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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5호]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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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특집]우리가 잃어버린 풍경들… 배운성의 ‘가족도’가 준 깨달음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2021-09-20 오전 9:30:34

▲ 김홍도. ‘타작’. 종이에 연한색. 27×22.7㎝. 국립중앙박물관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 나이가 벌써 육십이라고 했더니 내년에는 환갑잔치를 하라고 했다. ‘축(祝)’ ‘수(壽)’ ‘희(囍)’ 자 등의 글씨가 새겨진 과자와 떡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화려한 병풍을 휘두르고 앉아 가족 친지들의 축하를 받으라는 얘기였다. 그 말 끝에 두 사람 모두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아이고, 요즘 누가 환갑잔치를 해. 팔순잔치도 안 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 봤던 큰집의 잔칫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항상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큰집에 갔었다. 설, 추석, 제사, 회갑, 결혼식 등의 명절과 잔치는 언제나 큰집에서 했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계신 큰집에 가면 그때마다 꽃과 새가 그려진 병풍 앞에 떡과 과일과 고기가 푸짐하게 올려진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추운 설날도 좋지만 선선한 추석날은 더욱 좋았다. 친할아버지의 자손은 7남매였다. 지금처럼 둘만 낳는 시대도 아니고 ‘다다익선’이 자랑스러운 시대였으니 아들 다섯에 그 다섯의 손자들에 증손자로 이어지는 많은 자손이 방안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모여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은 어린 내가 봐도 장엄하고 웅장해보였다.
   
   이윽고 차례가 끝나면 드디어 기다리던 추석의 시작이었다. 방안과 대청마루 곳곳에는 작은 상들이 여러 개 차려졌다. 부엌에 있던 여자들은 부지런히 상 위에 음식을 내왔다. 마당에서 놀던 여자아이들도 비로소 섬돌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남자는 남자끼리 아녀자는 아녀자끼리 옹기종기 둘러앉아 고깃국물에 햅쌀로 지은 쌀밥을 말아먹었다. 밥을 먹는 도중 여기저기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면 차례상에 올려진 송편과 부침개가 내려졌고 어른들 상에는 약주가 올라갔다. 송편 다음에는 약과와 식혜가, 밤과 대추가 연달아 나왔다. 집에 돌아갈 때는 과일과 송편을 한 보자기씩 싸주셨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추석이, 한 해 농사를 수확할 수 있게 해준 하늘에 대해 감사한 날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린 나는 그런 철학적인 의미는 알지 못했다. 다만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를 구심점으로 해서 큰아버지집 식구들, 둘째 큰아버지집 식구들, 셋째 큰아버지집 식구들, 그리고 우리 식구와 작은집 식구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였던 날로 기억된다.
   
   
   귀한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
   
   그때 큰집에 모였던 친척들 중 1세대와 2세대는 진즉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3세대 중 막내에 속했던 내가 벌써 육십이 되었으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박재삼 시인이 노래한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이미 꺼진 지 오래되었다. 다시 켜지지 않은 장명등 위로 먼지가 수북이 쌓이는 동안 나는 조씨 집안을 떠나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고, 친정 식구들 외의 친척들과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이제는 김씨 집안에서도 연장자에 속한 나이가 된 지금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큰집의 잔칫상으로만 남아 있다. 꽃과 새가 그려진 화려한 병풍 앞의 잔칫상은 그래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 되었다. 내년에 환갑잔치를 열어 꽃과 새가 그려진 병풍 앞에 잔칫상을 차리면 그 그리움이 사라질까.
   
   ‘타작’은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에 들어 있다. 이 화첩에는 ‘주막’ ‘빨래터’ ‘자리 짜기’ ‘대장간’ ‘논갈이’ ‘서당’ ‘점심’ 등 서민들의 생활상 스물다섯 장면이 담겨 있다. 스물다섯 장면은 ‘타작’처럼 대부분 배경이 생략되었거나 필요한 부분만 간단하게 묘사되었다. 배경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고 풍속 장면만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이 간단한 화면에는 그러나 당시의 세태와 신분질서를 읽을 수 있는 의외의 복선이 숨어 있다.
   
