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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71호] 202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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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연가에서 민족가요로… 아리랑 진화에 숨은 인물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2021-08-15 오후 12:51:44

▲ 1926년 개봉된 나운규 ‘아리랑’의 한 장면과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쓰인 ‘신(新)아리랑’의 악보.
‘아리랑’은 한국 민족의 대표적 민요이다. 한국 민족이 사는 곳에서는 지구 어디서나 ‘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한반도의 거의 모든 고을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닦인 독특한 가락의 아리랑이 있는 걸 보면 이 민요는 아득한 옛날 한국 민족의 조상들이 창작하여 온 나라에 퍼져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후손에게 전승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문화재청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파악된 것만도 약 60여종 3600여수의 ‘아리랑’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아리랑’에는 한국인들의 사랑·그리움·기쁨·슬픔·이별·상봉(만남)·반김·미움·한(恨)·탄식·원망·염원·행복·희망 등 모든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아리랑’이 수백 수천의 수많은 사연을 사설로 엮으면서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의 한 가지 여음(餘音)으로 하나로 꿰뚫려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인이 ‘아리랑’을 무척 사랑하고 온 민족이 수시로 노래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노랫말의 뜻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민요 ‘아리랑’이 말뜻을 잃어버릴 만큼 아득한 옛날에 창작되어 전승된 민요임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도 ‘아리랑’의 말뜻을 몰라 참으로 오랫동안 헤매왔다. 그러다가 2003년 1월 국내 일간지에 ‘아리랑’의 말뜻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한 논문으로 발표했었다.(‘아리랑의 뜻과 한국인의 사랑’·동아일보 2003년 1월 16일 자 및 30일 자)
   
   그 요지는 ‘아리랑’의 ‘아리’는 ①‘고운’ ‘아리따운’의 뜻과 ②가슴이 ‘아리’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함께 중첩되어 담긴 옛말임을 간단히 논급하였다. 또한 ‘랑’은 ‘님’으로서, 한자가 삼국시대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할 때 ‘랑(郞·娘)’으로 이국적 멋을 내어 호칭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밝히면서, 신라 향가의 ‘죽지랑가(竹旨郞歌)’, ‘기파랑가(耆婆郞歌)’의 예를 증거로 들었다. 또한 ‘아라리’는 ‘가슴앓이’ ‘상사병’의 옛말임을 밝혔었다.
   
   
   곱고 그리운 님, 아리랑
   
   민요 ‘아리랑’의 변하지 아니하는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는 번역하자면 ‘곱고 그리운 님, 곱고 그리운 님, 가슴이 아리도록 (상사병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라는 뜻이다. 이것을 번역문으로 노래하면 멋이 없다. ‘아리’의 ‘고운’과 ‘그리운’의 합성어가 현대말에는 이미 분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역시 이것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의 말로 노래해야 곱고도 그리운 님 ‘아리랑’을 ‘아라리오’의 동일 어조가 받아서 멋이 살아난다. 이 가사 어구는 현대말로 치환되지 않는 고대 멋쟁이 말이다.
   
