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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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학생들과 함께 어학연수라는 것을 하다 보니 새로운 경험을 한다. 대부분 20대인 학생들의 이동은 비교적 잦다. 필자처럼 어학연수만 하고 돌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현지 진학이나 취업이 목표다. 이들의 특징은 실전 프랑스어에 강하다는 것이다. 이들 중 강의실에서 만나기 힘든 학생들이 있었다.

알고 보니 현지 체류를 위한 편법으로 어학원에 등록만 해놓고 가끔씩 얼굴을 내민다고 했다. 어학연수는 강의실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체험이야말로 어학연수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몰입(immersion)의 환경에 빠지게 돕는다. 특히 식도락은 빼놓을 수 없다.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귀중한 체험이다. 그런 점에서 툴루즈, 나아가 프랑스의 음주 환경과 술에 대해 알아보자.

2020년 초 프랑스의 언론매체들은 일제히 ‘프랑스 국민건강 연구(Étude de Sante Publique)’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의 주(레지옹·Région·우리나라의 도에 해당) 중에서 알코올 섭취량이 가장 높은 곳이 필자가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옥시타니주였다.

18~75세 성인을 대상으로 매일 술을 마시는 비율을 조사했는데 옥시타니주가 12.6%로 1위, 남서부 권역의 누벨 아키텐(Nouvelle Aquitaine)주가 12.3%로 선두권이었다. 반면 파리가 속해 있는 일드프랑스는 7.1%로 가장 낮았으며 노르망디 7.9%, 페이드라루아르(Pays de la Loire)주 8.1%로 하위권이었다.

주종도 차이를 보였는데 북부와 동부에서는 맥주 소비량이 높은 반면 남부와 서부에서는 와인과 함께 알코올 도수가 높은 스피리츠(spirits) 소비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툴루즈가 속해 있는 옥시타니주의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도수가 높은 술들을 더 잦은 빈도로 마신다는 조사 결과였다.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었는데 파티와 축제를 즐기는 성향과 최근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진 실업률 등을 꼽고 있었다. 이렇게 술 소비가 높은 옥시타니주의 중심 도시에 머물면서 필자가 그동안 만났던 프랑스의 술들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다만 맥주의 경우 툴루즈에서도 보편적으로 소비되는 술이지만 프랑스가 이렇다 할 만한 맥주 생산국이 아닌 데다 툴루즈의 대표 맥주나 특별한 소비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프랑스는 자타 공인 와인 대국이다. 생산량은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2위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단연 선두다. 특히 서쪽의 보르도와 동쪽의 부르고뉴를 양대 축으로 프랑스 전역에 산재해 있는 와인 산지들은 각자 개성 있는 제품들을 생산하며 다양성을 뽐내고 있다. 그중 툴루즈를 중심으로 한 옥시타니주는 상대적으로 대외적인 지명도가 떨어지는 지역이다. 그런 만큼 가성비가 높은 보석 같은 와인들을 만날 수 있다.

최고의 가성비 옥시타니 와인

옥시타니주는 201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미디피레네주와, 전통적 와인 산지인 랑그도크-루시용 지역이 합쳐졌다. 그 결과 프랑스 내에서 최대 포도 재배 면적을 자랑한다.

와인 산지별로 나누어 보면 우선 2260㎢에 달하는 랑그도크-루시용 지역이 있다. 나머지 500㎢ 지역은 옛 미디피레네 지역 및 보르도 남쪽의 일부 지역을 포함해 ‘남서부(Sud-Ouest)’ 지역으로 불리고 있다.