   ‘타작’을 보면 남정네 네 명이 개상질로 타작을 하고 있다. 개상질은 소나무 등과 같은 굵은 나무를 바닥에 놓고 곡식단을 내리쳐서 알갱이를 털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개상질은 도리깨질과 함께 족답탈곡기와 콤바인이 도입되기 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타작법이었다. ‘타작’에서 두 명의 남정네는 볏단을 높이 들어 개상에다 힘껏 후려칠 자세를 하고 있다. 메치는 동작은 타작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이다. 볏단을 든 상태의 인물을 앞면과 뒷면으로 그린 것만 봐도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개상질할 때 엇비슷하게 마주 보는 자세로 자리를 잡는 것도 뒷모습으로 그린 이유가 될 것이다. 웃통을 벗어든 남정네는 볏단을 다시 들어 올릴 자세다. 오른쪽에서는 개상질이 끝난 볏단을 묶고 있고, 왼쪽에서는 흩어진 나락을 쓸어 모은다. 타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하다.
   
   왼쪽 상단에는 지게에 볏단을 가득 진 남정네가 작대기를 집고 서 있다. 노동 강도에 따라 웃통을 벗은 사람, 앞섶을 풀어 헤친 사람, 옷을 제대로 입은 사람 등으로 변화를 준 것도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재미를 더한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 세 사람, 심통 난 듯 표정이 굳은 젊은이, 무념무상으로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중년 등에서 나이에 따라 노동을 대하는 자세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화면에는 여섯 명의 타작꾼과는 다른 부류의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볏단 위에 돗자리를 깔고서 다리를 꼰 채 옆구리를 대고 엇비슷하게 누워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신분은 농경을 권장하던 관리인 권농관(勸農官)으로도 해석되고 지주 대신에 소작지를 관리하는 마름으로도 해석된다.
   
   어느 경우든 그는 타작하는 농민과는 다른 부류에 속하는 계급이다. 농경을 권장하든 농민을 감시하든 타작이 끝날 때까지 방관자로서(또는 잔소리꾼으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은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다. 그 긴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그는 탁주를 홀짝홀짝 마셔대기 시작했다. 한 잔 두 잔 마시는 사이 어느 새 취기가 올랐다. 곰방대를 빨면서 시간을 죽이는 가운데 갓이 삐뚜름해졌다.
   
   김홍도는 화면의 인물들을 X 자 형태로 배치하면서 권농관의 영역은 타작하는 사람들과 구분해 오른쪽 상단에 따로 떨어지게 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나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장의 그림으로 가을에 흔히 볼 수 있는 타작 장면뿐만 아니라 연령대별로 노동을 대하는 자세와 신분상의 차이까지 드러내 보였으니 김홍도의 능력은 가히 천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추석은 1년 중 가장 큰 달 ‘만월’이 뜨는 날이다. 그만큼 넉넉하고 충분한, 그래서 한 치도 부족함이 없는 날이다. 추석은 만월만 홀로 외롭게 뜨는 날이 아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피땀 흘려 기른 곡식과 과일이 농부의 노고에 성과로 보답하는 날이다. ‘타작’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경직도(耕織圖)’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역사가 아주 깊다. ‘경직도’는 ‘시경’과 ‘서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진 주(周)나라 주공(周公)의 정치철학이 담겨 있다. 어떤 정치철학인가. 임금은 마땅히 백성들의 괴로움과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애민사상이다. 주공은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게 해주려고 민간의 시를 채집하게 했다. 그것이 ‘시경’이다. 아무리 좋은 시도 읽지 않으면 그만이다. 여기서 다시 주공의 노심초사가 이어진다.
   
   그는 왕이 된 조카가 백성의 노고를 건성으로 넘길까봐 머리를 쥐어짰다. 그래서 찾은 묘안이 바로 그림이었다. 시각은 청각과 생각을 앞선다. ‘경직도’가 등장한 배경이다. 이런 전통 속에서 송대(宋代)에는 ‘경직도’와 ‘잠직도(蠶織圖)’의 틀이 완성되었고 명청(明淸)대로 계승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집중적으로 그려진 주제다. ‘경직도’는 농사짓는 모습을, ‘잠직도’는 길쌈하는 모습을 담았다. 농사와 길쌈은 고대 농업의 두 가지 큰 물줄기였다. 그중 ‘경직도’는 21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자담그기, 못자리갈이, 고루기, 씨뿌리기, 모내기에서 시작해 김매기, 벼베기, 말리기, 키질, 방아찧기, 채거르기, 창고에 들이기까지 농사에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가를 실감 나게 하는 내용들이다.
   
   화단에 심은 꽃 한 송이를 키우는 데도 천둥과 번개를 걱정하는 마음이 깃든다. 하물며 일 년 농사를 짓는 농부의 가슴에는 꽃 한 송이에 비할 수 없는 걱정과 조바심이 깃들 수밖에 없다. 그 조바심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는 때가 바로 추석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밤을 속 태우며 지새웠던가. 안도감과 감사함이 만월처럼 차오른다. 이제 수확만 남았다. 햇볕과 바람과 비를 내려준 하늘에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큰집의 차례상에 그 어느 때보다도 푸짐하고 넉넉한 정성이 깃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의미를 함축한 단어가 바로 추석이다. 어이 아니 귀한 단어이랴. 여기까지 오는 데 동고동락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소중한 인연들인가.
   