   삼국시대 이후 ‘아리랑’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파되고 각종 가사(사설)와 곡조(가락)로 변용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었다. 고려왕조시대와 조선왕조시대 기록에 ‘아리랑’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문자 채록을 게을리한 것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발명되고 한자도 널리 보급된 조선왕조시대에 오면 임진왜란 때의 아리랑 가사에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의 사설이 채록되어 있다. 고종임금과 명성황후가 궁중 잔치에 광대를 불러서 안성 아리랑 ‘오다가다 만난 님을/ 죽으면 죽었지 나 못 놓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를 불렀고 명성황후가 “그렇지 그렇지” 하고 넓적다리 장단을 맞추어 쳤다는 기록은 백성의 민요 ‘아리랑’이 왕실과 궁중에서도 애청되었음을 알려준다. ‘무극관인’이라는 사대부가 ‘농부사’를 지으면서 후렴에 ‘아리랑 아리랑 에헤야’를 되풀이한 것도 이미 양반 사대부들도 백성의 민요 ‘아리랑’을 흥겹게 노래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1890년대에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미국인 호머 허버트가 한국 대표 민요로 ‘아리랑’을 채록하면서 “한국인에게 문화적으로 ‘아리랑’은 식생활의 쌀과 같다”고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요 ‘아리랑’의 기원은 원래 남녀 연인 사이의 노래였지만, 한국 민족이 긴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에 ‘곱고 그리운 님’에 연인뿐만 아니라 부모·형제·친우·동포·조국·민족 등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을 넣어 ‘아리랑’의 내용이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아리랑’을 부르는 곳도 모든 경우로 확대되었다. 잔치마당에서만 ‘아리랑’을 부른 것이 아니라 농사일이나 부엌일에서도 아리랑은 노동요가 되어 불렸다.
   
   일제강점기 ‘아리랑’은 처음에는 민중들이 구한말의 ‘아리랑’을 그대로 이어서 부르다가 3·1운동을 전환점으로 ‘민족가요’의 측면이 급속히 강화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음악’ 부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운규(羅雲奎·1902~1937)의 영화 ‘아리랑’(1926년)이 제작, 개봉되어 매우 큰 성공을 거둔 덕분이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자마자 조선인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람객이 줄을 이어 전국에서 2년 이상 ‘만원’이 계속되었다. 전국 각지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인 거주지역과 중국 간도지방에서도 순회 상영되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이 일어났다. 수백만 명의 한국인이 영화 ‘아리랑’을 관람하고 호응한 것이다.
   
   영화 ‘아리랑’의 마지막 장면은 동네사람들이 합창하는 ‘아리랑’이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인공 영진이 ‘아리랑 고개’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아리랑’의 주제가이면서 영화 속에서 합창한 ‘아리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②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③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천에 초목은 젊어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④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일제의 검열을 고려하여 만든 작사이지만 일제는 제4절의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의 구절을 트집 잡아 박해하였다.
   
   이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저항의식을 담아 가장 널리 불렸을 뿐만 아니라 광복 후 남북이 국제체육경기에서 ‘국가’에 대신할 노래로 ‘1920년대 아리랑’이란 표현으로 ‘아리랑’을 합의, 채택했기 때문이다.
   
   나운규의 1926년 영화 ‘아리랑’은 민요 ‘아리랑’ 그 자체의 발전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 민요 ‘아리랑’에 민족의식이 깊이 들어간 ‘민족 가요 아리랑’으로 성격 변화를 일으켰다. 물론 ‘전통민요 아리랑’도 조선 민족의 사랑노래, 노동노래, 뱃노래, 권주가, 자장가 등 객관적 사실로서의 ‘민족가요’로 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민족의식의 요소를 기준해서 보면 일종의 ‘즉자적(卽自的)’ 민족가요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는 의도적으로 ‘민족의식’이 깊이 들어가 용해된 ‘대자적(對自的)’ 민족가요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는 당시 한국 민족 성원 사이에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어느 종류의 ‘아리랑’보다도 가장 널리 불려서 아리랑의 새로운 기준이 된 ‘신(新)아리랑’으로 확립되었다. ‘아리랑’ 가사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의 가사는 신아리랑의 표준(기준) 가사가 되어 전국 모든 분야에서 수용되고 사용되었다. 또한 나운규가 ‘경기 아리랑’을 바탕으로 약간 빠르게 편곡한 ‘신아리랑’의 곡조 역시 전국 모든 분야에서 수용되고 사용되었다. ‘전통민요 아리랑’을 직접 계승하여 ‘신아리랑’이 탄생한 것이다.
   
   셋째, ‘아리랑 고개’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나운규는 ‘아리랑’의 뜻을 알지 못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경기민요에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쑤 배 띄워라’로 ‘아리랑 고개’ 자체는 없다. 나운규는 ‘아리랑’을 고개 이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아리랑’과 ‘아리랑 고개’를 노래 가사와 영상에서 모두 개념으로 정립, 사용하였다.
   