이 중 랑그도크-루시용 지역은 지중해기후를 바탕으로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레드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화이트와인은 샤도네이나 소비뇽블랑 같은 잘 알려진 품종이 주종을 이룬다. 그 밖에 론 지방의 대표적 포도 품종인 그르나슈, 시라, 비오니에 등을 사용한 와인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반면 남서부 지역은 기후적으로는 대서양의 해양기후와 피레네산맥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데, 특징적으로 지역 토착의 포도 품종이 거의 절반 가까이 재배되고 있다. 뒤라스(Duras), 타나(Tannat), 네그레트(Négrette), 망상(Manseng) 등의 품종은 웬만한 와인 애호가들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고 국제적 품종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곳은 유명한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유럽 와인 특히 프랑스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원산지 통제 명칭’과 ‘원산지 보호 명칭’이란 용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원산지 통제 명칭(AOC·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이란 가짜 와인으로부터 정상적인 와인 생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1935년부터 만든 제도다. 모두 4등급으로 나누어졌는데 이 제도 도입 이후 와인의 등급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웃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도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필자도 20여년 전 와인 공부를 하면서 아오세(AOC), 뱅 데리미테 드 쿠알리테 슈페리에(Vin Délimité de Qualité Supérieure·VDQS), 뱅 드 페이(Vin de Pays), 뱅 드 타블(Vin de table)로 구성되는 4단계 등급 체계를 외우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유럽연합이 발족하면서 2009년부터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것이 ‘원산지 보호 명칭(AOP·Appellation d’Origine Protegée)’이다. 모두 3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AOP 다음 등급으로 ‘지리적 보호 표시(IGP·Indication Géographique Protegée)’가 있고 마지막으로 특별한 지리적 규제 없이 만들 수 있는 ‘프랑스 와인(Vin de France)’이 있다.

다만 AOP 명칭의 경우 사용이 의무적인 것은 아니어서 프랑스 내수용은 AOP 대신 여전히 AOC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옥시타니주에는 현재 60개 정도의 AOP 와인과 50여개의 IGP 와인이 있다. 최근 새로운 AOP와 IGP가 계속 추가되기 때문에 숫자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옥시타니 와인의 장점은 무엇보다 높은 가성비에 있다. 다른 지역의 와인에 비해 결코 품질에서 뒤지지 않으면서 대부분 원화로 5000~1만원 범위에서 즐길 수가 있다. 비싼 제품도 1만5000원을 넘지 않으며 IGP 제품인 경우 5000원 이하도 있다.

프랑스의 주 중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주는 툴루즈가 있는 옥시타니주이다. 사진은 툴루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바의 모습.
프랑스의 주 중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주는 툴루즈가 있는 옥시타니주이다. 사진은 툴루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바의 모습.

코냑에 가려진 영원한 2인자 아르마냑

애주가라면 브랜디의 제왕이면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술인 코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코냑에 못지않은 역사와 품질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브랜디, 아르마냑(Armagnac)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르마냑은 툴루즈 서쪽이자 보르도에서는 남쪽에 있는 옛 가스코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가스코뉴의 남자들은 용맹스러워서 용병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알렉상드르 뒤마의 유명한 소설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에 나오는 주인공 달타냥도 바로 이곳 출신이다.

브랜디 역사 속에서 아르마냑은 코냑보다 앞선 1411년 기록에 등장한다. 당시 스페인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교도인 무어인(Moors)들이 피레네산맥을 건너 아랍의 증류법을 아르마냑 지방에 전해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17세기에 들어 아르마냑은 멀리 네덜란드 상인들이 즐겨 사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나 코냑 지방과는 달리 주변에 수출용 항구가 없어 불규칙한 육로 수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보니 외부에 알려지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철로와 운하의 건설로 19세기 한때 전성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최근 조금씩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아르마냑은 두 번 증류하는 코냑의 방식과는 달리 한 번만 증류한다. 증류기도 단식 증류기를 사용하는 코냑에 비해 연속식 증류기를 사용한다. 다만 증류 후에 오크통 숙성을 시키는 것은 같다.

아르마냑도 원산지 통제 명칭(AOC)의 대상이다. 위니 블랑(Ugni Blanc) 단일 품종만 사용하는 코냑에 비해 AOC 아르마냑에서는 모두 열 가지 포도 품종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는데, 그중 75%가 위니 블랑이고 바코 블랑(Baco blanc) 19%, 콜롬바드(Colombard) 4%, 폴 블랑슈(Folle Blanche)가 1%를 차지한다.

