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몸짱 의사의 4개국 어학연수 도전기]  시간이 멈춘 비극의 두 도시, 매년 수 백만명 부르다
  • facebook네이버 밴드youtubekakao 플러스친구
  • 검색
  1. 문화/생활
[2673호] 2021.08.30
관련 연재물

[몸짱 의사의 4개국 어학연수 도전기]시간이 멈춘 비극의 두 도시, 매년 수 백만명 부르다

툴루즈= 글·사진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2021-08-29 오후 3:11:31

▲ 알비 ‘주교도시’에 있는 성세실대성당의 프레스코.
프랑스 어학연수 4개월째,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것 이외에는 모든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결석은커녕 지각도 한 적이 없다. 수업과 숙제, 운동, 집필 활동에다 프랑스어 이외에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실력 유지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주말까지 일정이 빡빡하다. 어학연수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주변 도시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시간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두 도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 툴루즈에서 기차로 불과 1시간 거리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가 있다. ‘주교도시’ 알비와 ‘성채도시’ 카르카손이다.
   
   
▲ 툴루즈 근교 카르카손이 자랑하는 시테에 있는 캉탈성 입구의 해자 및 방어구조물.

   비극의 역사 위에 세워진 알비의 ‘주교도시’
   
   툴루즈에서 북동쪽으로 65㎞ 떨어진 알비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800년 전 피의 학살이 행해졌던 비극의 도시이다. 12~13세기 툴루즈를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기독교의 한 교파인 ‘카타리파’가 크게 번성했다. 알비에서 시작됐다고 해서 ‘알비파’라고도 부른다.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간주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1209년 옥시타니 지역에 대한 십자군 출정을 명령하는 칙서를 선포한다. 교황의 요구는 프랑스 남부 지배권을 자신의 왕권 아래 두고 싶어 했던 북부 왕조의 야심과 맞아떨어졌다. 결국 알비 십자군 원정은 카타리파 신도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의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낳았다. 1229년 툴루즈를 이끌던 백작이 항복하면서 툴루즈와 옥시타니 지역은 프랑스 왕실에 완전히 흡수되고 만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알비에서 과거의 상처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도시를 지켜온 타른강과 1035년에 지어진 퐁비유 다리 정도가 종교재판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졌던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주교도시(Cité Épiscopale)’ 구역의 중심 건물은 단연 성세실대성당과 주교의 거처였던 베르비(Berbie)궁전이다. 두 건물을 둘러싼 구역까지 문화유산에 속한다.
   
   성세실대성당은 무려 2세기에 걸쳐 건축됐다. 알비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1229년 가톨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짓기 시작해 1480년에나 완공됐다. 고딕 양식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대성당은 벽돌로 지어진 교회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알비 십자군전쟁 후유증 때문에 지역민 습격에 대비해 요새형으로 단단하게 지어진 모습이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 대성당은 종탑의 높이만 78m에 이르고 전체 건물의 길이는 113.5m, 폭은 35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건물의 기초를 이루는 벽의 두께만도 2.5m에 달한다.
   
   성세실대성당의 내부는 프레스코로도 유명하다. 벽과 천장 전체를 덮고 있는 벽화는 무려 1만8500㎡에 달한다. 이런 양식으로는 유럽에서 유일하다. 성세실대성당과 붙어 있는 베르비궁전은 중세기 알비의 역대 주교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베르비’는 옥시탄어로 주교라는 뜻이다. 13세기 후반에 건축된 이 건물은 성세실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알비의 잔존 카타리파 신자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요새처럼 지어졌다. 당시 주교의 세속적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안팎으로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던 가톨릭 주교의 상징과도 같던 이 궁전은 1905년 프랑스 정교분리법령(Loi de séparation des Églises et de l’État) 선포와 함께 교회의 소유권이 박탈되면서 공공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현재는 비운의 천재화가이자 이곳 출신인 툴루즈 로트레크의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알비의 ‘주교도시’에서 중심 건물인 성세실대성당(왼쪽)과 베르비궁전.

   ‘성채도시’ 카르카손의 전설
   
   ‘성채도시’ 카르카손은 툴루즈 남동쪽으로 95㎞ 정도 떨어진 곳이다. 기차로 1시간 거리이다. 오래전부터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주요 거점으로, 옥시타니 지역의 중심도시 중 하나였다. 피레네산맥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흘러가는 전장 223㎞의 오드강이 관통하듯 흐르고 있다. 이곳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두 개의 건축물이 있다. 하나는 지중해에서 시작되어 툴루즈까지 이어지는 미디운하이고 또 하나는 카르카손의 상징이면서 도시의 주요한 관광 수입원이 되고 있는 성채도시 시테(Cité)다.
   