   특히 영상에서는 수갑을 차고 마을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면서 사라지는 주인공을 비추면서 상징적 ‘아리랑 고개’를 설정하였다. 영화 ‘아리랑’의 이러한 종결은 ‘아리랑’을 상징적 고개 이름으로 해석하는 흐름을 정립시켰다. 심지어 ‘아리랑 고개’의 실재를 상정하고 이를 한반도 지리에서 찾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나운규의 1926년 영화 ‘아리랑’과 그 주제가 ‘신아리랑’은 가사, 곡조, 영향력에서 모두 ‘아리랑’의 역사에 혁명적 변동을 가져왔다. 나운규의 독립투쟁을 향한 애국심과 천재적 구상 및 정성을 다한 열정적 헌신이 민족가요에 ‘신아리랑 혁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 1 ‘아리랑’을 채록한 미국인 호머 허버트.
2 영화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
3 ‘광복군 아리랑’을 작사한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4 ‘가극 아리랑’을 만든 한유한.

   일제의 아리랑 금창령
   
   일제는 한국 민족 사이에서 민요 ‘아리랑’이 민족적 정체성과 자부심을 지키면서 사랑하는 노래가 되자 이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고 자행하였다. 일제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가사가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트집 잡아 1926년 10월 1일 단성사 개봉을 하루 앞둔 9월 30일 영화 선전지 1만장을 압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아예 ‘아리랑’이 불온한 노래라고 트집 잡아 1929년 ‘민요 아리랑 금창령(禁唱令)’을 내렸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가요 ‘아리랑’은 해외 독립운동에서도 자연스럽게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독립군 아리랑’과 ‘광복군 아리랑’이다. 일단 두 곡의 가사를 보면 이렇다.
   
   ①이조왕 말년에 왜 난리 나니/ 이천만 동포들 살길이 없네/
   후렴-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②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메고/ 일제놈 쳐부숴 조국을 찾자/ 후렴
   ③내 고향 산천아 너 잘 있거라/ 이 내 몸 독립군 떠나를 간다/ 후렴
   ④부모님 처자들 이별을 하고서/ 왜놈들 짓부숴 승리를 하자/ 후렴
   ⑤태극기 휘날려 만세 만만세/ 승전고 울리며 돌아오거라/ 후렴

   
   ‘독립군 아리랑’은 작사자를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작사에 뛰어난 민중의 한 명이 작사한 것을 따라 부르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가사를 덧붙이고 다듬어 집단창작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작곡자 역시 없고 민요 ‘영천 아리랑’과 ‘본조 아리랑’의 곡에 맞추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만주 일대와 연해주의 한민족 이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었다고 전해진다. ‘영천 아리랑’은 8분의5 박자의 상당히 약동적인 리듬의 민요로 빠르게 부르면 전투적 약동성이 생긴다. ‘본조 아리랑’은 여기에 약간의 애조가 더해진다. ‘독립군 아리랑’은 그 밖에 민중의 기호에 따라 여러 가지 아리랑 민요를 차용해 부른 것으로 해석된다. ‘독립군 아리랑’의 곡조가 여러 가지 민요아리랑의 곡조로 불린 사실 자체가 일제강점기 해외 한민족 독립운동에서 아리랑이 민족의 가요로 애창된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광복군 아리랑’은 1942년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작사해서 민요 ‘밀양 아리랑’의 곡조에 맞추어 부르도록 하여 보급한 광복군 군가의 하나이다. 가사는 이렇다.(양지선 ‘한국광복군가 연구’ 참조)
   
   ①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
   후렴-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 광복군 아리랑 불러보세
   ②광복군 요리는 김치 깍두기/ 양요리 중요리 다 일이 없소/ 후렴
   ③광풍이 분다네 광풍이 분다네/ 삼천만 가슴에 광풍이 불어요/ 후렴
   ④바다에 두둥실 떠오는 배는/ 광복군 싣고서 오시는 배래요/ 후렴
   ⑤동실령 고개서 북소리 둥둥 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 날리네/ 후렴

