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 사성암은 산·들판·강물 3박자가 갖추어진 명당이다. ⓒphoto 뉴시스
전남 구례 사성암은 산·들판·강물 3박자가 갖추어진 명당이다. ⓒphoto 뉴시스

‘도선국사는 풍수 공부를 어떻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한국의 비공식 종교가 바로 명당교(明堂敎)이다. 명당을 좋아하고 명당을 숭배하는 문화가 한국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다. 한국 사람 치고 명당 싫어하는 사람 없다. 이러한 명당교의 교주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도선국사이다. 도선국사는 풍수의 이치를 누구에게 배웠는가? 계보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하는 무사자오(無師自悟)의 케이스인가?

도선국사는 지리산의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異人)? 불교 계통의 스님은 아니고 ‘유니폼이 없는 인물’을 가리킨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도사였다고 추측된다. 아마도 선가(仙家)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선가(仙家)의 도인들이 있었고, 이 사람들은 땅의 기운과 산세의 순역경계, 그리고 물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도선국사는 827년에서 898년까지 살다가 간 불교 승려이다. 머리를 깎은 불교 승려였지만 풍수는 불교계의 고승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어떤 ‘이인’, 즉 한국의 토착적인 선가의 도인으로부터 배웠다는 점이 주목되는 부분이다.

도선국사가 죽을 때까지 머물렀던 절이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이다. 광양의 백운산 자락에 있는 절이다. 백운산도 1000m가 넘는 고산이지만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지리산을 마주 보고 있는 산이다. 필자가 옥룡사를 몇 번 왕래하면서 도선국사와 관련된 촌로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도선이 머리를 깎고 젊었을 때 백운산에 오는데, 길바닥에서 먹을 것이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인 어떤 노인을 발견하고 이 노인을 잘 간호하였다고 한다. 생명을 구해준 도선에게 이 노인이 보답으로 알려준 콘텐츠가 바로 풍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노인이 도선에게 풍수를 알려주기 위해 데리고 간 지점이 바로 구례의 사도리(沙圖里)이다.

현재 구례에는 ‘사도리’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 모래에다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어떤 그림을 그렸나. 바로 산천(山川)의 순역경계(順逆境界)를 그렸다. 칠판과 분필이 없던 시절에 산의 높이와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기에는 모래사장이 가장 적당하다. 모래성을 쌓듯이 산을 쌓아놓고, 이 높낮이에 따라 물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이 기를 모아 주는가, 아니면 기를 흩어 버리는가를 보여줄 수 있다. 도표도 한두 장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수백 장의 도표를 그려볼 필요가 있다. 풍수는 그만큼 다양한 케이스가 많기 때문이다. 순역경계라는 말의 뜻은 바로 이 다양한 산의 모습과 물의 모습을 가리킨다.

자라가 엎드린 모양 오산에 위치

구례는 섬진강이 완만하게 돌아나가는 지점이다. 자연스럽게 강의 모래가 쌓일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사도리’라는 지명은 도선국사의 풍수 학습장 역할을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사도리에서 지리산의 이인으로부터 풍수 레슨을 받고 나면 오산의 꼭대기쯤에 있는 사성암으로 이동했다고 추측된다. 이동거리는 15리쯤 될까. 왕복이 가능한 거리이다. 사성암(四聖庵). 네 명의 성인이 여기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생긴 이음이다. 원효, 의상, 도선, 그리고 고려 후기의 진각국사이다. 사성암은 근래에 붙여진 이름이고 고문헌에 보면 이 암자는 오산사(鰲山寺)라고 나온다. 자라 오(鰲) 자이다. 산의 모습이 자라처럼 생겼다. 지금의 구례구역이 있다. 이 구례구역에서 오산을 바라다보면 흡사 자라가 물을 먹으려고 강가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오산의 높이는 531m.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사성암, 그리니까 옛날 오산사는 백제 성왕 때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백제 때 사찰이다. 화엄사도 연기조사 창건설이 있다. 지리산 천왕봉의 법계사, 그리고 산청의 대원사도 모두 연기조사 창건설이 있다. 연기조사가 통일신라 때 승려라는 설도 있지만 필자는 백제 때의 인물로 본다. 연기조사 창건설이 있는 절터들이 대부분 백제 영토였기 때문이다. 전북 고창에도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선운사와 연기사(緣起寺)가 있었다. 이 인천강 안쪽에 지금은 폐사가 되었지만 연기사가 있었다. 백제 때 연기조사 창건설이 있었던 절이다. 사성암은 백제 때부터 화엄사와 함께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기조사가 창건했던 절들은 모두 영험한 터이다. 연기조사 창건 터에 가보면 한결같이 강력한 지기가 올라오는 지점들이다. 자라처럼 생긴 오산도 산은 높지 않지만 지리산 전체를 맞상대하는 지점에 있다. 지리산 화엄사와 오산의 사성암 사이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강물이 중간에 흘러가면 그 산의 맥도 다르게 본다. 사성암의 오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산이다. 광양의 백운산에서 쭉 이어진 산자락이 섬진강을 보고 멈추어 선 지점인 것이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가운데 맥이 뭉친 지점이지만, 오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 정기가 뭉친 결국(結局)인 것이다. 갈래가 다른 산이다. 물론 총론으로 크게 보면 다 백두대간이지만 각론으로 보면 갈래가 다르다.

도선국사가 머물렀다는 사성암의 또 한 가지 주목 사항은 바위 절벽이다. 오산의 꼭대기는 커다란 바위들이 돌출되어 있다. 작은 석림(石林)에 해당한다. 중국의 윈난성에 가 보면 석림이라는 명승지가 있다. 바위들이 직립으로 서 있다. 숲의 나무처럼 서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오산 꼭대기의 이 바위들은 그 석림의 가장 오래된 고목들을 뽑아다가 놓은 것 같다. 오래된 고목 같은 바위들이 서 있는 것이다. 병풍같이 서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 바위 숲속에 절이 자리 잡고 있다. 1만볼트짜리 고압선 사이에 암자가 있다. 강한 전류가 흐르는 곳이다. 그러니 일찍부터 정신세계의 고단자들이 선호했던 터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터를 그냥 놔둘 리 없다.

사성암에서 바라다보면 지리산 노고단 일대가 다 보인다. 사성암에서 보면 지리산의 호위병력이 된다. 나를 지켜주는 호위병력인 셈이다. 과장한다면 ‘지리산 전체와 맞짱을 놓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나 할까. ‘산부재고 유암수즉명산(山不在高 有巖水則名山)’이다. 산은 높다고 장땡이 아니다. 바위와 물이 있어야 명산이다. 여기에서 물은 먹는 샘물, 즉 바위 틈에서 나오는 석간수(石間水)도 있어야 하고, 그 터를 둘러싸는 강물이 있거나 아니면 호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산의 사성암을 둘러싸는 강물은 섬진강이다. 사성암에서 바라다보면 이 섬진강이 둥그렇게 감아 돌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컴퍼스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는 것처럼 섬진강 물이 감싸고 흘러간다. 이걸 풍수가에서는 금성수(金星水)라고 부른다. 아주 둥그렇게 터를 감싸 돌아가는 금성수, 이 금성수가 교과서처럼 흘러가는 곳이 사성암이다. 사성암 앞으로는 넓은 구례 들판이 포진하고 있고 쌀이 나온다. 정기가 뭉쳐 있는 산·들판·강물 3박자가 갖추어진 명당이 바로 사성암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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