   미디운하는 당시 기념비적인 건축 공사였다. 프랑스 남서부의 토호였던 리케 남작(Pierre-Paul Riquet·1609~1680)이 주도해 1667년 시작한 운하는 리케 남작이 죽고 난 후에야 완공됐다. 중세 성채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테는 카르카손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관광객들이 카르카손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테 때문이다. 팬데믹 이전에는 매년 관광객이 300만여명에 달했다.
   
   오드강 우안의 언덕 위에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시테는 무려 3㎞에 걸친 이중 석벽과 52개의 크고 작은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기 3세기경 로마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방어용 성채도시의 기반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해 로마의 쇠퇴와 함께 서고트왕국이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요새의 기틀을 완성했다. 시테에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711년 스페인의 지브랄타에 상륙한 이슬람군은 점점 세력을 넓혀 725년 카르카손까지 진출하고 시테를 차지한다. 카르카손을 다스리던 이슬람 왕자 발락(Ballak)의 부인인 카르카스 왕비는 남편이 샤를마뉴 대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성채 방어를 책임지게 된다. 병력 부족을 감추기 위해 가짜 군인을 만들어 탑에 배치하는 등의 계책으로 버텼지만 6년째에 접어들면서 성채 내 이슬람인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이슬람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성안에는 돼지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카르카스 왕비는 돼지들에게 밀을 잔뜩 먹인 다음 성벽 바깥으로 던졌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샤를마뉴 군은 돼지의 배에서 꽉 찬 밀이 발견되자 포위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철수를 결정한다.
   
   샤를마뉴 군의 포위에서 벗어난 카르카스 왕비는 성안의 종을 울려 자축했다. 철수 도중 종소리를 들은 샤를마뉴 군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카르카스가 종을 치고 있다(Carcas Sonne).” 그래서 도시 이름이 ‘카르카손(Carcassonne)’이 됐다는 이야기이다. 시테 성 앞에는 카르카스 왕비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시테는 몇 차례 주인이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프랑스 왕의 소유가 되었고 프랑스와 당시 스페인 아라곤왕국 사이 중요한 방어 기지 역할을 했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피레네조약으로 프랑스 국경이 카르카손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시테는 스페인을 견제하던 요새로서의 중요성이 사라졌다. 그 후 채석장으로 위상이 추락했고 한때는 철거 위기까지 처한다. 그러나 장 피에르 크로-마이르비유(Jean Pierre Cros-Mayrevieille·1810~1976)와 같은 역사학자가 앞장선 지역민의 반대로 오히려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19세기 말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시테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웅장한 이중 성벽의 모습이다. 외벽의 길이는 1.6㎞이고 내벽의 길이도 1.3㎞에 달한다. 이중 성벽을 지나 성채 안으로 들어가면 옛 중세시대의 거리와 마을 모습이 시간을 거슬러 한눈에 펼쳐진다. 성채 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콩탈성(Château Comtal)이다. 요새 중의 요새로 영주와 그의 군대가 거주하던 곳이다. 다른 곳은 모두 무료 관람이 가능하지만 이곳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콩탈성에서는 프랑스 중세 성의 진정한 모습과 함께 현장에서 발굴된 진귀한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1130년에 완성된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웅장한 대성당인 ‘생 나제르 바실리크(Basilique des Saint Nazaire et Celse)’도 놓쳐서는 안 되는 볼거리다.
   

   ‘알비’의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Musée de Toulouse-Lautrec)
   물랭루주의 작은 거인… 비운의 천재의 삶 한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 알비에서 꼭 봐야 할 목록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이다. 천재 화가였으나 비운의 삶을 살았던 툴루즈 로트레크의 고향이 바로 알비다. 그의 사후 유족들이 알비시에 기증한 작품들이 있는 미술관은 오늘날 알비를 꼭 방문해야 할 이유가 되고 있다.
   
   이곳에는 로트레크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로트레크는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전시가 열린 것을 계기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필자는 프랑스에 오기 전에는 로트레크에 대해 몰랐다. 툴루즈 시내에서 우연히 로트레크의 작품을 보고 매력에 이끌려 미술관을 찾아 나서게 됐다. 미술관은 사진 촬영이 자유롭게 허용된 덕분에 인상 깊은 작품들을 실컷 사진에 담아 올 수 있었다.
   