   
   ‘광복군 아리랑’을 작사한 김학규는 1919년 신민회 회원들이 만주 유하현 추가가에 세운 신흥무관학교 장교반을 졸업하고 독립군 소위로 입대하여 남만주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아래서 조선혁명군 참모장을 맡았던 독립군 지장이었다. 김학규는 음악 전문가는 아니었으나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동명학교 교사도 지냈고 중국 황포군관학교에서 1년간 특수교육도 받은 지식인 장교였으며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 ‘광복군 아리랑’ 외에도 ‘광복군 석탄가’(혁명의 불길)도 작사하여 민요곡을 차용해서 부르도록 했었다. 1942년 임시정부의 군사 통일이 실현되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면서 통일 한국광복군이 편성되자, 1992년 10월 개최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국가 및 군가 제정안’을 의결하였다. 이에 ‘국가’를 대신하여 우선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채용하기로 하고, 광복군 군가를 제정·수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김학규 제3지대장이 ‘광복군 아리랑’과 ‘광복군 석탄가’를 작사하여 민요 곡조를 차용해 광복군 군가로 부르도록 보급했다.
   
   ‘광복군 아리랑’에 곡조로 차용된 ‘밀양 아리랑’은 각종 아리랑 민요 가운데 가장 약동적이고 흥겨우며 낙천적 무용곡이어서, 김학규가 ‘밀양 아리랑’을 ‘광복군 아리랑’에 접착시킨 것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민족 성원은 모두 ‘밀양 아리랑’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군 아리랑’은 전체 광복군과 동포들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었다. ‘아리랑’이 민족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한유한의 ‘가극 아리랑’
   
   ‘독립신문’ 중국어판 제7호(1945년 7월 20일 자)에 의하면, 중국 화베이 지방에서 일본군에 징집된 한적 사병들이 일본 군영을 탈출하여 광복군 비밀공작원과 접촉하는 인원이 급증하는 중이고 “현재 화베이에 거주하는 한국 청년 남녀들이 도처에서 경쟁적으로 ‘광복군 아리랑’을 부르면서 광복군의 비밀공작인원에 환영을 표시하고 있으며, 또한 암암리에 은근히 그들(광복군 비밀공작인원)을 초대하고 있다”고 돼 있다.
   
   ‘아리랑’이 독립운동에 기여하면서 국제적 영향을 끼친 배경에는 한유한(韓悠韓)이 1939년 창작하여 보급한 ‘가극(오페라) 아리랑’과 ‘광복군가집’ 편찬 보급도 있었다.
   
   한유한(본명 한형석)은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서 5세 때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에 가 있는 아버지(한흥교)를 찾으러 어머니, 형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베이징에서 중국 초·중등학교를 마치고 1928년 상하이신화예술대학(上海新華藝術大學) 예술교육학과를 입학하여 전문 음악인이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한형석은 한유한이라는 이름으로 항일전선에 참가하여 시안(西安)으로 가서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전시공작간부훈련단(단장 장개석) 제4단의 중국 국민군 중교(중령에 해당) 음악교관을 맡았다. 이 무렵 그의 작품이 ‘전사가(戰士歌)’ ‘정의지가(正義之歌)’ ‘중국적 노후(中國的怒吼)’ 등이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한유한은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宣傳隊長)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의 대표적 작품이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 행진곡’ ‘조국 행진곡’ 등 다수의 작품이고 그중에도 특기할 것이 ‘가극 아리랑(歌劇 阿里郞)’이다. 이 시기 ‘광복군가집’ 제1집, 제2집의 두 책을 낸 것은 거의 모두 한유한의 노력에 의거한 것이었다.
   
