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미처 철수를 마치기도 전에 탈레반이 카불로 들이닥쳤다. 그럼에도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치던 바이든 대통령은 돌연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은 하지 않겠다”며 볼썽사나운 철군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이번 사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미국 우선주의’가 점차 미국의 세계 전략의 기조가 되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 와중에 미국에서 “한국도 미군이 철수하면 붕괴한다” “아니다”라는 어이없는 논란이 벌어졌다. 급기야 바이든 대통령까지 “한국은 다르다”고 진화에 나섰다. 이런 어수선한 국면에서 한국이 소환된다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나라보다도 이런 이슈에 상대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그래서 “설마 그렇겠어?”라며 한편에 제쳐두었다가, 다시금 꺼내들게 되는 논쟁적인 미래 담론이 있다. 바로 피터 자이한의 ‘각자도생의 세계’(Disunited Nations·2020)다. 이제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포기하고 차츰 뒤로 물러선다. 그런 ‘미국 없는’ 세계는 무질서한 각자도생의 세계다. 거기서 각 나라들은 제각각 살길을 찾아 치열한 아귀다툼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우리말로는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2021)으로 소개되었다.

제국의 세계 경영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국 모델이다. 영국은 안전한 국토와 유능한 해군, 그리고 월등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채찍(stick)을 휘둘렀다. 즉 우월한 지위를 활용한 위협책이다. 특히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력과 해군 역량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이를 바탕으로 싸고 좋은 상품을 적대적인 시장에 우격다짐으로 팔아치웠다.

다른 하나는 미국 모델이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소련과 곧바로 냉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미국은 ‘내 편에 서는’ 나라는 누구든지 국가 안전, 해상 통행 보장, 무제한적인 미국 시장 개방, 기축통화 제공 등을 약속했다. 한마디로 막강한 부와 국방력을 바탕으로 당근(carrot)을 제공했다. 즉 상대가 미국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게 하는 유화책을 구사했다. 심지어 자국의 산업이 휘청대도 외국 상품의 수입을 막지 않았다.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이런 질서 속에서 냉전의 반세기 동안 세계는 오히려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했다. 물론 미국도 이득을 챙겼다. 하지만 미국 이외 지역의 번영은 더욱 눈부셨다. 독일, 일본, 중국, 한국 등이 대표적이다. 냉전이 끝나고는 ‘저편에 섰던’ 나라들도 자유무역체제로 들어왔다. 이로써 ‘미국 있는’ 세계 질서가 당연한 것으로, 또한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환상(?)에 젖은 세계는 종종 미국과의 충돌도 불사했다. 여기에 9·11 테러까지 발생했다. 마침 셰일혁명으로 인해 미국은 더 이상 페르시아만의 석유도 필요 없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아무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데 왜 우리만?” 더구나 미국은 지구적 안전보장, 시장개방 등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혹자들은 중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은 결코 패권국이 될 수 없다. 심지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기조차 힘겹다. 광활한 중국은 내부적으로 조각나 있다. 특히 베이징, 상하이, 쓰촨 등은 서로 이질적이다. 소수민족 문제도 심각하다. 중국은 국가로서의 정치체제라기보다 통일성을 유지하기가 지독히도 곤란한 문화권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중국은 영토의 존속 가능성조차 확고하지 않다.

또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식량 수입국이다. 여기에 한 자녀 정책, 도시화 등으로 인구구조가 악화되었다. 더구나 에너지와 원자재를 대량 수입해야 하는데, 자체적으로 해상운송의 안전을 확보할 능력이 없다. 한마디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은 미·중 수교를 발판으로 ‘미국 있는’ 세계에서 해상로 안전 보장 및 미국 시장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 등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은 눈부신 근대화로 제국이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냉전에 부딪힌 미국은 패배한 적국을 필요로 했다. 미국은 지체 없이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였다. 이를 통해 일본은 해체되기보다 도리어 ‘업그레이드’되는 행운을 누렸다. 일본은 한때 개인 소득이 미국을 능가하다가 ‘잃어버린 10년’ 등 오랜 경제적 고난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놀라운 역량을 발휘해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로 변신했다. 그 핵심은 디소싱(desourcing), 즉 해외거점에서 생산, 판매하는 방식이다. 또한 일본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해군력을 자랑한다. 페르시아만에서 인도, 동남아시아, 대만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로를 충분히 관리할 만하다. 그 해역의 모든 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반면 중국은 해군력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주변 해역의 어느 나라와도 호의적이지 않다. 중국 자체의 취약성, 주변국과의 구원(舊怨) 및 불화 등으로 운신의 폭이 좁다. 그래서 ‘미국 없는’ 세계에서는 원료 확보 및 상품 수출이 곤란하다. 부동산을 비롯해 버블경제의 경착륙 우려도 심각하다. 따라서 다가올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아시아의 우두머리는 일본이다.

소련에서 쪼그라든 러시아는 역설적으로 국경은 더 길어졌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취약할 뿐만 아니라 국방 문제로 늘 골머리를 앓는다. ‘미국 있는’ 세계의 최대 수혜자인 독일은 각자도생의 세계가 되면 거의 모든 이점을 잃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반면 비교적 독자노선을 걸어온 프랑스는 과거 식민 지역을 두루 관리하며 유럽의 맹주로 부상할 수 있다.

중동에서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소모적 충돌과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나라들보다는 터키가 과거 제국 지역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영향력을 넓힐 가능성이 더 크다. 남미에서는 브라질보다는 천혜의 국토 조건을 갖춘 아르헨티나가 지역의 중심이 될 수 있다. 특히 페론주의의 유일한 긍정적 유산인 ‘높은’ 출산율로 인해 인구구조가 매우 탄탄하다.

‘미국 없는’ 세계는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미국에도 도전적 과제다. 그러나 미국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라다. 앞으로는 홀가분하게 국익의 잣대로 동맹을 선택하면서 여전히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것이다. 더구나 각자도생의 세계는 미국 기업들에 더 큰 기회를 준다. 미국은 그런 활동을 지켜주기에 넉넉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 있는’ 세계에서 수혜를 입은 나라는 ‘미국 없는’ 세계에서 고전하게 된다. 특히 독일과 중국의 타격이 크다. 자력으로 공백을 메울 만한 일본은 예외다. 저자는 야속하게도 “한국의 호시절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우리야말로 수출 전략을 받쳐주던 ‘미국 있는’ 세계가 사라지면 큰일이다. 더구나 전 세계적인 인구 붕괴로 글로벌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고 있다.

저자의 충고는 더욱 뼈아프다. 한국이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협력해야 할 ‘유일한’ 상대는 일본이라는 것이다. 역내에서 영향력을 넓히려면 일본으로서도 한국은 절실한 상대다. 저자의 논쟁적인 전망은 호오(好惡)의 선입견을 떠나 전략적 담론 소재로 유연하게 음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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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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