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가 맞붙은 2021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에는 위드코로나에 맞춰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의 프로야구는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게 야구인들의 중론이다. ⓒphoto 뉴시스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가 맞붙은 2021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에는 위드코로나에 맞춰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의 프로야구는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게 야구인들의 중론이다. ⓒphoto 뉴시스

흔히 KBO(한국야구위원회) 10개 구단과 프로야구 중계방송사의 관계를 가리켜 ‘공생’ 관계라고 한다. 프로야구는 전 경기 중계방송을 통해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의 지위를 유지하고, 방송사 역시 킬러 콘텐츠인 프로야구 중계로 높은 시청률과 광고 수익을 누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0월 끈끈했던 KBO리그와 중계방송사 간 파트너십에 생채기가 생겼다. KBO리그를 중계하는 스포츠 방송국 4사(MBC SPORTS+, KBSN스포츠, SBS스포츠, SPOTV)가 KBO를 상대로 중계권 관련 손해배상 논의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 법적조치를 하려는 의도보다는 KBO리그 중단 사태와 후반기 일정 파행으로 생긴 방송사들의 어려움을 알아달라는 게 공문 발송의 취지다.

지난 3월 30일 정지택 KBO 총재가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SSG 랜더스 창단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30일 정지택 KBO 총재가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SSG 랜더스 창단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2~3년짜리 단기 사장님들의 리그

방송사들의 하소연에는 KBO리그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사상 초유의 리그 중단 사태와 뒤이은 후폭풍으로 방송사들은 중계방송 제작비용부터 광고매출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평균 0.8%대를 기록했던 중계방송 시청률이 올해 후반기엔 0.5%까지 하락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KBO리그 인기 구단 맞대결 중계방송은 시청률 2~3%가 기본이었다. 아무리 인기 없는 팀 간의 무관심 경기도 최소 1%는 넘겼다. 그런 KBO리그 시청률이 이제는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낮에 방영하는 액션영화 시청률 수준으로 폭락한 것이다. 시즌 막판엔 일부 경기가 여자 배구 생중계에 밀려 녹화 중계로 새벽에 방영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리그 중단 사태는 프로야구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KBO리그의 근본적인 문제와 구조적 한계가 가져온 결과에 가깝다. 사라예보의 총성 한 방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게 아니듯 아무 문제없이 평화로웠던 리그가 극소수의 일탈과 한 번의 잘못된 결론으로 하루아침에 망가진 건 아니다. 리그 중단 사태 이전에도 KBO리그는 승부조작, 도박, 성범죄, 금지약물, 음주운전, 심판과 구단 관계자의 부적절한 결탁 등 각종 추문으로 팬들의 인내심을 시험해 왔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라는 타이틀과 ‘800만 관중’이란 숫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KBO리그는 위기였고 여기저기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외부에서 KBO리그를 바라보는 전문가들도 머지않아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고질적 문제와 팬들의 불만이 쌓이고 쌓여 한계에 도달한 시점에 방역수칙 위반과 리그 중단이라는 버튼이 눌리면서 일거에 폭발한 것이다.

방역지침 위반이라는 ‘사건’이 리그 중단 ‘사태’로 이어진 과정은 KBO리그 위기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잘 보여준다. 사실 구단과 KBO가 상식적인 대처만 했더라도 일부 선수의 방역수칙 위반 사건은 도박, 음주운전 같은 ‘사건사고’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구단들과 KBO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시대정신인 ‘공정’의 가치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시즌 전 모든 구단이 합의해서 만들어놓은 방역 매뉴얼이 몇몇 구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졌다. 약간의 유불리와 팀 전력상 손해를 감수하고 리그 전체를 위해 지키기로 한 약속이 일부 영향력 있는 구단의 이익과 연관되자 없던 얘기가 됐다.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구단들도 저마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쪽을 찾으려고 주판알을 굴렸다.

리그 중단 결정을 내린 KBO 이사회는 10개 구단 대표이사들로 구성된 합의체다. 일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구단 대표이사는 구단 모기업에서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임기 2~3년짜리 시한부 사장이다. 역대 대표이사 재임기간 평균을 내보면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구단 아르바이트생, 협력업체 직원보다도 야구계에 머무는 시간이 짧다. 프로야구를 조금 알 만하면 임기가 끝나 다른 낙하산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떠난다. 그러니 이들에게 야구에 대한 전문성이나 애정, 프로스포츠에 대한 철학, 미래지향적인 비전, 리그십과 같은 가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임기 동안 사고 없이 성적만 올리고 다른 곳으로 영전하면 그만이다. 이런 인사들이 모여서 KBO리그와 야구계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니, 야구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좋은 결정이 내려지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

이기주의에 눈먼 구단들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장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면 한국 프로야구의 컨트롤타워인 KBO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구단들에 주도권을 내준 KBO에 위기를 헤쳐나갈 리더십이나 여러 구단들 간에 엇갈린 이해관계를 다루는 조정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 야구인은 “리그 사무국의 힘은 예산배분과 수익창출에서 나오는데, KBO는 2007년 현대 유니콘스 해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170억원의 야구발전기금을 탕진하는 실기를 했다. 그때 이후 KBO 이사회에서 힘의 무게중심이 급격하게 구단들로 넘어갔다”고 전했다.