   
▲ 배운성. ‘가족도’. 1935. 캔버스에 유채. 140×200㎝. 국립현대미술관

   사람 집에 사람 올 때가 좋은 법
   
   가족은 혹은 친척은 그런 경험을 공유한 공동체다. 가깝기 때문에 더욱 애틋하고 그래서 때로는 남보다 더 치열하게 갈등을 겪을 때도 많다. 여러 가지 색깔이 뒤섞여 있긴 해도 희로애락을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귀하고도 귀한 인연들이다. 그 귀함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 또한 코로나19로 외부와 단절된 시간을 보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노래하듯 말씀하신 “사람 집에 사람 올 때가 좋은 법이다”라는 의미를. 나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심할 정도로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했었다. 지인들은 물론이고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대부분 나와 비슷할 것이다. 논문을 쓰거나 책을 읽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도 공부를 위한 절대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 만남을 희생한다. 그것이 또한 공부하는 자의 본분이라 여겼다.
   
   그런데 적막강산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지내다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 집에 사람 올 때가 좋다는 의미가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명절이 조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장치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명절이나 제사라는 명분이 없다면 도대체 그 많은 피붙이들을 어떻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하겠는가. 모두들 먹고사는 데 바빠 몇 년이 지나도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것이 아닌가.
   
   배운성의 ‘가족도(家族圖)’가 특별하게 다가왔던 이유도 코로나19의 유폐와 무관하지 않다. ‘가족도’는 마치 나의 어린 시절 큰집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 같은 작품이다. 배경은 대청마루가 있는 한옥이다. 할머니와 아들 부부를 중심으로 17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족들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최대한 점잖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여느 가족사진처럼 할머니는 무릎에 손주를 앉히고 의자에 앉았다. 그 뒤로는 실질적인 한옥의 주인인 중년 부부가 서 있고 주변에는 아이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다. 저 장소 안에 있을 때는 무덤덤하겠지만 고향을 떠나거나 세월이 많이 흘러서 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을 울컥하게 하는 그리움을 부르는 그림이다.
   
   ‘가족도’는 배운성(1901~1978)이 독일 유학 시절인 1935년에 그렸다. 배운성은 한국 최초의 유럽 미술 유학생이었다. 유학이라고 하면 배운성이 상당히 재력 있는 집안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그는 서울 명륜동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보통학교를 중퇴했고, 15세 때 금융재벌인 백인기(白寅基)의 집안에 서생(書生)으로 들어갔다.
   
   배운성은 매우 부지런하고 총명했다. 부지런함이 항상 보답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큰 행운을 불러올 때도 있다. 백인기는 그의 재능을 아껴 중동학교를 졸업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하게 했다. 22세였던 1922년에는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함께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말하자면 신세를 진 후원자의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동반유학이었다. 말이 동반유학이지 주인집 도련님의 집사나 다름없었다.
   
   배운성은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화가의 길로 전환했다. ‘가족도’는 백명곤의 주문에 의해 백인기의 가족들을 그린 작품이다. 주문자의 가족사진에 배운성의 모습도 그려 넣었다. 그림 맨 왼쪽에 한복을 입고 서서 살짝 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화가 배운성이다. 그가 백인기의 가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갈까.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여러 지점이 떠올랐지만 만약 딱 한 번만 갔다 올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추석날 큰집으로 가고 싶다. 가서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비롯해 나와 함께 밥을 먹었던 일가친척들을 다시 한 번만 보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삿날 불빛 같은 그리움
   
   이런 감상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확실히 내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덜컹 내려앉거나 사소한 일에도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나이 탓이 큰 것 같다. 때론 내가 가장 기피했던 ‘왁자지껄’ ‘북적거림’ 등의 상태가 그리울 때가 있다. 큰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 왁자지껄한 장소에 육친의 목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설던 명절이, 결혼하고 나서는 시댁에 가서 막노동하는 날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명절 같은 것 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시댁 조상들을 위해 제사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배운성의 ‘가족도’를 보면서 시댁에 가서 막노동을 해도 좋으니 이번 추석은 반드시 일찍 내려가서 홀로 계신 시어머니와 함께 차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큰집 대신 지금이라도 갈 수 있는 시댁에 가서 또 다른 가족 풍경을 만들어야겠다. 시댁에서의 추석이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에게는 또 다른 큰집의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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