아르마냑 산지는 바사르마냑, 테나레즈, 오타르마냑 세 지역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좋은 제품들은 바사르마냑과 테나레즈 두 지역에서 주로 나온다. 아르마냑은 앞으로도 코냑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기회가 되면 한 잔의 아르마냑으로 협객 달타냥의 의협심과 낭만을 느껴 보시는 것은 어떨지. 다만 알코올 도수 40도의 술이기 때문에 현명한 절제가 필요하다.

명품 리큐어의 천국

옥시타니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다양한 리큐어를 만날 수 있다. 리큐어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두 용어 리커와 리큐어의 차이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먼저 리커(Liquor)는 스피리츠(spirits)라고도 불리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증류주와 동의어라고 보면 된다. 알코올 도수가 20% 이상인 독주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40% 정도가 가장 보편적이다. 리커의 특징은 단맛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리큐어(Liqueur)는 항상 단맛을 동반한다. 기본적으로 위스키, 브랜디, 럼 같은 리커를 베이스로 각종 향료나 약초, 과일 등 단맛을 첨가해 만들기 때문이다. 알코올 도수는 다소 낮아 15~20% 제품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30%를 훌쩍 넘어 40% 전후의 유명 제품도 여럿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주를 베이스로 다양한 약초와 설탕을 넣어 ‘약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술들이 모두 리큐어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카리브해와 프랑스가 만드는 명품 럼

카리브해는 사탕수수를 주원료로 만드는 술인 럼의 세계적 명산지다. 그런데 프랑스산 럼이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카리브해와 럼과 프랑스!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는 이 조합의 비밀은 바로 프랑스의 해외 영토에 있다.

프랑스는 행정구역상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레지옹이 모두 18개 있다. 이 중 13개가 코르시카섬(프랑스어로 코르스·Corse)을 포함하여 프랑스 본토에 있고, 나머지 5개 레지옹은 과거 식민지의 흔적으로 해외에 있다. 5개 레지옹 중 ‘라 레위니옹(La Réunion)’과 ‘마요트(Mayotte)’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 근처에 있고 기아나는 남아메리카에 있다. 나머지 두 레지옹이 바로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들인 마르티니크(Martinique)와 과들루프(Guadeloupe)다.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서는 지역적 특성을 활용하여 사탕수수로 만드는 럼을 생산하고 있다. 이 두 곳의 럼은 다른 지역 럼과 차이가 있다. 일반 럼이 사탕수수에서 사탕을 추출한 다음 일종의 찌꺼기로 남은 당밀(méllasse)을 발효시킨 다음 증류 과정을 거쳐 럼을 만든다면,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의 럼은 사탕수수에서 직접 신선한 주스를 짠 다음 이를 발효시켜 럼을 만든다. 이런 제조법의 차별성을 인정받아 현재 마르티니크의 럼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원산지 통제 명칭(AOC)’ 인정을, 그리고 과들루프의 럼들은 ‘지역 표시(IG)’ 인정을 받았다. 비록 프랑스 밖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지만 프랑스 여행 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맛을 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술이다.

툴루즈의 대표 리큐어

‘007’ 제임스 본드 첫사랑의 추억이 담긴 술은 어떤 맛일까

1. ‘가스코뉴’의 꽃다발

플로크 드 가스코뉴(Floc de Gascogne)는 부분 발효된 포도즙에 오래되지 않은 아르마냑을 혼합하여 알코올 도수를 강화해 만든 리큐어의 일종이다. 16세기부터 만들어온 이 술은 이름 그대로 남서부의 옛 지명인 가스코뉴 지방의 전통 술인데, 술 이름 중 플로크(Floc)는 가스코뉴어로 ‘꽃다발’이란 의미이다. 필자도 이 술의 존재를 툴루즈에 와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마셔 보니 이름 그대로 상큼하고 꽃향기가 물씬한 맛이 일품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발효가 끝나지 않은 포도즙 3분의2에 아르마냑 3분의1을 섞어서 만드는데 강한 도수의 브랜디인 아르마냑 때문에 포도즙의 발효가 중단되어 잔당의 영향으로 전체적으로 가벼운 단맛이 느껴진다. 이후 반드시는 아니지만 수개월간 오크통 숙성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 냉장을 한 후 마셔야 제맛이 나며 주로 식전주로 활용된다. 1990년부터 원산지 통제 명칭(AOC) 인증을 받고 있는데 지역은 아르마냑과 일치한다.