   한유한이 창작한 ‘가극 아리랑’은 4부로 구성된 대형 오페라였다. 이야기 줄거리는 한국 금수강산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하자 주인공인 목동(牧童)과 시골처녀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독립혁명군에 입대해서 일제와 용감히 싸우는데, 두 독립군은 모두 장렬히 전사했지만 조국은 광복된다는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당시 음악전문가가 한국독립군에 거의 없었으므로 한유한은 ‘가극 아리랑’의 작사·작곡·감독·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가극 아리랑’은 1940년 5월 22일 시안 남원문(南院門) 실험극장에서 첫 막을 올렸는데, 막이 오를 때마다 한유한이 다듬은 한국 민요 ‘아리랑 서곡’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공연은 대성공이어서 감동과 격찬이 쏟아져 나왔으며 10일간 연속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그는 ‘가극 아리랑’의 클라이맥스마다 민요 ‘아리랑’을 합창 또는 독창으로 부르게 하여 ‘아리랑’은 중국 청중에게도 익숙한 한국 노래로 인지되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약 20만명에 달했던 화베이 지방 한국 동포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 시민과 군인들이 한국 민족의 조국 광복을 위한 불굴의 희생적 투쟁을 알고 실감하게 되어 한·중 항일연대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한유한은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산둥성에서 교포 귀국사업에 봉사하다가 1948년 9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부산문화극장 설립 책임자를 맡아 1950년 6월 18일 개관했으나 일주일 후 6·25전쟁으로 극장 자체가 미군에 징발 사용되었다. 6·25전쟁 중에는 전쟁고아 등 어린이들을 위하여 ‘자유아동극장’ 및 ‘색동야학원’을 설치해서 봉사하였다. 한유한은 1955년 6월 부산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부임하여 1975년 2월 정년퇴임 때까지 교수로 근무하였다. 일생을 조국과 동포를 위해 일하다가 1966년 별세하였다.
   
   
   남도 북도 아리랑
   
   1945년 8·15 한국 민족의 해방·광복과 함께 ‘아리랑’도 해방되었다. 해방된 ‘아리랑’은 남과 북 모두에서 온 민족의 사회생활 전 분야에서 사랑받으며 사용되었다. 민요로서만 아니라 영화·연극·무용·창작음악·동요·집단체조·상표·학용품·담뱃갑 도안·의상·잡지 이름·소설·시·희곡·만화·화장품·공예품·라디오·TV 방송 프로그램·술 이름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부문에서 애호되었다.
   
   6·25전쟁 후 ‘아리랑’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각종 국제체육경기에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였다. 남북 체육 대표는 1963년 1월 스위스 로잔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 남북 단일팀 출전을 위한 체육회담을 갖게 되었는데 이때 단일팀 국가로 ‘아리랑’을 합의 채택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장은 동·서독의 예에 따라 남북이 각각 25초씩 자기 나라 국가를 부를 것을 제의했지만, 남북 대표는 이를 거절하고 ‘아리랑’을 채택하는 역사적 합의를 했다.
   
   1989년 3월부터 1990년 2월까지 판문점에서 열린 베이징 ‘아시안게임’ 남북 단일팀 참가를 위한 다섯 차례의 남북 체육회담에서도 1963년 합의에 따라 ‘1920년대 아리랑’을 국가로 채택하기로 재확인, 합의되었다. 여기서 ‘1920년대 아리랑’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후 1991년 2월 12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 체육회담에서는 앞으로 올림픽이나 각종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남북 공동단일팀의 노래는 남북 간에 합의된 ‘아리랑’을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때 합의된 1920년대 ‘아리랑’을 그 후 ‘의전용’으로, 약간 빠르게 연주한 것을 ‘행진곡’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최근 ‘아리랑’의 전승·발전에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진 것은 2012년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UNESCO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의 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등재이다. 북한도 2014년 북한 지역 ‘아리랑’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유네스코에 신청하여 2014년 1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정부간위원회에서 역시 만장일치로 선정·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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