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것을 비틀어 다시 보게 하기.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는 이 분야의 선두주자가 아닐까. 대부분의 영화가 남겨진 이들을 위로할 때 그는 ‘고스트 스토리’를 통해 떠난 이의 아픔을 대변했고, (산 자를 중심으로 설계된)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도 전복시켰다. (꼬마 유령 캐스퍼의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마저도!) 그의 장기는 은행강도와 그를 쫓는 경찰을 그린 ‘미스터 스마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쫓기는 이보다 쫓는 이가 어쩐지 더 절박해 보이는 영화. 장르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 강도와 경찰은 그곳에 없었다. ‘그린 나이트’의 개봉 소식을 듣고 잔뜩 기대를 품었던 이유다.

본래 나는 영화를 해석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규정하는, 틀 지우는 행위를 경계해서인데, 내가 잡으려 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들은 손가락 바깥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거니와, 영화란 어디까지나 감상자의 것으로 남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유의미한 해석이 있을지언정 정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리뷰를 쓰기 전에 적잖이 망설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리뷰가 하나의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쓰기로 한 것은, 내게는 ‘그린 나이트’가 유례없는 팬데믹의 시대에 로워리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은 모두는 각자의 대답을 마음속에 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니 이 리뷰는 그저 로워리의 질문에 대한 내 방식의 답변이 될 것이다.

내게 ‘그린 나이트’는 인간(문명)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결코 자연을 영원히 이길 수 없다는 것.

1 크리스마스 게임_ 도구가 된 자연

크리스마스 당일, 가웨인(데브 파텔)이 연회장에 도착하자 아서왕이 무용담을 들려달라 청한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는 가웨인은 당황하는데, 그 순간 연회장에 녹색의 기사 그린 나이트가 입장한다. 괴이한 형상을 한 기사는 다짜고짜 게임을 제안한다. 자신의 목을 베는 자는 영예와 재물을 얻으리라는 것. 단 1년 뒤 크리스마스에 ‘준 대로 돌려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기사는 제안을 끝으로 녹색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가웨인은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며 그린 나이트의 머리를 내려친다. 그런데 머리가 잘려나간 기사는 죽기는커녕, 일어나 머리를 들고 연회장을 빠져나간다.

이 도입부는 자연을 자신의 성취 도구로 이용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녹색의 기사 그린 나이트는 그 자체로 대자연의 은유이다.(그린 나이트가 왜 도끼를 인간에게 쥐여줬는지 생각해 보라.) 가웨인은 단지 자신의 무용담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벤다. 자연을 이용하고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린 나이트가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고 분명히 선언했는데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날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웨인은 인간을 대표해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벴고, 후에 그대로 돌려받을 것이다. 1년 뒤 가웨인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듯 도끼를 지고 죽음을 향해 가게 된다.

2 작은 친절_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

영화에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온다. 가웨인은 어쩐지 베푸는 것에 인색하며 자신이 베푸는 선의에는 즉각 보상이 따르기를 바라는데, 이는 자연에게서 무한히 얻기만을 바라며 끝없이 착취를 반복하는 인간을 은유한다. 여정 중 만난 소년(배리 케오간)에게 가웨인은 말과 녹색 허리띠, 도끼를 빼앗기고 몸을 결박당한 채 죽어간다. 소년은 가웨인에게 죽은 자들은 모두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으며(‘영예’를 얻기 위해 무의미한 일을 행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 이들 모두가 자연이 되어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 말하지만 가웨인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가웨인이 죽(은 것처럼 보이)자 황폐했던 숲이 즉시 생명력을 되찾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힌트가 있다. 인류의 소멸이 곧 자연의 회복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웨인의 생존이 확인되는 순간 숲은 다시 활기를 잃고 만다.

3 위니프레드와의 만남_ 욕망의 인간들

지친 가웨인은 폐가에 들어가 잠이 든다. 이때 정령 위니프레드가 가웨인을 찾아와 자신의 잘린 머리를 찾아달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가웨인은 대뜸 ‘그럼 무엇을 해줄 것이냐’고 묻는다. 앞서 소년을 만나 한차례 혼쭐이 났음에도 여전히 대가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인간은 합당한 보상 없이는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교환과 계약으로만 생각한다.) 가웨인이 호수에 들어가 해골을 발견하는 순간 검은 물이 붉은색으로 변하는데, 이는 욕망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인간의 민낯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4 막간_ 변함없는 가웨인

계속되는 여정으로 지친 가웨인 앞에 성이 나타난다. 가웨인은 성의 주인인 곰의 환대를 받지만 곧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성주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등장인물은 비인간 동물이거나 자연을 대변하는 존재다. 성주의 부인은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모순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말한다. 초록은 결코 음모를 꾸미거나 꾸물대지 않는다고.

여정의 끝에 가웨인은 녹색의 기사와 마주한다. 모험을 시작한 이후 (그린 나이트가 1년 뒤를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았던 가웨인은 비로소 자신의 끝을 받아들인다. 죽음을 맞은 가웨인의 자리엔 욕망이 훑고 지나간 초록색 흔적만이 남는다. 평생을 자신과 자연을 분리해 생각하며, 자연을 도구로만 간주해온 인간은 그렇게 끝끝내 자연이 된다. 영화는 말한다. 우리는 이제 그린 나이트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자, 여기까지가 내가 읽은 가웨인의, 아니 로워리의 이야기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다.

개봉 2021년 8월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

주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사리타 초우드리, 랄프 이네슨, 케이트 딕키, 배리 케오간, 숀 해리스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모험, 드라마, 판타지

국가 아일랜드, 캐나다

러닝타임 130분

박수영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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