2. ‘샤랑트’의 피노

피노 데 샤랑트(Pineau des Charante)는 앞서 말한 플로크 드 가스코뉴의 코냑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술 모두 포도즙이 재료를 이루는 것은 같으나 피노 데 샤랑트에서는 아르마냑 대신 코냑을 사용하여 포도 발효를 중단하고 알코올 도수를 올린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코냑 근처 샤랑트 지방의 한 와인 제조업자가 코냑이 통 밑에 들어 있는지 모르고 통 속에 포도즙을 발효시키기 위해 넣어 두었는데 나중에 기가 막힌 술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상업화하기 시작했지만 국제적 지명도는 그리 높지 않아 주로 프랑스 국내에서 소비된다. 필자가 맛을 보니 감미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풍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역시 차게 해서 마셔야 하며 식전주로 활용된다.

3. ‘007’과의 인연이 돋보이는 릴레(Lillet)

릴레는 보르도 지역의 와인 85%에 오렌지 베이스의 리큐어 15%를 섞어 만든 식전주로서 유럽연합의 법적 분류상 방향성 와인에 속한다. 화이트(릴레 블랑·Lillet Blanc)와 레드(릴레 루즈·Lillet Rouge) 두 종류가 있는데 화이트에서는 세미용(Semillon) 포도를, 레드에서는 메를로(Merlot) 포도를 사용한다. 알코올 도수는 17%다.

19세기 말 파스퇴르가 다양한 병원균의 존재를 밝히자 유럽에서는 세균에 의한 감염 가능성에 공포심을 가졌다. 이런 가운데 파스퇴르가 “와인은 몸에 좋고 가장 위생적인 음료다”라고 말하자 말라리아 같은 열병에 걸리면 키니네를 탄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1872년 프랑스 보르도 남쪽에 있는 포동삭(Podensac)에서 주류상을 개업한 릴레 형제가 키니네와 보르도 와인 그리고 오렌지 리큐어를 혼합하여 새로운 식전주 ‘키나 릴레(Kina Lillet)’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현재는 키니네를 의미했던 키나(Kina)는 빼고 릴레로 불린다. 릴레 제품에서도 아주 소량의 키니네 성분이 존재한다고 하나 회사 차원에서의 확인은 없다. 현재 출시되고 있는 화이트와 레드 모두 쓴맛을 느끼기는 어려우며 화이트는 오히려 단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릴레를 이야기할 때 ‘007’ 제임스 본드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는 전설적인 대사를 낳은 ‘007’ 시리즈의 대표 칵테일 보드카 마티니에 대해서는 많이 알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와 그의 첫사랑 베스퍼의 추억이 진하게 스며 있는 또 하나의 칵테일 ‘베스퍼 마티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처음으로 본드 역할을 맡은 ‘카지노 로얄’(2006)에서 본드가 포커게임에 합류한 뒤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바텐더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Three measure′s Gordon′s, one of Vodka, half of Kina Lillet, Shake it over ice, Then add a thin slice of lemon peel.(고든스와 보드카 그리고 키나 릴레를 얼음과 함께 흔든 뒤 얇은 레몬 한 조각을 얹어 달라.)”

여기서 ‘고든스’는 ‘진’의 한 상품명이다. 이 칵테일의 묘미는 바로 키나 릴레에 있는데, 키니네를 함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쓴맛이 날 수밖에 없었다. 본드는 포커게임 후 승리를 자축하면서 베스퍼에게 칵테일의 이름을 ‘베스퍼’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베스퍼는 칵테일의 쓴맛을 떠올리면서 조심스럽게 말한다.