구단이 ‘갑’이 된 KBO 이사회에선 목소리 큰 몇몇 구단이 주도하고 나머지 구단이 따라가는 식으로 대부분의 의사 결정이 이뤄진다. 한 구단 관계자는 “실행위원회, 이사회 때마다 항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논의를 이끌어가는 몇몇 구단이 있다. FA 제도 개선, 외국인 선수 제도가 어느 팀이 원하는 대로 바뀌는지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KBO 총재마저 특정 구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사가 임명된 현 체제에서는 힘의 불균형이 더욱 한쪽으로 쏠리는 분위기다. 구단 대표들은 리그 발전에 관심 없고 팀 성적과 모기업 눈치만 보는데, 이들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KBO는 무능하고 무책임하다. 이 근본적인 한계가 일부 선수의 일탈을 리그 전체의 궤도이탈 사태로 키웠다.

KBO 이사회의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운영방식도 문제다. 이사회가 열리면 그 안에서 어떤 생산적인 논의가 오갔고 무슨 얘기가 나왔는지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는데, KBO 이사회는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처럼 은밀하게 이뤄진다. 사장들은 익명 뒤에 숨어 무책임하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야구계를 떠나면 그만이다. 일이 잘못되면 욕은 KBO가 대신 먹는다. 리그 중단 결정만 해도 10개 구단이 왜 시즌 전에 합의했던 매뉴얼을 스스로 뒤집었는지,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는지 투명하게 내용을 공개했다면 지금처럼 거센 비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KBO 이사회는 리그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음모론과 불신을 부채질한다. 무엇보다 야구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8월 7일 도쿄올림픽 야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도미니카공화국에 10-6으로 패하며 4위를 차지해 노메달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photo 뉴시스
지난 8월 7일 도쿄올림픽 야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도미니카공화국에 10-6으로 패하며 4위를 차지해 노메달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photo 뉴시스

황금알 낳는 거위 배 가른 KBO

언론과 전문가들이 KBO리그에 대해 이런저런 지적을 하면 KBO 구성원들이 어김없이 하는 말이 있다.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KBO가 힘있는 조직이 아니다” “KBO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자조 섞인 언급이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왜 KBO는 미국 메이저리그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손가락질하지만, 야구계 인사들은 “MLB와 KBO는 태생부터 다르다. KBO가 MLB처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MLB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구단들이 필요에 의해 하나로 뭉쳐 만든 리그다. 반면 KBO리그는 정부 주도로 대기업들을 윽박지르고 회유해 인위적으로 만든 리그다. MLB 구단들은 생존을 위해 자생력을 키우고 끊임없이 수익창출 방안을 연구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대기업의 사회공헌 차원에서 만들어진 KBO 구단들은 수익을 내거나 그 밖의 가치를 창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스스로도 제 몸을 어찌할 줄 모르는 공룡 같은 존재가 됐다. 머리로는 위기라는 사실을, 변화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는 게 KBO 구단들의 현주소다.

뉴미디어 중계권 이슈만 봐도 KBO가 얼마나 멸종위기종들이 모인 집단인지 알 수 있다. 유튜브와 OTT 등을 통한 콘텐츠 확산은 야구 팬층을 넓히고 젊은 세대에 친근하게 다가가는 데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구단들은 KBO리그의 미래 먹거리를 좌우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스스로 갈랐다. KBO 리그의 뉴미디어 중계권은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 KT 등 통신 3사와 네이버, 카카오다음이 포함된 5개 통신·포털 컨소시엄이 보유하고 있다. 컨소시엄은 저작권 권리 강화를 주장하며 경기 영상이 들어간 움짤 등을 팬들이 활용하는 것도 움츠러들게 했다. 통신사가 모기업인 일부 구단들이 주도하고 나머지 구단들이 장단을 맞췄다. 5년간 1100억원, 연평균 220억원이란 눈앞의 돈만 보고 그보다 훨씬 큰 가치창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당장 구단 살림에는 보탬이 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한국 야구의 미래에 엄청난 해를 끼치는 선택을 구단들 스스로 내렸다.

