 264년에 걸쳐 있다. 전설처럼 들려오는 황제의 최후는 너무도 끔찍하다.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왕에게 자신을 풀어주면 금을 원하는 만큼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페르시아 왕은 코웃음을 치면서 거꾸로 발레리아누스에게 수백 킬로그램의 금을 선물한다. 펄펄 끓는 금을 발레리아누스 머리에 부어 즉사케 했다는 잔인한 얘기다. 발레리아누스는 재임 당시 기독교 탄압에 앞장선 인물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800여년이 흐른 십자군원정 때는 반기독교 황제에 관한 기억이 사라진다. 이슬람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만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에데사의 복수’라고나 할까? 로마 황제 생포 현장을 점령한 뒤, 기독교 유럽인으로서의 연대감을 재확인해 나갔을 것이다. 그 같은 결속력은 발레리아누스 생포 이후 1800여년이 흐른 21세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유럽이 주도하는, 각종 경제제재를 통한 이란 봉쇄가 증거다. 이란의 핵개발 이전에도 1800여년간 이어진 근본적인 증오심이 서구에는 표류한다.

황제의 생포 현장이 정확히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데사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알려진 땅이 가로·세로 100㎞ 이상의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겠지만, 어디쯤일지를 가늠하면서 에데사 전투 현장 ‘발굴’에 나섰다. 자동차로 에데사에 들른 뒤 현지인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에 대해 물어보면 아무도 모른다. 거꾸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물을 뿐이다. 전투 현장은 당시 페르시아 주력부대가 있던 남쪽으로 이어진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데사 남쪽은 시리아로 이어진다.

로마 이래 사용된 일직선 길이 지금도 남아 있다. 흙먼지가 날리는 뜨거운 길이다.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할 때 오른쪽 지중해 방향으로는 산맥이, 왼쪽은 끝이 안 보이는 평야로 이어져 있다. 1㎏당 150원 정도에 파는 수박과 참외 행상이 길가에 널려 있다. 과일이 증명해주듯, 곳곳에 물이 넘치는 비옥한 땅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시대까지의 상식이지만, 물은 전투 현장의 기본이자 기반이다. 수원 확보는 음식, 음료, 나아가 말이나 동물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전제다. 생포 현장을 찾아내기는 어려웠지만, 어떤 환경에서 발레리아누스가 전쟁을 벌였을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가릴 것 하나 없는, 도망갈 수도 없는 대평원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을 것이다. 만약 로마가 이겼다면 거꾸로 페르시아 왕을 생포할 수도 있었던 환경이다.

1800여년간 이어진 증오심의 원천

역사의 교훈이라고나 할까? 로마 황제 생포가 비극이기는 하지만, ‘결코’ 비굴한 역사는 아니었다. 프린켑스 지도자, 즉 평등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서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인민복 하나 입고 천안문 망루에 등장한다고 해서 보통 인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발레리아누스는 전투에 참전해, 보통 로마 군인들처럼 싸우다가 생포된 황제다. 페르시아에 잡히기 전에 탈출하지도 못한 무능한 황제라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프린켑스가 어떤 의미이고, 왜 민주주의 가치이자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모르는 단견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페리클레스는 아예 목숨을 잃고, 존슨·트럼프·마크롱은 바이러스에 굴복했으며,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삶은 잔인한 비극 그 자체였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 지도자의 권위와 영광은 인류의 기억 속에 영원히, 그리고 선명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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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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