“Because of the bitter aftertaste?(씁쓸한 뒷맛 때문인가요?)”

본드의 대답은 이렇다. “No, because you′ve once tasted it, that′s all you want to drink.(아니오, 한번 맛을 보면 그것만을 갈망하게 될 것이오.)”

지금은 릴레에서 쓴맛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프랑스 여행 중에 이 술을 발견하면 본드와 베스퍼의 사랑을 되새기며 식전주로 토닉과 섞어 한잔 음미해보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릴레는 1981년 연쇄살인범을 그린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한니발 렉터’에서 한니발이 가장 즐기는 술로도 묘사되었다.

4. 압생트의 악몽 속에서 탄생한 파스티스

파스티스(pastis)를 리큐어의 범주에 넣는 것은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같이 묶어 설명한다. 파스티스는 한마디로 아니스(anise)를 주 성분으로 한 증류주다. 아니스는 이집트가 원산지인 미나리과의 한해살이풀로 유럽, 터키, 인도, 남미 등에 널리 분포, 재배되고 있는데 지중해산이 특히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스는 독특한 향 때문에 향신료로 사용되거나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빵이나 술의 재료로도 사용된다.

아니스 베이스의 술은 지중해 주변에서는 터키의 라키(raki), 그리스의 우조(ouzo), 이탈리아의 삼부카(sambuca) 등에서와 같이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데 프랑스의 파스티스도 이 중 하나다. 이들은 모두 강한 아니스 향이 나며 입안을 깔끔하게 만들어주는 맛으로 주로 식전주로 이용된다. 프랑스의 파스티스는 압생트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압생트는 55~72%의 증류주로 주재료는 쓴쑥(wormwood)과 아니스다. 이 중 쓴쑥은 유럽 원산의 국화과 다년생식물로 쓴맛이 강한데, 압생트라는 술 이름이 라틴 학명인 ‘Artemisia absinthium’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재료다. 1797년부터 본격적인 상업화가 시작된 압생트는 19세기 중반 알제리전쟁 때 프랑스군이 열병의 예방 및 치료제로 사용하면서 전쟁 후 귀국한 군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당시 필록세라 병충해로 와인 생산이 격감했을 때 압생트의 대량 생산이 이뤄지면서 19세기 말 프랑스 전역의 다양한 계층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끝을 모르던 압생트의 인기에도 먹구름이 다가왔다. 압생트의 주성분인 투존이 불안, 경련, 현기증, 근육장애 등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급기야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사건이 압생트 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05년 스위스의 한 농부가 압생트를 마신 상태에서 부인과 두 딸을 총으로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결정적인 타격이 됐다.

마침내 압생트는 벨기에(1906), 브라질(1906), 폴란드(1908), 스위스(1910), 미국(1912) 등에서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고, 결국 1915년에는 본산지인 프랑스도 그 뒤를 따른다. 압생트의 아니스 향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압생트 판금 17년 만에 폴 리카르(Paul Ricard)라는 사람이 내놓은 상품이 바로 파스티스다. 물론 파스티스에는 쓴쑥도 들어 있지 않고 사용하는 아니스의 종류도 다르다. 그러나 아니스 향의 매력은 여전해 본거지인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지금은 툴루즈를 포함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알코올 도수 40%의 파스티스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물과 섞어서 마시는 것이다. 얼음을 같이 넣으면 화학반응으로 알코올에 용해되어 있던 아니스의 에센셜 오일(essential oils)이 침전되어 나오면서 투명했던 술 색깔이 젖빛으로 변한다. 터키에서는 이 술을 ‘사자의 젖(lion’s milk)’으로 부르기도 한다.

5개 이상 알면 당신은 와인 전문가?

10개의 남서부 와인 AOC·AOP 중 과연 이름을 들어본 게 몇 개나 될지? 2~3개 이상만 알아도 대단하고 5개 이상이라면 옥시타니 특히 남서부 와인에 대해 전문가 수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지역 와인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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