   로트레크는 1864년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도시 알비에서 지역의 부유한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알폰스 백작(Alphonse de Toulouse-Lautrec)과 모친인 아델르(Adèle Tapié de Céleyran)는 사촌 관계였다. 부모의 근친혼은 그가 왜소하고 병약한 몸으로 유전 질환에 시달리다 만 36살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원인으로 지적되곤 한다. 그의 키는 골격계 질환으로 성장이 제한되어 152㎝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당시 동료 화가들의 그림에도 등장하는가 하면, 자화상에 자신의 모습을 자학적으로 그리곤 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병치레를 하던 그를 모친은 정성으로 돌보았다. 다행히 그는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말, 개 등 동물들은 물론 주위 풍경, 집안 하인 등 주위의 모든 사물이 그의 예술적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그가 만난 첫 스승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동물 화가 르네 프린스토(René Princeteau)였다. 로트레크는 르네로부터 동물, 특히 말에 대해 표현하는 기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이후 르네의 소개로 1882년 유명한 초상화가이자 역사물 화가였던 레옹 보나(Léon Bonnat)의 화실에 들어갔다가, 유명 역사물 화가였던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화실로 옮기게 된다. 로트레크는 두 화실을 통해 화법의 이론과 실기를 착실히 배워 나가는 한편 앙케탱(Louis Anquetin), 베르나르(Emile Bernard), 반 고흐(Vincent van Gogh) 등 당시 전위적 화가들을 동료로 만나 그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다.
   
   그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회화 작품이 737점, 수채화 275점, 포스터를 포함한 석판 369점, 그리고 5000점 이상의 데생 작품을 그렸다. 특히 물랭루주 주변의 창녀 그림은 전성기 대표작들의 주를 이루고 있다. 창녀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문학과 미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 당대를 주름잡던 마네(Edouard Manet), 드가(Edgar Degas). 앙케탱, 고흐 등 화가들은 물론 에밀 졸라(Emile Zola), 모파상(Guy de Maupassant)과 같은 자연주의 작가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로트레크는 그녀들의 단골손님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에 누구보다 사실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그렇지만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녀들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부드러운 화법으로 정감 있게 표현했다.
   
   창녀 작품 중 프랑스 회화사에서도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물랭가의 응접실(Au Salon de la Rue des Moulins)’이다. 1894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그의 그림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그의 미술관에는 파스텔과 유화로 그린 두 작품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당시 파리오페라극장 근처의 한 살롱 응접실에서 창녀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전해지는데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오른쪽 끝에 치마를 올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다. 이는 성병 전파를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의료 검진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과 함께 그의 재능이 빛난 분야는 포스터였다. 포스터는 보통 얇은 종이에 취약한 화학염료를 사용해 대형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빛에 약하고 장기간 보관이 어렵다.
   
   이 때문에 현재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에서도 정교한 작업을 거친 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1889년 개업한 파리의 유명한 카바레 물랭루주(Moulin Rouge) 측은 그에게 광고 포스터를 부탁했다. 이때 그가 물랭루주의 상징인 캉캉춤을 소재로 그린 포스터 ‘물랭루주, 라 굴뤼(Moulin-Rouge, la Goulue)’는 당시 엄청난 히트를 쳤고, 이 성공으로 로트레크는 포스터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포스터 제작에는 그의 또 다른 장기였던 석판화가 활용되기도 했다. 그의 포스터는 당시 프랑스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일본 판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포스터 작품은 그를 대중에게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898년부터 로트레크는 지병과 무절제한 생활습관이 겹치면서 점점 몸과 정신이 황폐해졌다. 다음해 모친의 손에 끌려 파리 근처의 뇌이(Neuilly)병원에 입원해 알코올중독, 매독 합병증 등에 대한 치료를 받게 된다. 퇴원해서도 불안정하고 초조한 상태는 지속됐고 몸 상태도 점점 악화됐다. 1901년 9월 9일 로트레크는 보르도 교외에 있는 말로메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말로메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타트업 프론티어
나는 체인지메이커다
할리우드통신
우리들병원
6대 온라인 커뮤니티
과학연구의 최전선
신협 어부바 콘텐츠 공모전
마감을 하며
아무도 못 가본 ‘위드코로나’ 정장열 편집장

사람들의 인내를 시험이나 하듯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확진자가 이미 사상 최대치를 기록...

주간조선 대학생 기사 공모
주간조선 칼럼마당
기업소식
네이버 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