김경민 전 롯데 자이언츠 마케팅팀장은 “안타까운 건 정작 뉴미디어 권리를 가져간 주체들조차도 그 콘텐츠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들이 활용할 길은 다 막아놓고 정작 자신들도 쓰지 않아서, 프로야구 콘텐츠가 가진 가능성이 사장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크다. 계약이 끝나는 2023년까지는 어떻게 손을 쓸 방법도 없다”고 한탄했다. 뉴미디어 계약에 대해 “근시안적인 결정이었다”고 비판한 김 전 팀장은 “뉴미디어 중계권료 1100억원이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프로야구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문제인데 단지 돈만 좇아서 결정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과연 그 결정에 프로야구 콘텐츠 활성화 방안, 프로야구 산업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담겨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리그 중단 사태와 도쿄올림픽 노메달로 40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는데도, KBO는 아무 대책도, 뾰족한 해법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리그 중단 사태 이후 지난 4개월간 KBO가 한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캠페인 영상을 제작해 공개하거나, NFT(대체불가능토큰)사업 같은 지엽적 시도를 하는 게 고작이다. KBO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단체지원금을 사용해 만든 3편의 캠페인 영상에 대해 한 야구 관계자는 “KBO와 구단들이 말로는 ‘프로야구가 위기’라고 얘기하지만 실제 움직임을 보면 그다지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단적인 예로 KBO에서 만든 캠페인 영상을 보고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KBO리그가 위기인데, 중요한 건 저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불이 났는데 불은 안 끄고 엉뚱한 일을 하는 격 아닌가. 뭐가 문제이고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KBO가 맥을 잘못 짚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지방 구단 관계자는 “캠페인 영상을 만들려면 MLB나 NBA처럼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데, KBO 영상은 ‘공짜 술 좋아하면 패가망신’이니, ‘우리가 사랑하던 리그가 지금 위기’라면서 네거티브 메시지만 내보낸다. 누가 보라고 만든 영상인지 몰라도, 리그 홍보 차원에서는 역효과”라고 꼬집었다.

방송사 손해배상 요구에는 무관심

시대흐름과는 동떨어진 채 비전조차 제시 못 하는 KBO와 리그의 문제를 구성원들도 모르지 않는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만난 한 KBO 임직원은 “가을야구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올 시즌 이후가 걱정이다. 뭔가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비전이 보이질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직원은 “비전을 제시해도 그걸 실행으로 옮길 힘과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현 상황이 위기라는 건 야구계 인사이더 대부분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KBO나 구단 내부가 돌아가는 걸 보면 태평해도 이렇게 태평할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김경민 전 롯데 마케팅팀장은 “리그 중단 사태와 같은 일을 방지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리그 위기를 해결할 솔루션을 내놓는 등의 노력이 필요한데 그와 같은 깊이 있는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KBO리그의 진짜 위기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프로야구에 실망해 애정이 식은 기존 야구팬들은 그래도 다시 야구장과 중계방송 앞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아예 야구에 대한 관심 자체가 조금도 없는 젊은 세대다. 영화 ‘꿈의 구장’ 대사처럼 “야구장을 만들고 경기를 열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이제 꿈 같은 얘기다. 야구 말고도 즐길거리가 넘치는 MZ세대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오려면 완전히 새로운 접근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메이저리그에서 만든 ‘메이크 잇 메이저(Make it Major)’ 영상처럼 힙하고 쿨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경기’로서의 야구를 넘어 패션아이템으로, 문화상품으로, 새로운 볼거리와 놀거리로 야구를 확장하려는 시도도 해야 한다. 젊은 세대가 야구를 접하고 직접 해볼 기회를 늘리는 시도도 필요하다. 생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스포츠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할 일이 많고 할 수 있는 게 많은데도 KBO는 무력함을 호소하고, 구단들은 각자도생하며 제 이익만 좇는다. 그래도 낭떠러지 앞까지 내몰리면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지만 KBO와 구단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최근 열린 KBO 이사회에서 방송사들의 손해배상 요구 공문 얘기가 나오자 한 구단 사장은 “KBOP(KBO 마케팅 자회사)에서 알아서 하라”며 논의를 차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사들의 간절한 호소에 대한 논의는 1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방송사의 생존이 달린 리그 중단 문제를 방송사와 의논조차 않고 멋대로 결정했던 KBO 이사회답다. 그 무신경함과 무성의, 무지성과 무책임이 지금의 KBO리그 위기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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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헌 엠스플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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